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선배님
리세트는 바쁘게 움직였다.
아직 심화 과정의 수업이 시작되려면 한참은 먼 시간이라 교정에는 일반 과정을 밟는 학생들뿐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들 틈으로 리세트는 유유히 지나쳐 갔다.
어깨에 멘 가방 안에 담긴 책과 펜이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갔다.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리세트의 발걸음 소리도 만만치 않게 컸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알아보아야 할 일이 있다.
리세트는 굳은 표정으로 가방끈을 꼭 움켜쥐며 길모퉁이를 돌았다. 도서관 건물이 있는 길목으로 접어들었을 무렵에 누군가 리세트를 불러 세웠다.
“리세트,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공부를 하려고?”
셀번 밀란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부드럽게 휘며 미소 지었다. 그녀를 알아본 다른 학생들이 리세트 주위에 몰려왔다. 언제나 한적했던 이른 아침의 도서관은 금세 떠들썩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밀란 선생님! 저 숙제 다 했어요.”
“저도요!”
“제가 오늘 제일 일찍 일어나서 1등으로 기숙사에서 나왔어요.”
“아니에요. 제가 제일 일찍 나왔어요!”
올망졸망한 눈망울들이 칭찬을 바라는 듯 반짝거렸다. 그 기대에 부응해 셀번 밀란은 경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 예뻐라. 이렇게 열심히 수업에 임하다니. 다 큰 선배들보다 우리 아가들이 훨씬 낫네.”
아가 소리를 듣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들은 뺨까지 붉혀 가며 까르르 소리 내 웃었다. 교정은 어느덧 웃음소리로 맑게 피어났다. 이 아이들이 부디 선배들처럼 괴상망측하게 자라나지 않기를 바라며 셀번 밀란은 선배가 된 자의 좋은 본보기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네? 저요?”
급작스럽게 지목당한 리세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자연히 어린 학생들의 고개가 옆에 선 선배를 향해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한 자의 눈빛과 그저 흥미롭기만 해 입에서 와아아-, 소리가 나오는 자들의 눈빛이 황금빛의 햇살 아래에서 마주쳤다.
그들 모두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셀번 밀란은 밝게 웃어 보였다.
“너희가 학년이 올라가도, 더 나아가 심화 과정까지 밟게 된다면 꼭 저 선배님을 본받도록 해야 한다. 조금 컸다고 수업을 몰래 빠지거나 아프다고 의무실로 도망가고, 과제를 깜빡하고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는 어른으로 자라면 안 돼.”
“네! 선생님!”
우렁찬 외침에 감격스럽다는 듯 셀번 밀란은 손뼉을 쳐 주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특별히 칭찬한 선배에게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며 강의실을 향해 떠나갔다.
“어…… 안녕! 잘 가, 얘들아.”
리세트는 쭈뼛거리며 움츠러들던 손을 활짝 펼쳐 인사에 화답했다. 처음에는 분명 한 손으로 시작한 인사였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을 따라 두 손을 써 열심히 손뼉도 부딪쳐 주고 있었다.
셀번 밀란은 흐뭇하게 제자들을 구경했다.
붉은색, 녹색의 리본들 사이에 홀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물빛의 리본이 리세트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멀리서 보면 꽤나 진풍경일 테지.
적어도 자신들보다 두 뼘은 더 큰 선배를 둘러싸고 인사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돌려주는 참된 모범생 선배.
여러모로 아카데미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한 장면인 건 분명했다. 명확하게 나누어진 계급이 존재하고, 그중에서도 자신들의 가문과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과만 친하게 지내는 이곳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보다는 그저 새로운 사람이 좋을 나이라 그런 건가.
문득 든 생각은 곧 떠들썩한 발걸음 소리 때문에 지워졌다.
거리낌 없이 인사를 잘 받아 주는 선배가 신기한지 아이들은 저 멀리 갔다가도 걸음을 돌려 다시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흐뭇하고 귀여운 광경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녕. 조심히 가, 얘들아.”
“선배님도 안녕히 가세요.”
“그래. 어서 가야지. 이러다 늦겠다.”
“네, 선배님!”
한참을 이어지던 리세트와 어린 학생들의 인사를 끝낸 건 경쾌하게 울려 퍼진 종소리였다. 1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그 소리에 그제야 아이들은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식사 전이면 같이 먹으러 갈까?”
조금 지쳐 보이는 제자의 어깨를 토닥이듯 감싼 그녀가 제안했다. 리세트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녀는 손을 잡아채며 꼭 붙들었다.
“식사를 해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쫄쫄 굶은 상태로 공부라니. 머리를 너무 혹사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게다가 넌 홑몸도 아니잖니.”
셀번 밀란은 자신의 연구실로 리세트를 이끌었다.
리세트는 멀어지는 도서관을 흘깃 살피다 제 손을 잡아 준 따듯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인지하지 못했던 배고픔이 갑자기 밀려왔다. 꼬르륵, 그 민망한 소리를 들었는지 선생님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것 봐. 이래서 사람은 든든히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한다니까.”
이제 완전히 도서관에 미련을 버린 리세트는 순순히 선생님을 따라갔다.
❖ ❖ ❖
“그럼 우리는 오후에 보자.”
다정한 인사를 전한 셀번 밀란은 수업을 위해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무언가 깜빡했다는 듯 휙 몸을 트는 바람에 함께 일어서던 리세트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내 정신 좀 봐.”
리세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러 기어이 다시 앉힌 셀번 밀란은 눈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꿀에 절인 사과가 듬뿍 든 따듯한 차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너는 꼭 저걸 다 마시고 나오렴. 뜨거우니 호호 불어서, 천천히. 무슨 소리인지 똑똑한 리세트는 잘 알지?”
요즘 심화 과정을 제외하면 어린 학생들의 수업과 연구에만 매진하는 탓에 그녀의 어조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 특유의 다정함이 물씬 배어났다.
“하지만…….”
“주인 없는 연구실, 뭐 그런 얘기를 하려고 했지?”
정곡을 찔린 리세트의 손이 움찔거리자 그녀는 크게 웃어 버렸다.
“주인이 허락했으니 상관없지. 천천히 차도 마시고 푹 쉬었다 강의실로 가. 정 공부가 하고 싶다면 도서관이 아니라 여기서 하다 가도 좋고.”
연구실에 홀로 남겨진 리세트는 호호 입김을 불어 차를 식혔다. 사과 향기가 풍겨 오는 차는 너무 뜨거워 한참을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식사를 끝내고 차까지 한 잔 마신 뒤였다. 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니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밀란 선생님이 리세트의 찻잔을 가득 채워 주어 벌어진 일이었다.
찻잔에서 묻어나는 온기와 달콤하고 상큼한 차향이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리세트는 착실하게 찻잔을 다 비우고 자그마한 편지도 남겼다. 차가 너무 맛있었다고, 다음에는 맛있는 쿠키를 사 와 대접하고 싶다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배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따듯하고 든든하게 채워진 듯했다.
연구실을 나선 리세트는 본래 목적지로 삼았던 도서관으로 지체 없이 향했다. 일을 보고 있는 사서를 곧장 찾아가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오늘 리세트의 오전을 전부 빼앗아 버린 문제의 그 책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책을 건네받은 사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책의 내용은 하나도 알아볼 수 없게 검게 덧칠해진 상태였다.
“어떤 몹쓸 학생이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오래전에 훼손된 책인 것 같네요.”
“그랬다면 그 당시에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반납한 책들 한 번씩 다 살펴보시잖아요.”
“가끔 일이 많을 때면 설렁설렁 확인하는 경우도 있어서요.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리세트의 침묵을 질책으로 받아들인 그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워낙 오래전에 나온 책이니 관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요. 꼭 읽고 싶은 책이었나 봐요?”
책의 제목을 확인한 그가 흘끔 리세트를 살폈다.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요한의 이름을 문득 떠올린 리세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책도 없잖아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아, 그러셨구나.”
리세트는 어딘가 아쉬움이 가득 느껴지는 눈길을 뒤로한 채 도서관을 벗어났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유독 따가워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 ❖ ❖
우연일까. 하지만 우연치고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강의실로 들어온 리세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 내며 앞자리로 가 앉았다.
‘꼭 불장난이라도 한 것 같네요.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귀중한 책에 이런 짓을 했는지!’
사서가 말한 그 정신 나간 녀석이 요한 델피니움, 자신의 남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오늘은 그녀를 베개처럼 끌어안고 잠이 든 요한을 떼어 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눈이 너무 일찍 떠진 탓에 여유를 부려도 되는 시간이었지만 괜히 바쁜 척 침대를 벗어났다. 혹시나 요한이 깨어나 어제 본 책에 대해서 다시 물을까 봐서.
남편의 가문을 몰래 조사하다 걸려 괜히 양심이 콕콕 쑤셨다. 부당한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마른침까지 삼켜 낼 지경이었다.
분주하게 준비하던 리세트는 문득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딱히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 순간에는 그저 느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책들. 그중 가장 위에 놓인 그 책이 왜 유독 눈에 띄었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책장을 펼친 리세트를 기다리는 건 온통 새카만 종이뿐이었다. 헛것을 본 건가 싶어 책장을 빠르게 넘겨 보았지만 리세트가 보는 색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어 제목만 보고 골라 온 자신을 탓해 본들 상황이 변하지는 않았다. 내용을 살펴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범인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저 남자. 네가 이런 게 아닐까.
이불에 반쯤 가려진 벗은 등 뒤를 쏘아보던 리세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범인을 잡을 방법이 없진 않았다. 사서에게 확인해 보면 되겠지. 결국 모두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지만.
요한. 아무리 봐도 네가 한 짓 같아.
괜한 의심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도무지 이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을 대담하게 벌인 사람이니 쉽게 수긍하지도 않을 터였다.
잘못된 의심일지, 아니면 합리적인 의심일지 가늠해 보던 리세트는 누군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제가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절대로 다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그 남자였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