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꿈속의 소년
리세트 하리펜에게 요한 델피니움은 영웅이었다.
친구가 되어 준 영웅에게 리세트도 멋진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다. 부끄럽지 않은 친구이고 싶었다.
그 여정을 향한 첫걸음은 시험이었다.
처음 받아 본 성적표는 정말이지 처참했다. 45라는 숫자가 꼴등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창피해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걸 몰랐을 때는 성적표를 들고 가 요한에게 온갖 자랑을 늘어놓았다. 신이 나서 재잘대는 리세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요한은 다정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잘했어.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받은 점수잖아.’
그 말을 믿었는데, 꼴등이라니!
맥이 다 빠져 버려 책상에 엎드린 리세트의 귓가에 숨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비난이 들려왔다.
“쟤 역시 꼴등이라며? 창피하겠다. 나였으면 얼굴 들고 못 다녔을 텐데 꼬박꼬박 수업에 참여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해.”
“저런 애가 내 친구였으면 어디 가서 말도 못 했을 거야. 수준이 맞아야 놀지.”
수준. 조용히 그 단어를 속삭여 보던 리세트는 벌떡 일어나 게시판으로 달려갔다. 학년별 석차를 지나 오른쪽, 가장 첫 게시판에는 전체 석차가 적혀 있는 거대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와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도 리세트의 탄식을 지워 주지는 못했다. 부러움과 동경도, 미칠 듯한 부끄러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석. 요한 델피니움.
맨 위에 적힌 그 이름을 리세트는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나는 수석에게 성적 자랑을 한 거구나. 꼴등이 1등에게, 그런 거구나.
그 애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같은 애를 친구로 둔 요한은, 그 애들에게 놀림거리가 될지도 몰라.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리세트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킨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리세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전투 계열의 건물 근처에서 만났다. 그러니까, 리세트가 항상 요한을 찾아갔다는 뜻이었다.
혹시, 내가 친구인 게 창피해서 그런 걸까. 그래서 나를 안 만나러 오는 거야?
리세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요한이 있을 건물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수업에 빠진 날이었다.
“내가 시험에서 1등 하면, 그때는 우리 계열 건물에 놀러 올래?”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요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1등 못해도 돼. 갈게.”
“싫어! 1등 하면 와. 알겠지? 얌전히 기다려 줘. 응?”
단 하루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잠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성적은 달콤했다.
“1등이다. 내가, 1등이야!”
리세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요한과 손가락까지 단단히 걸고 약속했다. 리세트가 1등 하는 날에, 요한이 리세트를 찾아오겠다고.
게시판 앞에서 성적을 확인하던 리세트는 요한의 얼굴을 보았지만 알은체하지 않고 도망쳤다. 요한이 올 테니까. 나를 데리러, 우리 계열 건물로 올 테니까.
“델피니움 공작이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며?”
귀를 쫑긋 세운 리세트는 그 대화를 주의 깊게 엿들었다.
“선생님이 시험을 다시 보게 해 주겠다고 해도 그냥 제출했다더라. 그 과목은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나 봐.”
“내가 들은 건 좀 달라. 답안지를 밀려 썼다고 하던데.”
답안지를 밀려 썼다니!
자신이 더 안타까워져 리세트는 어서 빨리 요한이 오길 바랐다. 다음부터는 꼼꼼하게 답안지를 살펴보라고 해야지. 아는 것도 또 보고 마지막까지 긴장하라고, 얘기해 주어야지.
의자에 앉아 있던 리세트는 살랑살랑 다리를 흔들며 요한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학생이 리세트의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야, 고아. 너 정말 델피니움 공작과 친해?”
그 애가 던진 말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강의실에 모여 있던 애들이 터트리는 웃음은 너무도 밝아서 조롱기가 더욱 선명하게 전해졌다.
“응. 친해! 요한은 내 친구야. 우리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리세트는 크게 외쳤다. 그런데 누군가 더 큰 목소리로 리세트의 말을 가로챘다.
“거짓말하지 마! 너 같은 게 어떻게 공작과 친하겠어?”
“네가 뭘 알아! 우리, 친구 맞아. 맞단 말이야!”
씩씩대던 리세트는 황급히 책을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요한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서 빨리 나가려던 순간에 빈정대는 목소리가 리세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와 고아의 만남이라니. 눈물겨운 우정이네.”
“그게…… 무슨 소리야?”
“뭐야, 그 소문도 모르고 어울리는 거야?”
킬킬거리며 웃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 주고 싶은데 리세트는 꼼짝하지 못했다.
“요한 델피니움은 자기 가족을 죽였어. 자의로 고아가 된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네가 친하게 지내다니, 웃기잖아.”
“조심하라고. 자기 손으로 가족도 죽인 사람인데 너 하나쯤이야, 죽이는 건 어렵지도 않겠지.”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요한이 그랬을 리 없잖아!”
리세트는 책상을 밟고 넘어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애들의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리본을 붙잡아 제 앞으로 끌고 와 이마를 맞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니 많이 아파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 빨리 사과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맹세하라고!”
무거운 책이 가득 든 가방으로 그 애들의 등을 흠씬 두드려 준 뒤 리세트는 재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잘못을 저지른 건 저 애들인데 건물 뒤편에 숨은 사람은 리세트였다.
리세트는 동급생 무리가 건물을 나선 후에야 다시 강의실로 들어왔다. 언제 요한이 올지 모르니 리본을 다시 묶고 머리도 높게 올려 묶었다. 손톱에 긁혀 난 상처도 말끔하게 치유했다.
단정한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맞아 주고 싶었다.
분주했던 손의 움직임은 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다 끝나 있었다.
리세트는 흘끔흘끔 문 앞을 바라보며 가방끈을 만졌다. 몇 시간째 이어지는 기다림이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이제는 건물에서 반드시 나가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 느낀 슬픔은 그래서 더욱 컸다.
그날, 요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애가 처음으로 리세트와 한 약속을 깬 날이었다.
❖ ❖ ❖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소문을 리세트는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접하게 되었다. 공작 일가를 죽인, 그 사고의 원흉이 요한이라는 헛소문이었다.
리세트는 그때까지도 요한의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몰랐다. 끔찍한 화재 사고였다고 한다. 영지의 저택에 불이 났고, 그 불이 요한의 가족을 집어삼켰다고.
저택을 태운 건 파란 불이었다더라. 저택 앞에 쓰러진 채로 발견된 요한 델피니움의 마력은 거의 다 고갈된 상태였다고 하더라. 그 말들의 끝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요한 델피니움이 저택에 불을 질러 부모와 동생을 죽였다더라.
그 소문을 듣게 된 날을 기점으로 리세트의 하루는 대체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싸움으로 시작해, 싸움으로 끝이 났다.
악의적인 소문을 입에 담는 애들을 찾아내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놓았다.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흠씬 때려 주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손가락을 깨물어 버리기도 했다.
요한 앞에서는 한마디 말도 못 하는 애들이 리세트에게 와서 소문의 진위 여부를 알고 싶어 했다. 동기,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리세트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꿈속에 엄마 아빠가 나오는 날에는 너무 슬퍼 가족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럴 때마다 요한은 리세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한 감정이 커질수록 리세트는 더 열심히 싸우러 다녔다.
선배 한 명과 심하게 다투어 입술이 찢어진 날에 하필이면 요한이 찾아왔다. 기쁜 마음은 잠시, 그제야 제 모습을 기억해 낸 리세트는 황급히 뒤를 돌아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일이었다.
“누구야?”
성큼성큼 리세트에게 다가온 요한은 주변에 모여 있는 애들을 훑어보았다.
“누가 그랬냐고 물었어.”
혹시나 저 애들의 입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올까 싶어 리세트는 요한의 손을 잡아끌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숲길로 들어선 후에도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잘 따라오다 갑자기 멈추어 선 요한이 마주 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강제로 뒤를 돌아보게 된 리세트는 자유로운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고개는 푹 숙인 채였다.
어떡하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리세트는 마침내 적절한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자신을 고아라며 놀리는 애들과 싸웠다고 하면 되겠지. 그건 사실이니까, 괜찮겠지.
“놀랐지, 요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별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목소리는 벌벌 떨렸다. 고아. 수없이 들은 그 말을 제 입으로 뱉어 내는 게 이렇게 힘이 들 줄은 몰랐다.
리세트는 활짝 미소를 지은 얼굴을 들어 요한을 마주했다.
“걔네가 나보고 계속 고아라고 놀렸어.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 사실인데, 그걸 아는데도 너무 화가 나서…….”
이만하면 꽤 괜찮은 대처인 듯했다. 대답하지 않는 요한을 향해 리세트는 더욱 해맑게 웃어 보였다.
“하필 이럴 때 오면 어떡해! 내가 발표하고 있을 때나, 칭찬받고 있을 때 왔어야지.”
“너는, 내 소문 못 들었어?”
애써 꾸며 낸 미소는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슬픔에 젖은 요한의 눈동자를 보며 리세트는 마주 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들었잖아. 안 궁금해? 너는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아?”
“……사실이 아니니까.”
소리 내 엉엉 울면 위로라도 건넬 텐데 요한은 절대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붉어진 눈시울만이 그 애가 드러내는 슬픔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실이 아니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내가 왜 너한테 물어보겠어?”
요한의 손을 놓은 리세트는 양팔을 벌려 친구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받은 위로의 보답치고는 너무 보잘것없지만 온 마음을 다해 안아 주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무렵에 요한이 고개를 내려 리세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겁게 젖어 드는 어깨를 모른 척했다.
“와아, 하늘이 정말 예쁘다. 네가 오늘 나를 데리러 와 줘서 그런가 봐.”
요한이 편히 울길 바라며 리세트는 오래도록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절대 너를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 울게 하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