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죽음의 그림자
요한은 다시 한번 리세트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떠한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문을 막 열었을 때였다.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댄 작은 여자가 보였다.
어슴푸레한 저녁 하늘빛으로 물든 방 안은 다소 어두웠다. 작은 불빛조차 없는 공간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듯했다.
요한이 지척에 다가갈 때까지도 리세트의 시선은 허공의 한 점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아 뺨을 감싸 쥐자 리세트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
“리세트, 일어나. 바닥이 차.”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인지 리세트는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렸다.
“……요한?”
바스러질 듯이 힘없는 목소리였다. 방 안의 불을 밝혀 주던 요한은 제 품에 안겨 오는 리세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한껏 정성스럽게 빚어 놓은 푸른빛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쌌다.
“무슨 일이야.”
“…….”
“리세트.”
얼굴을 확인하려 조심스럽게 어깨를 밀자 리세트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더 큰 힘을 실어 왔다. 그래 보아야 아주 미약한 힘이지만 요한은 밀어 내지 않았다. 리세트가 너무도 간절하게 매달려 밀어 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줘. 잠깐이면 돼. 안아 줘.”
요한은 떨림이 느껴지는 리세트의 어깨와 등허리를 토닥여 주며 기다렸다.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는지 리세트의 숨결은 조금 거칠었다.
이대로 더 기다려 주고 싶었다.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세트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불안해졌다.
“잠깐 나 좀 봐.”
“…….”
“리세트, 얼굴 보여 줘.”
등을 감싸던 힘이 느슨해진 것을 느낀 요한은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다행히 리세트의 얼굴에서 눈물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낯빛이 창백했다.
그의 마력으로 피워 낸 불빛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얼굴은 죽은 사람의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덜컥 겁이 나 뺨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요한은 무언가를 확인하듯 리세트와 눈을 맞추고 뺨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침대에 올라가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어.”
한참 만에야 리세트의 입술이 열렸다.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려면 잠들면 안 되잖아.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침대에 누우면 잠이 쏟아지니까…….”
처음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말소리는 더듬더듬 이어졌다.
“아, 의자에 앉으면 되겠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찬 곳에 있으면 안 좋은데. 진짜, 바보 같다, 나.”
의식 없이 이어지는 말인 것 같았다. 리세트의 눈동자는 불을 밝히기 전의 방처럼 어두운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감히 너에게 허튼소리를 지껄인 놈이 있을까. 내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너를 괴롭힌 걸까.
리세트가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의 일을 떠올리던 요한은 다시 품속으로 안겨 오는 가녀린 몸을 부둥켜안았다.
“말을 해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리세트가 괴롭힘을 당하고 이처럼 슬퍼할 사람인가.
아니. 절대. 요한은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지.
“나, 변한 거 없어? 조금 이상한 점이라든가.”
“……뭐?”
요한은 불현듯 주치의의 말을 떠올렸다.
임신한 여자의 기분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고 하였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바뀔 수도 있다고. 기뻐하다가도 우울해하고, 우울해하다가도 갑자기 웃음을 짓기도 한다고 했었지.
“없어.”
요한은 새하얗게 질린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네가 이상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래. 없구나.”
입술을 얼마나 짓씹은 것인지 리세트의 입술은 부르트고 찢겨져 있었다. 요한은 붉은 상처를 더듬어 나가듯이 입 맞추었다.
“많이 힘들면 집으로 돌아와. 아카데미는 집에서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어. 정 힘들면 휴학계를 제출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 돼.”
하루에도 족히 수십 번은 망설이던 말을 어렵게 전했다. 거절당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 담담한 말투로 가장 간절히 원했던 걸 내비쳤다. 수락이든 거절이든,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리세트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가 빌려 온 책 읽어 봤어?”
“책은, 갑자기 왜?”
“빌려 왔을 때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읽어 보려고 하니까 안이 전부 새카맣게 변했더라. 누가 일부러 책을 망가트린 것처럼.”
몸의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목소리는 지금도 그대로였다. 울음을 참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온전히 비추는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요한은 고요하게 지켜보았다. 리세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과 떨림을 감추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문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리세트는 책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넌지시 질문을 던지는 것 외에 그를 추궁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서에게는 안 물어봤어?”
“예전에는 잘 보관하고 있었대. 그런데 내가 빌려 가고 갑자기 훼손됐다고 했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담는 입술을 요한은 깊어진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렇게 읽고 싶으면 내가 찾아봐 줄게.”
수행인을 시켜 그 책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이 대륙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이미 확인받은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니 리세트가 손에 넣을 방법 같은 건 없다 보아도 무방했다.
“아니야. 그렇게까지 해서 읽고 싶진 않아.”
리세트는 맞닿아 있는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네가 그런 거구나.
범인의 정체를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홀가분할 줄 알았던 마음은 잘못 엉킨 실타래처럼 더 꼬여 가는 것만 같았다.
리세트는 눈을 꼭 감아 버린 채로 다시 요한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단단한 두 팔이 리세트의 몸을 힘껏 옭아맸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 왔다.
“요한, 만약에, 정말 아주 만약인데. 내가 많이 아프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낫게 할 거야.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건강하게 아이를 낳으면 돼.”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던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듯했지만 리세트는 문득 한기가 밀려드는 듯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불안감과 외로움을 씻겨 내 주었던 그 품이 단단한 쇠창살처럼 느껴졌다.
❖ ❖ ❖
아침 햇살이 비쳐 드는 복도는 한산했다. 연구실을 빠르게 지나쳐 가는 리세트의 머리 위로 포근한 빛이 내리쬐었다.
목적지로 삼은 연구실 문 앞에 선 리세트는 여러 번 심호흡을 한 끝에 문을 두드렸다.
“리세트?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니?”
리세트를 발견한 셀번 밀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읽고 있던 연구 일지를 덮은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몸이 조금 불편한 것 같아 걱정되어서요.”
“불편한 것 같다고? 어서 이리 와 보렴.”
분주하게 움직인 셀번 밀란은 제 옆자리에 의자를 빼 주어 리세트를 앉혔다. 얼굴을 살펴 나가는 시선은 의사 못지않게 진중한 빛을 띠었다. 잠을 통 못 이룬 것인지 눈 밑이 거뭇했고 입술은 찢겨진 채로 핏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잠도 못 자고, 입술은 찢어지고…….
델피니움 공작이 매일같이 아카데미를 드나든다는 소문을 떠올린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요한이 얼마나 리세트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누구보다 곁에서 지켜본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력으로 리세트의 몸을 감싸 본 셀번 밀란은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일한 상처가 있던 입술이 말끔하게 돌아왔을 뿐 마력으로 별다른 이상을 감지해 내지는 못했다.
“마력에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심리적인 아픔인 것 같은데?”
“……선생님, 정말 아무것도 안 느껴지세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의사는 만나 보았니? 이쪽 분야는 나보다는 그쪽이 훨씬 정확할 거야. 아무래도 우리의 마법은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닌 이상 치유할 수는 없으니까.”
“의사는 이미 여러 명 만나 보았어요. 그런데, 다들…… 다 괜찮다고 하니까요.”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보렴.”
셀번 밀란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이는 리세트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다시 천천히 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녀는 좀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리세트의 몸에는 어떠한 이상도 없으니.
“감정 조절이 잘 안 되지? 때때로 너무 불안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갑자기 기뻤다가 미치도록 슬플 때도 있을 거란다. 임신이라는 게 그래. 내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질 않으니 자꾸 어딘가 아픈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렇군요.”
리세트는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잠도 더 많이 자고, 적절하게 움직여 주는 게 좋아. 물론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네.”
“오늘처럼 너무 힘든 날에는 꼭 나를 찾아오고. 알겠지?”
다정한 선생님의 목소리는 의식까지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투명한 창문을 통과한 빛이 시리도록 맑구나. 리세트는 고요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다 연구실을 나섰다.
❖ ❖ ❖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몇 분도 채 안 남은 상황이라 강의실 건물 주변은 한산했다. 떠들썩한 대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리세트의 다급한 발걸음은 강의실로 이어졌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찾아낸, 유일하게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로.
1층, 어린 학부생들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지나 2층으로. 그리고 3층으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리세트의 치맛자락이 두 다리를 살짝 스치기도, 살며시 감싸기도 했다.
강의실의 뒷문이 벌컥 열리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쏠렸다. 이 순간조차도 미동 없이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리세트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로티 선생님이 지정석처럼 남겨 준 리세트의 자리 옆에 그가 앉아 있었다. 리세트는 지체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로슈만 경, 수업 끝나고 저에게 시간 좀 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