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불길한 예감
리세트는 조금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귓가에 스치는 시계 초침 소리와 선생님의 목소리,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점점 더 흐릿하게 들려왔다.
손등에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펜을 꼭 쥐고 있었지만 리세트는 그 어떤 것도 받아 적지 못했다. 간신히 공책에 펜촉을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촘촘히 줄이 그어진 공책 위로 툭, 투둑, 한 방울씩 번지던 잉크 방울은 점차 개수를 늘려 가 어느새 한 면의 절반 정도가 검게 물들어 갔다.
말도 안 되지. 내가 죽어 가고 있다니.
리세트의 몸에는 어떠한 이상도 없었다. 많은 의사들을 만나 보았고, 오늘 아침에 밀란 선생님을 찾아가 재차 확인받은 사실이었다. 너무도 멀쩡해 특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금껏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괜찮겠지. 모두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자기 암시를 걸듯 속삭이곤 했던 그 말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죽어 가고 있다.
어제 오후, 노바르 로슈만을 만나고 난 후 홀로 도서관에 머물며 리세트는 처음으로 제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걸 느낀 순간에는 그저 믿기지 않아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했다. 하지만 마냥 그럴 수만은 없다는 걸 곧 받아들였다.
마법사가 가진 고유의 마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죽음. 그 하나의 경우만 제외하면.
마법사 본인조차도 제 생명이 꺼져 가고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진 마력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무서웠다. 모두가 괜찮다고 했는데, 리세트의 마력은 본래의 흐름과는 너무 많이 달라져서.
타인이 알아볼 정도면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태라는 소리인데 리세트는 너무도 멀쩡하게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손을 써 보겠지만 지금 상태로 무얼 할 수 있나.
그만 펜을 공책 옆에 내려놓은 리세트는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힘주어 맞잡은 채로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제발 뭐라도 떠올려 봐. 제발.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정신 좀 차리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보아도 결국 제자리. 죽음이라는 단어가 리세트의 머릿속을 차지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순간 가슴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아…….”
갑작스럽게 시작된 통증에 신음을 흘리던 리세트는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되는 중이라 리세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픔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숨을 고르는 사이에 누군가 리세트의 책상 옆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자 그가 보였다. 노바르 로슈만. 리세트의 마력이 뒤틀린 걸 제일 먼저 발견한 그 사람. 유일한 사람.
“아프신 겁니까?”
주위를 의식해 목소리를 낮춘 그에게 리세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영 미심쩍어하는 눈치라 무어라 대답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쥔 손을 활짝 펴 연신 주무르고 꼬집어도 보았다. 치맛자락을 찢을 것처럼 움켜쥐기도 했다. 다른 곳으로 아픔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제는 손에 식은땀까지 배어 나왔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어 흔드는 것처럼 통증의 강도가 점차 세졌다.
이대로 가다간 비명이라고 지를 것 같아 리세트는 입 안의 여린 살을 당겨 물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훅, 강한 바람이 불어오듯 아픔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바닥으로 리세트는 가만가만 배를 만져 보았다.
아가, 괜찮아?
눈으로 살필 수가 없으니 불안했다. 그래도 배는 아프지 않았다는 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소리 없이 길게 숨을 뱉어 낸 리세트는 살며시 시선을 내렸다. 펼쳐 놓은 공책 위에 손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리세트의 물건은 아니었다.
리세트와 눈이 마주치자 노바르 로슈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슬쩍 가리켰다. 땀이 많이 나셨어요. 닦으세요. 그는 입 모양으로만 조용히 말을 전했다.
손수건을 쥐고 잠시 머뭇거리던 리세트는 우선 이마를 닦아 냈다. 그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땀이 난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손수건을 다시 돌려 달라는 듯 그가 책상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반듯하게 접은 리세트는 제 가방 안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가 당황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리세트는 그대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노바르 로슈만이 여전히 미웠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도움받은 걸 모른 척 넘어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는 더 물어볼 것도 있으니까. 이왕이면 빨아서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리세트가 편안하게 숨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간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주치의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요한은 서류를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의사는 염려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리세트가 사라진 이후로 통 잠을 못 이루는 그를 잘 알고 있는 주치의였다. 하지만 그 걱정의 방향을 요한은 다른 곳에 돌렸다.
“아카데미로 갈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요즘 매일 마님을 만나러 그곳으로 가시지요.”
“나와 함께 가야 하니 준비를 해 둬.”
“저도, 함께요?”
“정확한 날짜를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갈 거야.”
주인님의 독단이구나.
짧은 대화로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명을 받들었다. 마님께서 유산하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다시 아기님이 찾아왔다는 기쁜 소식 또한.
크리프 후작저의 주치의가 마님을 꼼꼼히 살펴보았다는 걸 전해 들었지만, 직접 만나 보지 못해 거대한 돌이라도 얹어 놓은 것처럼 가슴이 불편하던 차였다. 마님을 진찰하고, 축하와 위로를 하루빨리 전하고 싶었다.
집무실을 나서기 전,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공작을 보았다.
마님을 향한 사랑 하나만큼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지극정성을 다하는 공작이라는 걸 알지만 임신에 관한 것만큼은 예외였다. 인자하기만 한 주름진 눈가에 못마땅한 기색이 번졌다.
저 무심한 얼굴로 마님을 잘 위로하긴 하셨을까.
공작이 마님의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이 같은 고민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님 앞에서는 언제나 순한 양처럼 굴던 공작의 표정이 산산이 깨어진 걸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마님께서 자신과 함께 공작을 찾아가 임신 사실을 알린 날.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님의 걱정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기뻐하시겠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가 낳을 소중한 첫 자식이자 후계자가 아닌가.
이러다 체면이고 뭐고 전부 잊은 채 춤이라도 추실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난감했으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웃음을 참아야 하려나.
하지만 공작은 예상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여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님이 임신했다는 말을 들은 공작은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듯 아무런 말도 내어놓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무언가를 가늠하듯 마님을 빤히 바라보다 간신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억지스러웠는지 공작께서는 알고 계실까.
기쁨이 너무 큰 나머지 실성이라도 하신 건가 싶었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공작은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았다는 걸.
“테먼?”
“……죄송합니다, 주인님.”
문득 자신이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걸 인지한 그는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문을 닫았다. 터벅터벅 힘이 빠진 듯한 걸음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 ❖ ❖
주치의가 물러간 집무실은 펜촉과 종이가 닿으면서 만들어지는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일에 열중하는 듯했던 요한은 그만 펜을 내려놓았다. 뻑뻑한 눈을 감았다 뜨자 책상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찻잔이 보였다.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하얀 김이 피어오르던 찻잔은 어느덧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져 있었다.
분홍색 꽃잎이 띄워져 있는 차. 생긴 것만 보면 달콤한 맛을 예감하게 하는데 제일 쓰고 떫어 맛이 없다며 리세트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그 차라는 걸 뒤늦게 알아보았다.
찻잔을 만지던 손을 내려 서랍을 연 요한은 오늘 아침에 확인한 서류를 다시 꺼내 들었다. 리세트의 행적을 관찰한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익숙한 이름들 가운데 짜증스러운 이름 몇 개.
아트반 크리프는 그렇다 치더라도 노바르 로슈만의 이름이 계속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조까지 되었다니 더 자주 보게 되겠지. 성가시고 귀찮은 놈.
서류상의 문제점을 꼽아 보자면 기껏해야 이 둘의 이름뿐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어젯밤 리세트가 보인 여러 행동들을 차례대로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기를 끔찍이도 사랑하면서 찬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하고. 그가 이 세상에서 치워 버린 책에 관한 걸 묻고. 그뿐인가. 만약, 내가 아프면. 리세트가 한 말 중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말들만 늘어놓더니 그런 걸 묻는다는 게. 유산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주인님, 이제 출발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수행인의 목소리가 이어지던 상념의 끈을 잘랐다. 요한은 보고 있던 서류를 서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책상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잉크병 옆에 내려놓았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수행인이 다가와 날카로운 파편으로 조각난 찻잔과 그를 살폈다.
“그만 출발하지.”
하녀들이 들어와 바닥을 치우는 사이에 그들은 집무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집사의 배웅을 받을 때도, 마차에 올라 저택을 떠나는 순간에도 요한은 계속 그 꽃잎을 떠올렸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찻잔의 파편 사이에 놓여 있던, 리세트가 가장 좋아하는 분홍빛의 꽃잎을.
그저 단순한 사고일 뿐이다. 사고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토록 마음이 쓰이는 건 리세트가 좋아하는 꽃이라 그런 걸까.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 요한은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소란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