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저를 찾으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노바르는 지독한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리세트가 쓰러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터라 마음이 복잡했다. 다급하게 리세트에게 달려오던, 리세트를 안고 미친 듯이 달려가던 공작의 얼굴이 현재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공작은 어째서 나를 부른 걸까. 어떤 것을 알아내려고 할까.
‘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요. 제 남편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요.’
간절했던 리세트의 부탁을 되새기며 노바르는 굳어 있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은은하게 밝혀 놓은 파란 불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공작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 파묻힌 눈동자는 섬뜩하고 무서웠다. 까마득한 어둠에 먹혀 버린 것만 같아서.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점점 커져 갈 무렵에 마침내 공작이 일어섰다.
문가에 선 채로 꼼짝 않고 있던 노바르를 향해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공작의 등 뒤로 보이는 리세트의 얼굴이 하도 창백해 저절로 눈길이 움직였다.
이 방을 감싼 마력 때문인지 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와 눕혀 놓았다 해도 선뜻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아내가 쓰러지기 전에 같이 있던 사람이 너였지.”
공작은 성큼 걸음을 옮겨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더 이상 쳐다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노바르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감정 없는 눈으로 공작이 직접 일깨워 주었으니.
“네, 그렇습니다.”
“왜 하필 너였을까.”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공작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제가 직접 시간을 내어 달라 청한 일입니다.”
노바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이번에 공작 부인과 같은 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수업에 관련된 일도 그렇고, 여러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해도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지금 그딴 것을 묻자고 너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공작에게서는 한 번도 타인에게 굽혀 본 적 없는 자의 특유의 오만함이 느껴졌다. 위협적인 눈빛과 고저 없는 목소리, 상대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델피니움 공께서 무엇 때문에 저를 부르셨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아, 그래?”
메마른 듯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요한은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증상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잖아.”
요한이 그 말을 읊는 순간 노바르 로슈만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요한은 미세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살며시 말아 쥔 주먹과 크게 요동치는 목울대를 지나온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기가 번졌다.
“네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나?”
“저는 정말로,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제대로 말해야 할 거야, 로슈만. 내가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모르겠으니까.”
“그 당시에는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바람에 정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너무 당황하여…….”
“노바르 로슈만.”
가차 없이 말을 자른 요한의 두 눈에는 이제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기색도, 살기도, 귀찮음조차도. 그것이 더욱 광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 아내와 어떤 대화를 나눈 거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노바르 로슈만은 감히 그를 속이려 하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난다. 가증스럽고 뻔뻔하게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
“사실, 공작 부인께서…….”
노바르는 질식할 것만 같은 살기를 견뎌 내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속여야 한다. 어떻게든 공작을 속여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나.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은 저 남자를 완벽하게 속일 만한 거짓말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요즘 몸이 조금 아픈 것 같다고, 이제부터 실습 때는 제가 시연을 보였으면 한다고 부탁하셨습니다.”
“…….”
“강의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고 하셨어요. 수업이 끝난 직후, 카페로 가던 도중에 제가 부인을 부축한 것을 본 학생들도 있을 겁니다.”
“…….”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진실뿐인 대답이었다. 리세트의 마력이 뒤틀려 있다는 건 진실 속에 숨겼다. 공작이 더 이상의 의문을 품지 않을 거라고, 노바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명의라 소문난 자가 세심하게 리세트를 살펴본다 해도 마력의 영역까진 침범할 수 없고, 마법사 또한 멀쩡히 살아 숨 쉬는 타인의 마력을 감지해 내는 건 무리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불가능의 범주에 속해 있으니.
“리세트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굴던 공작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무언가를 참는 듯한 얼굴로 공작이 그만 돌아섰다.
그 후로 공작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의 곁을 지키며 서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질문을 건네지도 않았다.
“저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노바르는 조용히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부디 리세트 델피니움이 무사히 눈을 뜨길. 노바르는 간절히 되뇌었다.
❖ ❖ ❖
“주인님! 정말, 큰일입니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께서 쓰려지셨다고 합니다!”
경매장에서 요한을 기다리던 아트반에게 리세트의 소식이 전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도저히 믿기지 않아 수행인에게 계속해서 반문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쓰러졌다. 리세트가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 아트반은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크리프 후작 각하?”
기숙사에 들어서자 낯이 익은 사용인들이 다가왔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지친 얼굴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인께서는?”
“지금은 편안해 보이십니다. 호흡도 안정적으로 돌아오셨어요. 하지만…….”
말을 잘 이어 가던 하녀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새빨간 수건에 아트반의 눈길이 고정되었다.
피를 많이 흘렸다고 했지.
아트반은 천천히 사용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손은 물론이고 그들의 옷 곳곳에는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셔서……. 마님께서 일어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울음을 참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아트반은 뛰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요한.”
리세트의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요한의 뒷모습이었다. 요한은 리세트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세트는, 괜찮아?”
요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출혈이 심했다고 들었어. 지금은 어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망설이던 아트반이 막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차갑고 언뜻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아트반은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떤 걸 묻는 거야?
리세트의 아이가 사실 너의 아이라는 것인지, 유산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이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는 것인지. 요한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자 아트반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요한이 어떤 것을 묻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은데, 그 방법조차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래. 아트반 크리프, 너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
“……무슨 소리야?”
“왜? 나한테 숨기는 게 너무 많아서 감이 안 잡혀?”
뒤를 돌아본 요한의 얼굴 어느 곳에서도 평소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아트반은 가장 건네기 싫은 그 말을 전해야만 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요한.”
“그 말도 이제 지겹네.”
진심이 담긴 사죄의 말조차 요한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
“나가.”
❖ ❖ ❖
요한은 기다렸다. 힘들었지만 기약 있는 기다림이니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다 하면 돌아온다고 했지.
그러니 그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다시 내 곁으로, 우리의 집으로. 리세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에는 파티를 하자. 각자 원하는 음식을 하나씩 가져와 밤새 대화를 나누던 어렸을 적 그날들처럼.
이번에는 꼭 우리가 만든 규칙을 지키라고 해야지. 욕심쟁이 리세트는 바구니에 서너 개씩 음식을 담아 오곤 했으니까.
기다렸다. 매일 얼굴을 마주 보던 밤에도,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순간에도 기다렸다.
몸을 맞대고 있는데, 숨결이 겹쳐질 정도로 가까운데 리세트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매일매일 외로웠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어디론가 리세트가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네가 집으로 돌아오면 이런 감정도 잦아들까.
눈을 맞추고, 끌어안고, 숨결을 나누어도 부족했다.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버린 듯 공허했다.
기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다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는 리세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눈을 떠 다시 나를 봐 줘. 조금 더, 나를 떠나 있고 싶다 해도 괜찮으니까 어서 일어나 줘.
그런 시간들이 이어졌다. 나흘째 리세트는 눈을 뜨지 않는데, 아침은 찾아오고 달도 떠올랐다. 그의 세상은 암흑 속에 잠겨 버렸는데 야속한 시간은 착실하게 제 갈 길을 향해 움직였다.
“리세트.”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에는 정처 없이 요동치던 파란 불빛도 잠잠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일렁이는 불빛이 스며든 요한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아직도 자고 싶어?”
리세트는 그가 웃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입술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요한은 웃었다.
계속 웃는 연습을 했다.
밤이 깊었고, 또 아침이 찾아왔다. 리세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