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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0)화 (30/151)

30화
나를 버리고

요한은 의자에 기대앉아 회의를 관망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이상 유의미한 논쟁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듯했다.

그 예상에 화답하듯 회의장은 곧 떠들썩한 싸움의 장으로 변모했다.

“경들은 정말 이 나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겁니까?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어요! 어서 추가 인원을 확보해 휴전 지역으로 보내야 합니다!”

“거참,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쪽은 그 괴물들입니다. 계속 동태를 주시하다 한 번에 치워 버리는 게 좋다니까요. 뭘 그리 걱정을 사서 합니까.”

“올라온 보고서를 제대로 읽기는 했습니까? 그냥, 보지 못했다고 해 주세요. 그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으니.”

“생각을 좀 해 보세요. 그 많은 인원은 어떻게 충당할 겁니까? 이제야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내기라도 하시려고요?”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 이번 임무의 지휘관으로 자원을 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모범을 보여야지요!”

“경께서 하시면 되겠네요.”

“내 마력은 치유 계열이지 않습니까! 전투나 방어 계열에서 가야지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귀족 가문 가주들의 목소리는 전부 의식에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의 생각을 지배한 건 다름 아닌 리세트 델피니움, 소중한 아내였다. 그리고 리세트가 최근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모든 것들 또한 그 생각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내내 그를 불안하게 한 모습까지도.

어지럽게 뒤엉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요한은 처음부터 찬찬히 모든 걸 다시 떠올려 보았다.

바닥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던 리세트. 생각을 정리해야 해서 그랬다고 했지. 무슨 생각이기에 그토록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리세트의 생각을 들여다보지 못하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요한은 처음 시작된 의문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리세트는 어째서 그런 책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다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인데 리세트는 굳이 책에서 그 해답을 찾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물어보기 힘든 질문이거나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니 피하는 것이겠지.

그를 둘러싼 많은 소문에 대해 리세트는 묻지 않았다. 궁금해하는 내색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껏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곳에 갑작스럽게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심지어 리세트는 지금 임신을 한 상태였다. 한 번 유산을 겪은 몸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아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도 부족할 텐데, 어째서 가문에 관한 것을 알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셀번 밀란. 케서린 로티. 이들은 절대 리세트에게 안 좋은 소리를 전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건 한 사람, 노바르 로슈만이려나.

“델피니움 공?”

한 귀족 인사가 그를 부르자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일제히 요한에게 향했다. 요한은 살짝 고개를 까딱여 회의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저는 이번 안건에서는 반대표를 던질 예정이니 편하게 토론을 진행하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투표용지를 건네받던 요한은 그 외침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떨렸지만 꿋꿋하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요한은 픽, 실소를 흘렸다.

“이번 봄부터 약 1년간 임무에서 제외되는 조건으로 지난 모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제 의무는 다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 그건……. 하지만 이번 일은 예외지요!”

“제가 할 일은 충분히 다 했으니, 이제 경들의 의무를 다하세요.”

회의장에 모인 인원들 중 누구도 요한의 말에 반박하고 나서지 못했다.

아내의 곁을 지켜야 한다. 공작이 올해 초부터 단단히 주지시키지 않았나. 그걸 위해 지금껏 공작은 크고 작은 모든 임무를 수행해 왔다. 공작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까지 다 처리해 주었으니 그를 붙잡을 구실은 없는 셈이었다.

요한이 투표용지에 서명을 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경매장으로 갈 거야.”

회의장 앞을 서성이던 수행인을 발견한 요한은 명을 내리며 앞서 걸었다. 조용히 뒤따라온 수행인은 난처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식사부터 하고 가시지요.”

“아니. 경매장으로 가.”

마부석으로 간 수행인이 명을 전달하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수행인의 보고를 받으면서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여전히 생각의 중심은 리세트,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

자꾸만 어제 본 리세트의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을 맴돌았다.

불도 밝히지 않은 방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무서워하는 어둠 속에서도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리세트가 떠올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번 경매에서는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무기가 대량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크리프 후작 각하께서는 먼저 도착해 계시겠지요?”

보고를 이어 가던 수행인은 천천히 입술을 닫았다. 주인의 생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뒤에 이어질 상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도 일정을 바꾸게 되겠구나.

어떻게 해야 주인의 업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던 공작은 이윽고 마부 쪽으로 난 창을 두드렸다.

마차는 방향을 틀어 속도를 올렸다. 이제 경매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로 마차가 달려 나갔다.

이 길의 끝은 아카데미가, 공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 ❖

몸에 밴 습관처럼 당연하다는 듯 발걸음이 이어졌다.

아카데미의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길을 따라 분수대를 지나왔다. 숲과 가장 가까운 건물이 있는 곳. 리세트에게 가는 그 길은 요한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눈을 감아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치유 계열의 건물로 들어와 한참 앞으로 걸어가던 요한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건 학부생들의 교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그들의 목에 묶인 붉은색 리본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요한이 한참 시선을 내려야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리세트는 이곳에 없지. 다른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을 테니.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을 바라보는 눈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떠들썩하던 1층의 분위기는 어느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요한은 복도 끝 편에 자리한 강의실 앞에서 이만 몸을 돌려 세웠다. 별다른 생각조차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니.

그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부생들이 우물쭈물하다 길을 터 주었다.

리세트도 꼭 저만했던 때가 있었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탓에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지. 처음 만났을 때는 어쩌면 이 애들보다도 작았던 것 같다.

곧 리세트를 만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온종일 불안에 떨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느리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래서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 시간에는 리세트와 함께 점심 식사를 유추해 보며 식당으로 향하곤 했다. 귀찮게 따라붙는 아트반 크리프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저절로 불쾌해졌다.

리세트는 그가 데리러 오는 걸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먼저 수업이 끝난 날에도 이 건물 앞에서, 때로는 강의실에서 책을 보며 그를 기다리곤 했다. 리세트가 숨어 있는 강의실을 찾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리세트는 분주하게 가방을 챙겨 들곤 했으니까.

그 다급하고 귀여운 소리를 따라가면 언제나 리세트의 얼굴이 보였다. 뺨이 조금 붉어진 채로 해맑게 웃던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

“이게 누구야. 델피니움 공작, 오랜만이에요.”

아름다운 회상의 끝을 알린 건 셀번 밀란이었다. 치유 계열의 건물이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 시간에 만난 건 뜻밖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역시 부인을 만나러 오셨나.”

“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있으니 부정할 법도 한데 요한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업하고 있을 시간인 줄 알았는데요.”

“어머, 부인의 시간표까지 다 파악하고 계신가 보지요?”

셀번 밀란은 대꾸하지 않는 요한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수업은 조금 어려운 내용이라 일찍 끝냈어요. 아쉽게도 길이 엇갈린 것 같네.”

기분 좋게 웃던 셀번 밀란은 번뜩 스치는 생각에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델피니움 공, 할 얘기가 있으니 내게 조금만 시간을 내 주세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짧게 바라본 요한은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건물을 벗어나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접어들 때까지도 그녀는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선생님.”

“하여튼 성격도 급하셔라.”

걸음을 멈추어 세운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건물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요한을 보니 더 이상 고민하며 시간을 끌면 안 될 듯싶었다.

“리세트가 혹시 많이 아픈가요?”

처음으로 요한의 눈길이 온전히 그녀를 향했다. 차가운 빛을 띠는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셀번 밀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 나를 찾아와서 그러더군요. 자기 몸이 예전과 같은지, 정말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는지 계속 물었어요.”

“……제 아내가, 그런 걸 물어봤습니까?”

“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냥 돌려보내기는 했는데 계속 신경이 쓰여서요. 처음에는 유산을 했으니 걱정이 되는 건가 싶었는데 리세트는 마치 확인을 받으러 온 것 같았거든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를 전한 후 요한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강의실을 돌며 샅샅이 찾아다녔지만 어디서도 리세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리세트가 사라진 침실의 모습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

다시, 떠난 걸까. 나를 버리고, 그 남자에게로.

기숙사도 도서관에서도 리세트를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숨을 앗아 가는 것 같았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던 무렵 마침내 리세트를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로슈만 선배님과 카페 벤치에 앉아 계셨어요.”

거슬리는 이름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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