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사랑하는 사람
무거운 한숨 소리가 마차 안의 정적을 한층 깊어지게 했다. 아카데미에서 멀어질수록 리세트의 얼굴은 도리어 선명해지기만 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아트반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실소가 흘렀다.
하여튼 못 말리는 고집불통. 부부는 닮는다더니. 아닌가. 애초에 비슷한 인간들이라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한 건가.
어찌 되었든 부부가 고집 하나는 타고났다. 끔찍할 정도로!
투덜투덜 저 혼자 험담을 늘어놓던 아트반은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으로 목 뒤를 주물렀다. 고개를 젖히자 절로 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냥 확 말해 버릴까.
불쑥 든 충동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사실 오늘만 놓고 따지자면 처음이었지, 요즘은 매일같이 그 생각에 휩싸여 정신을 파는 일이 허다했다. 일에 열중하다가도,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도 그러했다.
말해 버리면? 그다음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리세트의 얼굴이, 그걸 왜 지금까지 숨겼느냐는 요한의 추궁이 차례대로 그를 덮쳐 올 터였다. 그야말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형국이 아닌가. 피할 곳 같은 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치려 해도 살점 하나는 뚝 떼어 주어야 하겠지.
리세트와 쌓아 온 우정. 요한과 쌓아 온 우정. 그 둘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둘 모두가 아트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 깊어졌다. 어느 한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어 주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트반은 그들의 거짓말에 한 발씩 걸치고 있었다.
리세트는 요한이 아이의 아버지를 자신이라 알고 있고, 요한은 아이의 아버지가 저라는 걸 모르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싶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둘 중 누구의 편도 시원스레 들어 주지 못한 그 나름의 타협안이었다. 별 헛짓거리를 다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는 하였지만.
“주인님!”
귀환한 아트반을 맞이한 건 그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 나온 집사였다.
아직 마차에서 채 내리기도 전이지만 아트반은 기민하게 저택의 분위기를 읽어 냈다. 평소에도 그리 조용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시끄럽지도 않았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했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아트반은 사용인들이 숙덕거리는 이름 하나를 듣고야 말았다.
“집사.”
설명을 구하듯 그를 응시하자 침울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 주인님…….”
❖ ❖ ❖
아트반은 머리를 감싸 쥐며 응접실로 향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걸까.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할 리세트의 속을 잔뜩 들쑤시고 온 것 같아서 미안해 죽을 것 같은데, 그 일의 원흉까지 아트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한 시간 전부터 들이닥쳤다고 한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에서, 무려 한 시간 전부터!
“네가 왜 여기 있어?”
응접실로 들어온 아트반은 황당하다는 듯이 침입자를 쳐다보았다.
“늦었네. 리세트에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네가 이 시간에 아카데미까지 갔지?”
아트반은 문 뒤에서 대기 중인 사용인들을 흘깃 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마치 이곳을 제집처럼 사용하고 있는 침입자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해? 델피니움 공, 그렇게 부인을 감시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거야. 불화설보다 위험한 소문이 의처증인 거 몰라서 그래?”
“확인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그런데 마침 너는 자리에 없었고. 그래서 나는 기다리면서 너의 행방을 물었을 뿐이지. 이게 감시로 보여?”
“아아, 그러시구나.”
과연 네가 리세트 주변에 사람을 붙이지 않았을까.
코웃음을 친 아트반은 그쯤에서 물러섰다. 괜한 말을 꺼내 요한의 경계심을 사면 곤란해지는 건 리세트였다. 참자. 참아.
“노바르 로슈만.”
아트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요한은 본론부터 꺼냈다.
“혹시 그놈이야?”
“뭐, 누구? 로슈만?”
갑자기 그 이름은 또 왜 나온단 말인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 보던 아트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저 친구가 미치셨나. 한참 정답에서 벗어난 질문에 아트반은 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도무지 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 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볼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로슈만 백작 가문의 차남이고, 너와 같은 계열의 마력을 지녔지. 네 후배이자 리세트의 동기생이기도 하고.”
요한은 심상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래. 내가 아는 노바르 로슈만을 의심했다는 말이지?”
아트반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놈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세트와 노바르 로슈만을 엮어 보다니.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하고, 설마…….
“혹시 머리 다쳤어? 어디에 세게 부딪치기라도 했나?”
티 테이블을 빙 돌아간 아트반은 요한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요한은 매정하게 그 손을 쳐 냈다.
“열은 없고. 머리가 다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했을까? 설마 기억이 미화됐나? 리세트가 다른 동기생들보다 특히 로슈만을 싫어한 건 너도 잘 알잖아.”
“그건 과거의 일이니까.”
요한은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 반응만으로도 노바르 로슈만에 대한 의심은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배신자.”
“왜.”
멀쩡한 이름을 두고 저런 불결한 단어로 부르는 게 못마땅했지만 아트반은 순순히 대답했다. 틀린 구석을 잡아낼 수 없는 일인지라 저자세로 굽히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있어?”
“…….”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꿈틀거리는 입술부터 가리고 하지 그래?”
하여간 눈치는 빠른 녀석.
속으로 꿍얼거린 아트반은 의자에 털썩 앉아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카데미를 다니긴 했지. 하지만 이미 졸업했고, 매일 아내를 만나러 가지만 어쨌든 아카데미에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지금, 제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리세트는 어째서 그 남자를 떠나 너에게 온 걸까. 심하게 다투기라도 했나.”
요한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트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모양이네.”
“독심술이라도 배웠어?”
요한은 약간의 온기가 남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했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여전했다. 아니, 간절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리세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계속 망설여졌다. 망설이는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리세트가 많이 힘들어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리세트가 그 남자 때문에 울고, 마음 아파하고, 웃음을 잃어 가는 걸 옆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리세트가 그 남자를 많이 사랑했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지만 헛된 기대를 담아 질문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리세트가 그 남자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아트반을 요한은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저 솔직한 반응이 오늘만큼 싫었던 적이 있었나. 그랬던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리세트도, 아트반 크리프도. 오랜 시간을 알아 와 그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친구. 리세트는 유독 그 단어를 좋아했다. 가족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끼고 애정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꺼이 리세트가 바라는 친구 놀이에 동참했고 지금껏 이어 왔다. 햇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왔지. 셋이서. 우리는 늘 함께였지.
그런데 왜. 어째서.
아트반 크리프가 입을 열면 모든 게 원활하게 끝을 맺을 텐데. 억지로라도 실토하게 만들면 더 이상 헛되이 시간을 흘려보내지도 않을 텐데. 그 쉬운 길을 빤히 알면서도 요한은 선뜻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가 거듭되던 고민의 끈을 잘랐다.
“그래도 리세트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아트반은 위로하듯 찻잔을 채워 주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얼마간 가만히 응시하던 요한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알아.”
“재수 없는 놈.”
리세트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요한은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리세트가 잠시 다른 곳에 눈을 돌리더라도 결국은 그에게 돌아올 테니까.
또다시 리세트가 없는 세상에 버려지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홀로 남아 돌아오지 않는 리세트를 무력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면.
그러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 ❖ ❖
연두색 나뭇잎들을 실어 온 바람이 도서관 주변을 맴돌았다. 바람이 멎었을 때 먼 곳을 응시하던 남자의 시선이 리세트에게 옮겨 왔다.
“역시 도서관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노바르 로슈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그의 말이 뒤늦게 떠올라 리세트는 조금 미안해졌다.
“여기서 저를 기다린 걸 보면 정말 급한 일이었나 봐요?”
“공작 부인, 혹시…….”
그가 할 말을 고심하는 듯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고민의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리세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노바르 로슈만은 전혀 엉뚱한 말로 리세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몹쓸 병이라도 앓고 계십니까?”
“……네?”
날카롭게 주변을 울리는 듯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질문을 한 사람도, 질문을 받은 당사자도 심각하게 눈을 찌푸린 채로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달갑지 않은 침묵을 깬 쪽은 리세트였다.
“제가 아픈 거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네.”
요한도 아트반도 아니고, 하다못해 주치의나 의사도 아닌 노바르 로슈만이 갑자기 그런 것을 물어보니 수상했다.
“없어요.”
“확실한 겁니까?”
리세트가 아프다고 단정 짓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이 이렇게 초조하거나 걱정스러워하지 않았다면 리세트는 무시하고 갈 길을 갔을 터였다.
“그런 걸 왜 물어보시는 거지요?”
“부인의 마력이 조금 이상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력의 흐름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요.”
잠시 말을 멈춘 노바르 로슈만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죽음에 가까워진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