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친구는 다른 곳에서
바로잡을 노력을 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도 리세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아 소용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아요.”
“소문이 아직도 건재한데 이대로 보고 계실 겁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사람들에게는 전부 변명처럼 들릴 테니 굳이 노력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잘못된 소문을 방치하는 건 부인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데요.”
그쪽이 나를 알면 얼마나 잘 안다고?
톡 쏘아붙이려던 리세트는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이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노바르 로슈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제야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을 놓은 리세트가 이만 책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결혼하고 많이 바뀌신 것 같군요. 예전 같았으면 멋지게 소문의 주동자를 찾아 발로 걷어차고 머리채를 휘어잡으셨을 텐데요.”
무어라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리세트는 책장을 넘겼다. 명백한 대화의 단절을 의미하는 행동에 노바르 로슈만은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부인께서 심화 과정을 밟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
“아카데미로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시하자. 그냥 무시하는 거야.
리세트는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책장을 넘겼다.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짜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책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칠 것 같으니 조심해야 했다. 아기에게 엄마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그리 좋지 못할 테니. 게다가 이제는 철없던 어린애가 아니기도 하고.
참아야지. 참고, 참고, 참다 보면 저 녀석도 지쳐서 조용해지겠지.
“저는 교육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거든요. 물론 연구자로서 실적도 내고 싶고요.”
할 말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노바르 로슈만은 이제 제 근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심화 과정에서는 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부인께 반납할 날도 머지않았네요. 저는 부인께서 실력을 썩히실까 염려했는데 참 다행스러운…….”
“로슈만 경.”
리세트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냈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혹시 이번 학기에는 저를 괴롭히는 방식을 바꿀 생각이신가요?”
“부인, 저는…….”
“그게 목적이라면 저한테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경께서 주신 상처는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나거든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리세트는 보란 듯이 책장을 넘기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사실 그가 준 상처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결혼을, 결혼 후에는 달콤하고 뜨거운 시간을, 그리고 임신을 해 도망 다니고 잡히고 싸우고. 아주 바쁜 시간이었다. 당연히 그 시간 속에 노바르 로슈만 같은 과거의 상처가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받은 상처 따위, 더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과가 들려온 순간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칫했다. 리세트는 태연한 얼굴로 책장을 덮은 뒤 다른 책을 꺼내려 가방 속을 뒤적였다.
“제가 어린 날 부인께 저지른 모든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싶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정식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어린 날 저지른 실수. 속죄. 잘못. 겨우 그런 말로, 이렇게 쉽게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부인께서만 괜찮다고 해 주신다면 이제부터는 좋은 동료로서 함께 학기를 보내고 싶습니다. 수업도 같이 듣고, 과제도 같이 하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도 하고요.”
만약 이 말을 조금만 일찍 해 주었더라면, 어쩌면 노바르 로슈만과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엮일 수 있었을 거다. 아트반처럼 서로 장난도 치고 속 깊은 대화도 나누며, 그런 친구로서.
하지만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내가 괜찮다고 하면, 다 없던 일이 되나?
‘고아, 내 자리를 빼앗았다고 우쭐하지 마. 내가 금방 다시 가져올 테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네가 델피니움 공작과 친하다는 게 말이 돼? 그 선배는 우리 같은 귀족들도 함부로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겨우, 어떻게 너 같은…….’
‘저런 애 괴롭혀서 이득 보는 것도 없잖아. 너희도 그냥 무시해. 저 애랑 놀아 줄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어때?’
네가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이제 와 우리가 친구처럼 지내자고?
머릿속에서 위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평온하던 숲속을 뒤흔드는 세찬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리세트는 기꺼이 그 바람을 따르기로 했다.
“로슈만 경.”
온화하게 미소 짓는 리세트를 따라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쉽네요. 저는 경께 좋은 동료가 되어 드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 전혀 괜찮지가 않아서요.”
탁-!
리세트는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가방을 내려놓았다.
“친구는 다른 곳에서 구하세요.”
❖ ❖ ❖
이걸 그대로 보고해도 되려나. 조금이라도 덜어 내는 게 낫지 않을까.
리세트의 감시를 명받은 요한의 보좌관은 보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마음속으로는 조금만 보고서를 손보자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의 손은 어떠한 미동조차 없었다.
결국 고쳐지지 않은 날것의 보고서는 그대로 공작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해?”
아니나 다를까. 공작의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마님과 로슈만 경이 같은 조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계속 붙어 있는 것은 아니고 가끔, 아주 가끔 실습 때만 활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은 요한은 손짓으로 보좌관을 물렸다. 처참하게 구겨진 보고서가 바닥을 굴렀다.
노바르 로슈만.
그 이름을 리세트의 이름 옆에 붙여 보던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노바르 로슈만이 아이의 아버지일 리 없지. 리세트가 그놈을 얼마나 싫어했는데. 하지만 과거에 끔찍이 싫어했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보장이 있나. 오히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열렬한 사이가 될 수도 있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아니. 다른 놈은 몰라도 노바르 로슈만은 아니겠지. 그놈 혼자 미쳐서 리세트에게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다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일이었다.
머리로도 잘 아는 사실이고 이성적인 판단력도 건재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노바르 로슈만이라면 리세트나 아트반 크리프의 도움 없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있지 않은가. 어째서 아이의 아버지가 귀족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감히 그를, 델피니움을 적으로 돌릴 대범한 귀족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가문을 이어받지 않을 노바르 로슈만이라면 더욱 거리낄 게 없을 수도. 요한은 곧바로 호출종을 울렸다.
“찾으셨습니까, 주인님.”
신경질적인 종소리에 놀란 로드니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노바르 로슈만.”
“……로슈만 백작 가문의 차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놈의 행적을 샅샅이 살펴봐.”
불친절한 명령에 당혹스러웠던 것도 잠시. 삽시간에 새파래진 안색으로 로드니는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 ❖ ❖
강의실에 모인 방어 계열의 학부생들은 잔뜩 날이 선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 갔다.
“이번에 실습조 선배로 누가 오는지 들었어?”
“아, 로슈만 선배님이 오신다고 하셨지. 그리고…… 리세트 하리펜? 그 여자도 온다고 하지 않았나.”
리세트 하리펜의 이름이 거론되자 분위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여자한테 선배님 소리나 하면서 수업을 들어야 해? 델피니움 공작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그 여자 하나 때문에 전쟁의 승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고.”
“실력도 형편없는 사람을 겨우 나이 하나로 선배라고 불러야 한다니.”
“명성에 있어서는 선배님이긴 하시지. 만들어진 영웅이지만 어쨌든 전쟁 영웅 중 한 분이시잖아?”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 중 그들이 인정하는 건 오직 단 둘뿐이었다. 요한 델피니움 공작과 아트반 크리프 후작. 공격의 선봉장과 후방의 방어 지지선을 지킨 그 둘 외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른 귀족도 아니고 고작 평민 여자가 그들 옆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런 사람이 선배라고 유세를 부릴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
“델피니움 공작께 버림받아서 아카데미로 도망친 거 아니야? 듣자 하니 유산을 했다던데. 손이 귀한 가문이니 그런 하자 있는 여자를 계속 옆에 두진 않을…….”
남학생의 말을 가로막은 건 거칠게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여자였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해졌다. 언뜻 삭막한 정적마저 감돌 정도로.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리세트 하리펜. 방금까지 그들의 대화 주제를 맡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 ❖ ❖
노바르는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물론 애도의 대상은 곧 처참하게 깨질 학부생들이었다.
강의실로 오면서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리세트 델피니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야외에 마련된 실습장은 비명과 고성이 난무했다.
“이거, 당장 풀어 주세요. 어서요!”
“빨리 풀어 달라고요!”
노바르의 애도는 곧 현실이 되었다. 리세트는 이리저리 방어벽을 쌓아 학생들을 가두고, 밀치고, 때렸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고 경쾌하게, 수업이라는 명목을 빌려 합법적으로.
“너무 평화롭게 살아서 그런가? 긴장감이 없네. 방금 그 방어벽 내가 일부러 늦게 무너트린 거거든. 실전에서 못 피했으면 즉사였지. 안 그래요, 로슈만 경?”
“어…… 네!”
노바르는 서늘한 기운이 올라온 팔을 문지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감상하는 마음으로 실습을 지켜보던 노바르의 두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은 마법진이 그려지는 리세트의 손바닥을 세밀하게 살폈다.
“이상하네. 왜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