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첫사랑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두 가지 마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니. 심지어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니!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든 두 번째 입학이었다.
노바르는 문제의 입학생을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채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이미 일찍부터 자리 잡은 동기생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평민과 함께 수업을 들어?’
‘하필 같은 계열일 건 또 뭐야? 치유 계열 애들도 수업 듣기 싫다고 난리던데.’
‘타 계열이 문제야? 지금 제일 큰 문제는, 그 평민 고아의 입학식을 우리 계열에서 한다는 거잖아! 이건 우리에 대한 도전이고, 모욕이라고!’
요한 델피니움의 입학 때보다도 훨씬 열띤 반응이었다. 물론 그 반응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지만.
그가 오도카니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젓는 사이 앞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의 케서린 로티가 앞서 들어왔고, 그녀의 뒤로 조그만 여자애가 종종거리며 걸어왔다.
로티 선생님만 바라보던 여자애가 몸을 돌려 세웠다. 그 애의 얼굴을 제대로 본 첫 순간이었다.
‘내 이름은 리세트 하리펜이야. 모르는 게 많지만 열심히 따라가도록 노력할게. 우리 친하게 지내자!’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 애의 얼굴 위로 웃음이 가득 번졌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끝났고, 하루가 지났다.
리세트 하리펜. 리세트 하리펜. 리세트 하리펜.
노바르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했다.
내일은 꼭 불러 봐야지. 인사해야지. 친하게 지내자고 해야지.
하지만 이름을 부를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 애는 싸우느라 바빴고, 공부하느라 바빴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어딘가로 달려가느라 바빴다.
리세트 하리펜의 모습은 둘 중 하나였다. 책을 찢을 것처럼 열심히 읽거나,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거나. 어디서도 그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 애가 먼저 노바르에게 다가왔다.
‘안녕. 나는 리세프 하리펜이라고 해.’
저 애가 내민 손을 잡아야지. 그리고 악수를 하고, 나도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지.
천천히 손을 가져가던 노바르는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을 매정하게 쳐 냈다.
‘아……. 미안해.’
늦은 사과였다. 리세트 하리펜은 그를 남겨 두고 제자리로 가 버린 후였다.
다시 사과를 해야겠다.
기회를 엿보던 노바르는 강의실 건물로 들어가는 리세트 하리펜을 우연히 목격했다. 아마도 그 애는 야외 수업이 진행된다는 얘기를 전해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야, 고아. 오늘은 야외 수업이야.’
머릿속으로는 리세트 하리펜의 이름을 불렀는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고아, 그 애에게 상처가 될 것이 자명한 단어였다.
동기생들이 리세트 하리펜의 과제물을 빼앗아 이리저리 던지고 노는 것을 지켜보던 순간에도 부르고 싶은 그 이름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너희는 저런 애 괴롭히고 노는 게 재미있어? 자습도 포기하고 하는 짓이 겨우 괴롭힘이라니. 한심하네.’
도와주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또다시 이따위였다.
‘평민 주제에 제법이네.’
학년별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리세트 하리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고작 이름이 무어라고 이렇게 쩔쩔매는 거냐고!
노바르가 고민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문제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리세트 하리펜과 요한 델피니움이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들려온 날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부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한 델피니움이라니. 그 선배가 누구와 친하게 지낼 사람인가? 선후배는 물론이고 동기생들과도 친분을 쌓지 않는 거로 유명한데, 그런 사람이 리세트 하리펜과 친할 리 없지. 마력을 두 가지나 지녔다고 해서 관심을 보일 사람도 아니고, 두 살이나 어린 애를 놀아 줄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친할 리 없지.
머리는 이성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복잡했다.
‘이봐, 평민. 너 델피니움 공작과 친하다며? 아니지? 공작이 너 같은 애랑 어울려 줄 리가…….’
리세트 하리펜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노바르는 곧장 그 애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요한 델피니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 리세트 하리펜을.
그 싸움 후로는 내내 서먹하게 지냈다.
잘 생각해 보면 노바르 혼자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애초에 리세트 하리펜의 눈길은 언제나 그를 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고, 학년이 바뀌었고, 환경이 바뀌었다.
더 이상 아카데미의 보호를 받는 학생이 아닌 마법사로서 전쟁을 준비했다. 급변하는 제국의 정세를 따라 열아홉 살의 떠들썩한 성인식 후 곧바로 출병했다. 1년여간의 전쟁이 막을 내려갈 즈음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리세트 하리펜과 요한 델피니움의 결혼 소식이었다.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리세트 하리펜을 만났다. 요한 델피니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리세트 하리펜. 결혼, 축하해.’
이제 다시는 부르지 못할 그 이름을 불러 본 순간 우습게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있을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를, 리세트 하리펜을 좋아했구나.
노바르의 첫사랑은 그렇게 허무한 끝을 맺었다.
“뭐, 자리도 많은데 굳이 제 옆에 앉고 싶으시다면 앉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앉겠습니다.”
마지못해 허락하는 듯했지만 노바르는 꿋꿋하게 리세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쉬운 걸 그때는 왜 하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를 감추듯 노바르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 ❖ ❖
미친 건가? 혹시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나?
리세트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옆자리를 힐긋거렸다. 책을 꺼내 드는 남자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가 주었던 모욕적인 과거는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쁜 놈.
옆자리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저건 사람이 아니야. 말하는 돌멩이야. 어쨌든 무생물, 뭐 그런 거.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 리세트에게 또 다른 난관이 찾아왔다. 말하는 돌멩이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후에 후배들과 실습한다는 얘기는 들으셨겠지요?”
“네.”
“조는 짜셨습니까?”
짰을 리 없잖아.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사람이 물어보자 자연스레 의문이 생겼다.
또 고아라든가 평민이라든가, 그런 말로 나를 짓밟겠지. 그렇게 쉽게 입에 담고 즐기겠지. 아주 어렸을 때면 주먹으로 갚아 주었을 것이고, 아기가 생기기 전이라면 되받아치며 말싸움이라도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아기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열심히 사람들을 피해 왔는데, 겨우 저런 놈에게 수모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세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저와 같은 조를 하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방해될 만큼 형편없는 실력은 아니니 부인께 폐를 끼칠 일은 없을 텐데요.”
폐는 이미 끼치고 있어!
소리치고 싶었던 리세트는 간신히 참아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그 얼굴이 다 그 얼굴들이었다. 그녀를 무시하고 조롱하던,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고 즐기던 사람들. 아무도 리세트와 조를 이루어 주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도 쟤들이랑 똑같은 사람이잖아.
“절대로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부인께 해가 될 일도 하지 않을 거고요.”
“그 말, 꼭 지키셔야 할 거예요.”
별다른 선택권이 없던 리세트는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 결심을 내리기까지, 그리고 막상 그 말을 뱉어 내는 이 순간조차도 영 거북스럽기만 했다.
“당연하지요. 아직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무릎이 아프고, 머리카락이 죄다 뽑히는 듯한 느낌이 나는걸요.”
“아아, 네에.”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쉰 리세트는 조별 명단에 제 이름을 먼저 적었다. 그리고 아직 공란인 부분을, 조원 이름이 들어갈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흘끔 옆으로 옮겼다.
“아직도 제가 조원인 게 탐탁지 않으신 건가요?”
“이름을 말씀해 주셔야 적을 것 아니에요.”
“……제 이름이요?”
남자는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노바르 로슈만. 제 이름은 노바르 로슈만입니다.”
리세트가 그 이름을 받아 적자 노바르 로슈만은 영혼이 달아난 듯한 얼굴로 명단을 제출했다.
이제 볼일은 얼추 다 끝난 것 같으니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조용하겠지. 하지만 리세트의 예상을 비웃듯 그의 입술은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리세트가 아카데미로 오기 전, 봄의 학기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선생님들과 실습을 나가 후배들에게 도움을 준 일, 축제 때 일어난 자잘한 사건 사고들. 마치 친한 친구와 나눌 법한 가벼운 대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리세트는 듣기만 했고, 노바르 로슈만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부인께서 월등한 실력자라는 건 이미 눈으로 수없이 보아 알고 있었지만, 전쟁 때 활약은 정말이지 감탄을 부르는 솜씨였습니다.”
불편하지 않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제논의 백성들에게 리세트 하리펜은 전쟁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귀족들에게는 남편의 이름 뒤에 숨은 형편없는 마법사일 뿐이다. 억울한 일을 또다시 떠올리게 되자 리세트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날이 섰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소문을 못 들으셨나 보지요? 제가 맡은 구역의 방어선은 처참하게 무너졌거든요.”
“하지만 그건 부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순간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지 못한 건 지지선 밑을 지원하던 부대였어요. 부인의 구역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다른 누구도 아닌 노바르 로슈만이 알아준다는 게 싫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요한과 아트반은 당연하다는 듯 리세트의 말을 믿어 주었다. 하지만 리세트는 마냥 그들의 믿음을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요한, 너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아트반, 내가 너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때도 너희는 나를 믿어 주었을까.
“계속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지 않으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