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25)화 (25/151)

25화
범인이 너라면

“빨리 피하세요. 그러다 죽어요.”

리세트는 학부생들의 마법진을 단숨에 파훼하며 새 마법진을 끊임없이 그려 냈다.

“이봐요, 하리펜 선배! 아니지, 델피니움 공작 부인! 이제 그만 좀 해요!”

“내 발! 발이 바닥에 빠졌어. 누가 좀 나를 잡아 줘!”

“네가 빼! 너 도와줄 여유 없어!”

비명이 난무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리세트는 아기를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가, 자고 있니? 네가 꼭 잠들어 있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눈을 뜨고 있어도 놀라지는 마. 이 정도 복수는 정당한 거야. 가만히 있으면 무시만 당한단 말이야. 엄마 잘못이 아니야.

“이제 슬슬 끝내세요. 곧 종이 울릴 겁니다.”

노바르 로슈만이 시간을 알려 오자 곳곳에서 안도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다들 수고했어요. 각자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강의실로 복귀하세요.”

리세트가 툭툭 가볍게 손뼉을 치며 실습을 마무리하자 학부생들이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더러워진 몰골들을 쭉 훑어본 리세트는 상쾌한 걸음을 옮겼다.

이만하면 꽤 성공적인 복수인 듯했다. 비록 분이 다 풀린 건 아니었지만.

기회는 많다.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여섯 번의 실습이 더 남았고 보충을 핑계로 얼마든지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 선배 된 사람의 특권으로 말이다. 굳이 저런 애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쏟고 싶지는 않아 그럴 마음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마음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잠깐만요!”

노바르 로슈만이 리세트의 앞을 막아섰다.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습니까?”

“오늘 실습은 끝난 거 아닌가요?”

“실습 말고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럼 여기서 말하세요.”

그와 따로 시간을 내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아 리세트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리세트를 빤히 쳐다보고, 이내 또다시 입술을 벙긋거렸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로슈만 경,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면 나중에 수업 시간에 하세요.”

이만 무시하고 가려던 리세트를 그가 다시 막아섰다.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노바르 로슈만과 중요하게 나눌 얘기가 있을 리 없지 않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떠오르는 주제가 없었다.

기껏해야 수업이나 실습, 혹은…… 그 말도 안 되는 사과이려나.

고민하던 리세트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직 실습장 근처에 서 있는 터라 하나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 가벼운 입들이 무어라 소문을 내는 것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는 편이 이로울 듯했다. 간신히 꺼져 가는 불화설에 불을 지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제안을 승낙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리세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리세트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쟤가 왜…….”

당황스러운 물음은 떠들썩한 웅성거림에 묻혀 버렸다. 바닥에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던 학부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멍한 얼굴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로슈만.”

갑자기 나타난 그는 손까지 흔들며 속삭이듯 인사했다.

“그런데 어떡하지? 리세트는 나와 선약이 있는데.”

얼마간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노바르 로슈만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 ❖ ❖

“안녕, 엄마. 아가도 안녕. 임시 아빠가 왔어요.”

아카데미의 숲길로 접어들자 아트반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말의 내용과는 딴판인 우아한 동작도 뒤따랐다.

리세트는 슬쩍 몸을 돌려 배를 가렸다. 못 말리겠다는 듯 한쪽 눈썹은 살짝 찌푸려진 채였다.

“아직도 임시 아빠 소리를 할 줄은 몰랐네. 이런 걸 보면 너도 참 끈질겨.”

“언젠가 이 수모를 갚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여러 방법을 고민해 봤는데 요한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복수할 방법은 이게 최고인 것 같아.”

양심에 찔리는 게 워낙 많은 터라 리세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트반은 꾹 다문 입술을 보더니 키득거리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 임시 아빠랑 약속하자. 언젠가 너희 아빠 앞에서 꼭! 나에게 먼저 아빠라고 불러 주어야 해. 알겠지?”

대단한 목표라도 되는지 아트반의 얼굴은 퍽 진지해 보였다.

“은근히 계속 얘기하는 걸 보면 진심인가 봐?”

“당연하지. 내가 요즘 그날만 그리며 살아.”

최근 요한에게 상당히 무시를 당하고 있는 터라 아트반의 복수심은 무럭무럭 자라난 상태였다. 요한의 이름을 꺼내 리세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신 아트반은 이 사태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이름 하나를 끌어왔다.

“노바르 로슈만은 언제 친해진 거야?”

주먹다짐까지 하며 지겹도록 싸워 댄 리세트와 노바르 로슈만이 같은 조를 이루었다는 건 참 뜻밖의 일이었다.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들었다면 또 모를까.

“친하다니. 내가 걔랑 왜 친해져?”

“안 친해?”

“당연하지!”

“그럼 같은 조는 어떻게 된 거야? 임의로 정해진 건가?”

“……할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요한이 알면 난리가 나겠는걸. 내심 그것을 바라고 있는 아트반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이해는 된다. 너희랑 같은 조를 하고 싶은 정신 나간 애들이 없기야 하겠지.”

“왜?”

불만스럽다는 듯 구겨지는 눈썹을 본 아트반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공부에 미치신 분들이라 좀 피곤하긴 하지. 리세트 하리펜과 노바르 로슈만. 방어 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독종들의 이름이 아니었나. 심지어 하리펜 양께서는 치유 계열에서도 독종으로 이름을 날리셨고.”

두 사람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트반은 상의를 벗어 잔디가 돋아난 바닥 위에 깔아 주었다.

“자, 앉으시지요.”

나무둥치에 기대앉으며 아트반은 손바닥으로 툭툭 벗어 놓은 상의를 두드렸다. 리세트는 못 이긴 척 풀썩 그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쾌청했다.

“뭔가 알아낸 건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 리세트가 시선을 돌렸다. 아트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리세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설마, 공부하러 아카데미로 가고 싶다는 네 말을 믿을 줄 알았어?”

깔고 앉은 아트반의 옷을 움켜쥔 리세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을 흘깃 살핀 아트반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얼굴, 요한이 보면 바로 눈치챌 것 같아. 일단 표정을 숨기는 연습부터 하자.”

순식간에 가벼워진 분위기가 리세트의 놀란 마음을 달래 주었다. 리세트는 공연히 뺨과 목덜미를 쓸어 보고 매만졌다.

“많이 티나?”

“응. 엄청.”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릴 수도 있었지만 리세트는 굳이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아트반이 오랫동안 기다려 준 뒤에 건넨 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아카데미로 오긴 했는데…….”

리세트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실없는 대답이지만 가장 진실된 답이기도 했다.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조사를 거듭할수록 의문은 늘어났지만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의문은 신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되곤 했으니. 수많은 책과 연구 자료를 살펴보아도 똑같은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져 허탈해지기만 했다.

“네가 알고 싶은 건 뭔데? 그것도 비밀이야?”

“…….”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트반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는 거잖아. 차라리 요한에게 솔직히 얘기하는 건 어때?”

“안 돼.”

다급하게 말하는 리세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걸 보았지만 아트반은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네 몸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난 건 알지? 임신 초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리세트의 몸이 임신 과정을 잘 밟아 가기만 하였더라도 아트반은 끝까지 그녀가 숨기려는 비밀을 지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치의를 찾아가 리세트의 상태를 다시 물을 때마다, 요한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리세트의 얼굴을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자신의 선택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나도 계속 숨길 생각은 없어. 언젠가 말해야지. 당연히 말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떨림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가 아트반의 고민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조금만 더 나를 믿고 기다려 줘.”

“너는…….”

무섭지도 않아?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어 씹는 듯 입 안이 썼다. 입술을 달싹이던 아트반은 끝내 리세트를 설득하지 못했다.

❖ ❖ ❖

도서관 건물에 가까워져 갈수록 리세트의 한숨 소리도 깊어졌다.

아픈 곳은 없다. 아기도 잘 자라고 있다. 이상하다 못해 결코 정상적인 과정은 아니지만 많은 의사들의 소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세트가 걱정되어 수소문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조금만 더 알아보자. 위험한 건 아니잖아.

다시 결심을 굳혔을 때 쏴아아-, 바람이 불어와 여린 잔디를 훑고 지나갔다. 굴러가는 나뭇잎들 사이로 새의 깃털로 추정되는 것이 언뜻 보였다. 새까만 빛깔을 보아하니 아마도 까마귀의 깃털인 듯싶었다.

더 큰바람이 불어와 그 깃털이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순간, 같은 빛깔의 책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

역시 그 책이 수상했다. 까맣게 변해 버려 안의 내용을 전혀 살펴볼 수 없는, 보관 상태도 엉망이고 제일 구석에 박혀 있던 책이.

요한이 아닐 수도 있지.

델피니움 가문 자체를 추종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 중 누군가 그 책에 앙심을 품어 작정하고 훼손했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괜한 의심이라고 해도 이미 한 번 의심이 싹튼 순간 그것을 모른 척 묻어 둘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책을 훼손한 범인이라면…….

요한이 우리 아기를 죽이려는 이유. 그리고 그 책을 리세트 눈에 띄지 않게 없앤 이유. 둘 모두가 가리키는 건 역시 비전 마법이지 않을까. 가능성은 점점 더 그 방향을 향해 커져 갔다.

리세트는 오히려 그가 범인이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세워 둔 여러 가정에 확신을 얻을 수 있으니.

책은 어디서든 다시 찾으면 된다. 찾아내 읽고,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면 요한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리세트가 뛰다시피 건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도서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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