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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5)화 (35/151)

35화
돌아가야 할 시간

과거의 기억이 꿈으로 되살아났다. 리세트가 그걸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꿈을 알아차린 건 요한 덕분이었다. 그날, 요한은 울지 않았으니까. 그저 가만히 리세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오랫동안 안겨 있었다. 한참 만에야 요한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지만 리세트는 보았다. 제 소맷자락을 꼭 붙잡은 손을. 자신을 담은 눈동자의 떨림을.

온기를 갈구하듯이 다시 안겨 오는 몸을 리세트는 힘껏 마주 안았다.

“괜찮아, 요한.”

꿈의 힘을 빌려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을 늦게나마 속삭여 보았다.

“앞으로 내가 지켜 줄게. 너를 괴롭게 하는 애들, 내가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 되게 세졌어! 이제 공부도 잘하고, 키도 커지고.”

그 말을 얼마나 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울어도 돼. 전하지 못한 마지막 말은 끝내 삼켜 냈다. 꿈이니까. 그러니 시원하게 울고, 훌훌 털어 내자.

리세트의 마음을 읽은 듯이 요한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현재의 모습과 조금 다른, 기억 속 그 소년의 눈망울이 보였다. 꿈이지만 너무도 생생해 리세트는 곤혹스러웠다. 어깨에 묻어 있는 눈물이 꼭, 현실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들어 요한의 눈물을 닦아 주려던 리세트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든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익숙하지만 너무 오래 떠나온 곳. 공작저의 침실이었다.

밤이 다가오는 시간인지, 아침이 밝아 오는 시간인지 불분명한 빛이 창문에 쏟아지듯 들어왔다. 하늘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리세트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손끝 하나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기억일까.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주며 가늠해 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리세트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예쁜 색이었다. 리세트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색. 그 사람보다 옅은 파란빛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기가 너무 멀리 있었다. 어떻게든 닿고 싶어 손을 뻗을수록 아기가 멀어져 갔다.

무사히 태어나 줘서 고마워. 진심을 담아 말해 주어야 하는데 힘없이 벌어진 입술은 울음만 토해 냈다.

다시.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리세트.”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잡아 준 요한이 리세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물기가 번진 눈시울과 이마에, 다시 뺨으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이는 어느새 요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행이다. 우리 아기가 멀리 가지 않았구나.

안도감이 번지자 잠기운이 밀려들었다. 스르르 눈을 감는 리세트의 귓가에 요한이 속삭였다.

“어서 눈을 떠 줘.”

미소 짓는 얼굴과는 너무도 다른 슬픈 목소리였다.

❖ ❖ ❖

모르겠다. 너무 아픈 과거를 본 건 확실한데, 그 뒤에 이어진 꿈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꿈이었더라?

요한을 떠나온 날부터 종종 찾아왔던 악몽과는 다른 꿈이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아 꼭 기억해 내고 싶었다.

꿈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지만 리세트는 잠에 들 수 없었다. 찢어질 듯 온몸이 아프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예쁜 꿈이었는데…….

불현듯 꿈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가슴 깊이 남은 하나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요한을 닮은 아이였다. 남자아이일까, 여자아이일까. 지금에서야 궁금해졌지만 그 아이를 눈에 담는 순간에는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작고 예뻐서. 어서 눈을 떠 나를 봐 주었으면 해서. 그저 웃으며 기다렸던 것 같다. 그리고 리세트는 그 기다림조차 사랑했다. 자신의 곁에서, 요한이 아이를 안아 주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새로 태어난 사랑을 안고 있는 광경이었다. 영원히 기억 속에, 가슴속에 담아 두고 싶어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 꿈이 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깨어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참고 또 참아 냈다. 하지만 요한과 눈을 마주한 순간 리세트의 입술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벌어졌다.

이것 봐, 요한. 너무 예쁘지?

자랑하듯 얘기하자 요한이 생긋 미소 지었다.

우리 아기,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산산이 조각난 기대와 희망을, 웅크린 용기를 조심스럽게 모아 물어보자 요한은 이번에도 웃어 주었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든 불안을 지워 주는 그 말이 좋아서 리세트도 따라 웃었다. 아픈 것도 잊고 하하, 바보처럼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잠시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던 요한도 곧 다시 웃어 주었다. 처음보다 더 크고 맑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아빠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은지 아이는 눈을 뜨지 못했지만 방싯방싯 예쁘게 웃었다. 아빠를 꼭 닮은, 오직 리세트에게만 보여 주는 그런 미소를.

꿈인 걸 자각하고 있어 슬픔은 더욱 컸다. 이건, 꿈이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꿈.

이 아름다운 꿈에서 벗어나면 악몽 같은 현실이 덮쳐 오겠지. 요한은 아이를 죽이고 싶어 하니까.

그렇다면 조금만 더, 이 꿈을 간직할 수 있게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아빠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리세트는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막연하게 상상해 보던 아주 어렸을 적 요한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 예쁜 빛을 간직한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었다.

요한이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어 주는,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계속 그 꿈속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걱정 없이, 행복하게. 영원히.

꿈에서는 그리해도 괜찮으니까. 거짓 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으니까.

흐릿한 꿈을 더 좇기 위해 리세트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리세트.”

그 목소리가 리세트의 의식을 현실로 이끌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저항하듯 도망가자 다시, 이번에는 더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제발, 어서 일어나.”

시야가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아스라한 불빛 사이로 언뜻 파란 빛깔의 머리카락을 본 것도 같았다.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도 스치듯 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저 흐릿하게만 보였다. 리세트가 느낄 수 있는 건 자신을 품에 안은 채로 다독여 주는 사람의 포근한 온기뿐이었다. 꽁꽁 언 몸과 마음을 녹여 주는 따스한 품이 좋아 자꾸만 눈이 감기려 했다.

이 상태로 잠이 들면, 그 예쁜 꿈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만 더. 한 번만…….

간절한 바람을 담아 꿈이 다가오길 기다렸지만 눈을 가린 속눈썹은 점점 가벼워져만 갔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이 품의 주인을 리세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요한 델피니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요한의 모습이 안개가 낀 듯 뿌연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살아났다.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던, 간신히 미소를 짓던 그 모습이. 괜찮다고 속삭여 주던 목소리가, 뺨으로 떨어지던 눈물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리세트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듯한 손을 들어 요한의 등을 끌어안았다. 흠칫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한.”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이름만 불러 본 것뿐인데 폐부에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요한, 나……. 나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숨을 편하게 쉬어 봐.”

리세트가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의 떨림도 더욱 커져 갔다. 목과 쇄골을 적시는 건 분명 눈물일 터였다. 그 뜨거움이 꿈의 연장선처럼 느껴져 리세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시나마 꿈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미안했다.

리세트는 남은 힘을 그러모아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토닥여 주자 요한은 더 깊이 리세트를 끌어안았다. 흐느끼듯 우는 소리가 꺼져 가는 의식을 지탱해 주었다.

울지 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로만 되뇌었다.

요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간신히 내뱉는 숨에 섞여 닿지 못했다. 말을 하려고 노력할수록 헐떡이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게 갈라졌다.

질끈 눈을 내리감은 리세트는 호흡을 고르며 숨을 뱉어 냈다.

“울지 마……. 나, 이제는 정말 괜찮아.”

제일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꺼져 가는 의식을 붙잡고서라도 수십 번도 더 해 주고 싶었던 그 말.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천천히 고개를 든 요한의 눈시울에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 오랜만에 본 반가운 불빛이 요한의 얼굴에 스며들어 있었지만 부어오른 눈가는 가려 주지 못했다.

리세트는 그 흔적을 지우려는 듯 손끝으로 가만가만 매만지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떨리는 듯도 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미소 같다는 생각을 하며.

통증이 조금만 옅었더라면 직접 치료를 해 주었을 텐데. 이런 흔적쯤은 간단한 마법으로 얼마든지 지워 줄 수 있는데. 하지만 지금은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니 안심이라도 시켜 주고 싶었다. 더는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미약한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요한은 거친 손길로 눈물이 맺힌 눈가를 훔쳤다. 손끝을 흠뻑 적신 눈물은 손등에도, 메마른 입술에도 번졌다.

“피를 토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 정신을 잃다 깨어나길 반복했어. 깨어나면, 그 순간에 너는 고통에 몸부림쳤어. 그런데도 괜찮다고? 어떻게 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요한의 입술 사이로 울음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네가 죽을 뻔했어! 다시는, 너를 못 볼 수도 있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괜찮다고?”

턱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하얀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언제까지 나한테 숨길 생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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