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름답고 허무한 꿈
다리를 꼬아 앉은 채로 요한은 조금 뻑뻑한 눈가를 매만지며 창밖을 살폈다. 고요히 흘러가는 풍경은 따분할 정도로 평온했다.
별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번화한 상점가는 사람이 붐비고 길게 늘어선 수목은 푸른 잎사귀로 단장한, 그런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보인다는 정도였다.
초점이 흐렸던 눈동자는 어느새 또렷해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부푼 배를 감싼 여자가 남편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거리를 거니는 모습. 양손으로 부모의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작은 여자아이. 그리고 말썽 부리는 남자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
특별한 점은 전혀 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요한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작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마차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유유히 따라갔지만 요한이 바라보는 풍경은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힘차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그 아이의 부모들. 임신한 여자와 아내의 손을 소중하게 잡고 가는 남자. 어느 거리를 가도 그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잔상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문득 갈증이 나는 것처럼 입 안이 메말랐다.
리세트의 배도 점점 불러 가겠지. 그리고 나는 그 손을 잡고 웃으며 거리를 걷겠지. 둘이 함께, 지금껏 그래 왔듯이 함께.
아이가 태어나 걷고 뛰고 말썽을 부리고 예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겠지. 리세트의 아이니 분명 사랑스러울 터였다.
리세트를 만나 결혼을 하기까지, 요한은 단 한 번도 아이에 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식적으로 피해 온 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저 자연스럽게 의식의 저편에 밀려나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으니까.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예쁘게 커 가는 모습을 요한도 제법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날이 있었다. 리세트가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그 뜻을 전한 그날이었다.
리세트를 닮은 아이를, 자신을 닮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았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아낌없이 애정을 퍼부어도 되는 가족을. 싸우다가도 금세 화해하고, 울다가도 배시시 웃음 짓는 아이들을. 그걸 보며 흐뭇해하는 리세트의 모습을 그리다 피식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의 끝은 공허했다.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헛된 희망이라는 것 또한.
단지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리세트에게 그런 행복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꼭 둘은 낳고 싶어. 만약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둘이라면 덜 외로울 것 같아. 서로 의지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나는 아주 오래오래 살 거야. 요한, 너와 함께. 우리 아이들과.’
원대한 포부라도 되는 듯 리세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뜻을 전해 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아이를 원하지 않고, 줄 수 없다고 말했을 때도 리세트는 다정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아이를 가질 방법은 있다는 거잖아. 우리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야?’
방법은 있다. 다만 그 방법을 리세트에게 사용할 마음이 없을 뿐이었다.
말하지 못하고 되새기는 것조차 싫은 일을 리세트에게만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불공정하고 이기적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요한은 끝내 함구했다.
리세트가 원하는 아이를 다른 사람이 주었다. 자신은 주어서는 안 되는 행복을 리세트에게 준 남자가 있다. 그리고 리세트는 그 행복을 품에 안고 그에게 돌아왔다.
그래. 그거면 되었지.
이만 시선을 돌리려던 요한은 멍하니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아기였다. 새하얀 강보에 싸여 있긴 했지만 요한은 똑똑히 보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들자 병원이 보였다. 병원 앞에서 아기를 안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은 서서히 멀어져 갔지만 요한의 뇌리에서 그 모습은 점차 선명해져만 갔다.
상점가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즈음 요한은 마부 쪽에 난 창을 두드렸다.
“주인님?”
요한은 수행인이 다가오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한낮의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 ❖ ❖
충동적으로 상점의 문을 연 순간 요한은 잠시 숨을 멈춘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손바닥을 다 합친 것보다도 작은 옷들이 보였다. 보송보송한 털을 가진 인형들과 앙증맞은 신발,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용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낯선 세상이었다.
요한은 천천히 그 낯선 세상으로 들어와 물건을 살펴보았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촉박합니다.”
시간을 알리는 수행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금방 출발할 거야.”
요한은 가장 눈에 띄는 노란색 옷을 만져 보았다. 힐긋 그를 살피던 상점의 주인이 화색을 띤 얼굴로 다가왔다.
“예쁘지요?”
예쁜가. 잘 모르겠다. 그저 너무 작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작은가.”
“그래도 손님께서 들고 계신 옷은 조금 자란 아기들이 입는 거랍니다. 막 태어난 아기는 그보다 훨씬 작지요.”
“……이것보다 더?”
지금도 손바닥 위에 펼쳐 놓으면 딱 들어맞는 크기인데 이보다 더 작다니. 요한은 선뜻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는 이런 치수의 옷을 입힌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이 연녹색의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요한이 만지고 있던 노란 옷보다도 더 작아 보였다.
부드러운 옷감을 매만지던 요한은 충동적으로 그것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상점 곳곳을 돌아다녔다. 주인은 큰돈을 쓸 손님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 보이며 그의 눈길이 조금이라도 닿는 물건들을 냉큼 꺼내 보여 주었다.
“손수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빨아 쓰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사내의 행색을 보아하니 그런 것에는 크게 신경을 기울일 것 같지는 않지만 주인은 열과 성을 다해 손수건의 필요성에 관해 설명했다.
“몇 개를 사는 게 좋지?”
“많이 구입하시는 분들은 스무 개씩 고르시기도 하는데, 평균적으로는…….”
“마흔 개.”
슬쩍 개수를 늘렸는데도 사내는 그것의 두 배를 사겠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신이 난 주인은 손수건을 쓸어 담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요한은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차례대로 물건을 골랐다. 느릿했던 손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고른 물건을 또 잡고 있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손가락 두 개를 합쳐도 이것보다는 크겠다 싶은 신발을 네 개나 골랐을 때는 수행인이 다가와 슬쩍 말리기도 했다. 리세트가 좋아할 것 같은 파란색 담요를 끝으로 그만 시선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작은 인형이 보였다. 새하얀 곰 인형과 갈색 곰 인형이 손을 잡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까만 코를 만져 보던 요한은 그 인형도 수행인에게 건넸다. 함께 붙어 있던 인형이니 하나만 데려가는 것보다는 둘 다 데려가고 싶었다.
상점을 나섰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조금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마부는 일정에 더는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힘차게 마차를 몰았다.
요한은 더 이상 바깥 풍경을 살피지 않았다.
텅 비어 있어 다소 쓸쓸해 보이던 마차 안에 이제는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러니 마땅히 충족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요한의 마음속을 가득 메운 건 더 큰 공허함이었다.
❖ ❖ ❖
도서관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리세트는 색이 변한 하늘을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은 석양빛으로 물든 하늘 저편을 배회하다 다시 책으로 향했다. 무어라 쓰여 있는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글자를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 복잡한 머릿속은 어떠한 내용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에 가까워졌다.
노바르 로슈만이 남기고 간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책장을 넘기려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리세트는 눈을 꼭 감은 채 책상에 엎드려 두 귀를 막았다.
‘아픈 곳이 없는 게 확실합니까? 아무래도 의사를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염려스럽다는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너를 위해서라면 제 자식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네 남편이야.’
진지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해 주던 아트반의 말까지 떠올랐다.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손바닥 위에 머무르는 깨끗한 은빛의 마력을 천천히 몸 안으로 흡수해 보아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노바르 로슈만의 말이 틀린 것이겠지. 나는 이렇게나 멀쩡하니까. 의사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는걸.
리세트는 상념을 떨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 버렸다.
이제 다시, 열심히 조사를 해 보아야지.
맨 첫 장으로 넘긴 리세트는 펜을 쥐었다. 빼곡하게 채워진 종이에 중요해 보이는 내용을 따로 옮겨 적고, 전에 조사한 내용과 비교하며 특이점을 찾아내 기입했다.
하지만 집중의 시간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눈으로는 열심히 책을 살피고 있는데 머릿속은 백지장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마력의 이상 징후가 발현한 것 같습니다. 쉽게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에요. 몸이 아픈 거라면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인과 아기 모두가 무사할 수 있어요.’
노바르 로슈만이 또 무어라 했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부인께는 별다른 신뢰를 주지 못할 거라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정말, 이대로 치료 시기를 놓치면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리세트는 다시 한번 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익숙한 감각을 확인받고 이 이상한 말들을 떨쳐 내고 싶었다.
몸으로 서서히 흡수되던 마력이 어느 순간 소용돌이가 이는 것처럼 단숨에 빠져나가 버렸다. 전에 없던 일에 리세트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리세트는 이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노바르 로슈만의 말이 맞았다. 무언가 변했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온몸 가득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손에 힘이 풀려 리세트는 들고 있던 펜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펜은 데구루루 구르다 책상의 다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리세트는 펜을 주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갈색 나무 바닥 위로 뚝뚝, 검은 잉크가 번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