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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1)화 (31/151)

31화
세상이 멈춰 버린 것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길을 거닐던 리세트는 문득 아쉬워져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예쁜 날 요한과 함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옆에 있는 건 남편인 요한도, 절친한 친구인 아트반도 아닌 노바르 로슈만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짧게 지나간 고통이지만 처음 겪어 보는 아픔이라 괜스레 별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그대로 죽었다면 모든 게 후회되고 아쉬울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어머니의 얼굴도, 아버지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아기조차도. 오직 요한의 얼굴만 떠올랐다.

너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아서. 우리 아기를 아트반의 아이라 속여서.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 주어서. 우습게도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다시 만나고 나는 한 번도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 줬구나. 너는 많이 해 줬는데.

눈을 맞추고 있을 때도, 잠결에도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사랑해. 사랑해, 리세트. 다른 누구일 수 없는 분명한 요한의 목소리를.

“저는 사과주스를 마실 건데, 부인께서는요?”

“저도 같은 거로 마실게요.”

그들은 한적한 카페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전부 카페 안에 자리를 잡아 바깥에는 리세트와 노바르 로슈만, 두 사람뿐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의례적인 인사를 한 점원이 테이블을 세팅하고 물러갔다.

벤치 앞에 자리한 원형의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유리컵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 물방울이 툭,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도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얼음이 담겨 있지 않은 컵을 리세트 앞으로 옮겨 주었을 때였다.

“제 마력에 변화가 생긴 건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침묵의 끝을 알린 쪽은 리세트였다.

“그걸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그가 내놓은 답변이 리세트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마력의 흐름을 감지해 내는 사람이 있다는 거, 저는 처음 들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무슨 방법으로요? 알아낸 방법이 있다면, 해결할 방법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그건…….”

바로 대답하지 못한 노바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유리컵 안에 담긴 얼음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는 부인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게 훨씬 중요하지요. 정말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닙니까?”

“네, 아프지 않아요. 아픈 곳 없어요. 그런데 마력의 흐름만 뒤틀렸어요. 이건…….”

말을 매듭짓지 못한 리세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위로를 해야 하나. 희망찬 말이라도 해 주어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노바르는 결국 어떠한 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위로도, 희망찬 말도 다 필요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것보다는 현실을 바로 보는 게 옳은 일인 듯했다.

“솔직히 정상은 아니죠. 마력만 놓고 보면 어떻게 살아 계신 건지 궁금할 정도예요.”

조금 지나친 감이 있는 듯해 뒤늦게 눈치를 살폈지만 리세트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긴 한 것인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마력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요?”

떨림을 머금은 목소리와 감정 하나 없이 메말라 보이는 얼굴이 주는 괴리감 때문에 노바르는 말문이 막혔다.

“방법, 알고 계신 어떤 거라도 좋아요. 말해 주세요. 위험한 것도 상관없어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마력의 흐름을 주제로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연구가 이어져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뚜렷한 성과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노바르의 입술은 기다란 한숨만 흘렸다. 리세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이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 테지.

“의사는 만나 보셨습니까?”

“이미 만났어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다른 의사를 찾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잘못 보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미 많은 분을 만나 봤어요. 그 사람들도, 밀란 선생님께서도 눈치채지 못하셨어요. 로슈만 경만 알아봤어요. 그래서 경께 도움을…….”

리세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에 잠겼다.

핏기 없는 뺨과 텅 비어 버린 듯한 눈빛이 마치 죽은 사람을 연상케 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노바르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제 말을 어디까지 믿어 주실 수 있습니까.”

“…….”

“제가 부인께 어떤 제안을 하나 할 겁니다. 받아 주실 겁니까?”

“…….”

“도와드리겠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리세트를 도울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희박한 확률이고, 아직 제대로 연구가 진행된 것도 아니라 망설여졌지만 저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저렇게 맥이 풀린 듯한 얼굴을, 희망이 꺼져 버린 눈동자를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와주고 싶다. 이번에는 정말, 너를 도와주고 싶었다.

리세트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노바르는 고개를 돌려 카페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의 말이 들려올까 걱정되었다.

너무 성급하게 굴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노바르는 옆에서 들린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떨어지고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였다.

“……부인?”

❖ ❖ ❖

정처 없이 헤매던 요한은 리세트가 있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리세트는 아카데미 안에, 이곳에 있다. 그 사실이 노바르 로슈만 같은 불쾌한 이름의 흔적을 전부 지워 주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버린 게 아니구나.

거칠어진 숨결을 뱉어 내는 입술이 뜨거운 열기로 메말랐다. 갈수록 걸음도 빨라졌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던 학생들을 스쳐 지날 때도, 카페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요한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와 부딪치고 또 사과의 말들이 들려와도 요한의 의식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모든 것들이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리세트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주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벤치에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다소 먼 거리였지만 요한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리세트였다.

카페 길목으로 접어든 요한은 걸음을 늦추며 리세트를 살폈다. 햇빛을 가려 주는 차양 막 아래에 리세트가 있었다. 그늘도 미처 다 가려 주지 못한 햇살이 느슨하게 올려 묶은 은빛의 머리 타래에 스며들었다.

그늘 아래에 있어서 그런 걸까.

리세트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마치 어젯밤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인지 리세트와 노바르 로슈만의 표정은 짐짓 심각해 보였다.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던 요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선 건 그때였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리세트.”

자그마한 부름은 바람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요한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잔기침을 토해 내던 리세트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막았지만, 손 틈새로 흐르는 붉은 액체는 미처 막지 못한 채였다. 리세트 주변으로 그 붉은 액체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벤치 위로, 여린 잔디가 돋아난 푸르른 바닥 위로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리세트를 담고 있던 눈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리세트의 몸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리세트!”

❖ ❖ ❖

의사를 만나 보아라. 다른 의사를 찾아가라. 리세트의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그 말을 읊는 노바르 로슈만의 얼굴이 점차 흐릿하게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차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도와줄 테니 자신을 믿어 달라는 노바르 로슈만의 목소리도.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어떠한 것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더는 아프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까지 들 무렵에 리세트는 보았다.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는 요한을. 자신을 품에 안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요한을. 익숙한 온기가 전해지자 조금이지만 아픔이 옅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리세트. 조금만 참아. 내가 금방…… 금방 낫게 해 줄게. 눈 감으면 안 돼.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조금만 견뎌. 제발, 제발…… 부탁이야.”

전혀 괜찮지 않았다. 입에서는 비명을 토해 내는 것 같은데 울컥울컥 무언가 입가를 비집고 나와 시야를 어지럽혔다.

아팠다. 그래도 요한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요한.

요한.

힘겹게 불러 보아도 요한의 눈동자는 리세트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다시,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요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달리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제발……. 리세트 제발 눈 감지 마. 제발.”

괜찮아, 요한. 나 눈 뜨고 있어. 그러니 너를 보고 있는 거잖아. 너는 어째서 내 말을 듣지 못해?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요한은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힘겹게 입술을 떼던 리세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것 같기도, 차가운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리세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온 요한의 얼굴은 온통 눈물과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언뜻 붉게 물든 석양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세상이 반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였다.

또렷한 시야에는 새파란 하늘이, 흐린 시야에는 붉은 하늘이 비쳤다. 그 광경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에 더 큰 격통이 밀려들었다.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러다가도 아프니까 차라리 죽여 달라고, 숨이 안 쉬어진다고 울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리세트의 세상은 완전한 암흑 속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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