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21)화 (21/151)

21화
헝클어진 리본

시작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책을 안고 있던 리세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바닥을 딛고 선 다리에도 무의식적인 힘이 실렸다.

살며시 뺨을 감싸 쥔 손의 온기. 부드럽게 밀려오는 숨결과 입술 위에서 부서지는 옅은 한숨. 버거운 힘을 이기지 못해 자꾸만 밀려나는 고개를 받쳐 주는 커다란 손. 조금의 틈도 없이 맞닿은 단단한 몸. 익숙한 모든 것들이 이 순간만큼은 어색했다.

요한과 이런 친밀한 행위를 나누어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어색한 만큼이나 좋았다.

요한을 떠나온 여섯 달, 그리고 다시 만나 다툼으로 흘려보낸 한 달에 가까운 시간. 그 오랜 공백을 채우고, 안 좋은 기억은 전부 지우려는 것처럼 요한은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신중했으며, 또한 집요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마음속에서 불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예전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을 말하던 그때로 돌아가자던 요한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요한, 너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깊어지는 고민과 죄책감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렸다. 그 감정의 크기가 자라난 만큼 리세트의 망설임도 커졌다. 그런 기색을 읽어 낸 것인지 요한의 입맞춤은 더욱 느리고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겁먹은 작은 짐승을 달래듯 요한은 잔 떨림이 묻어나는 곳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거친 호흡과 뜨거운 숨결이 빚어낸 열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요한, 잠깐만…….”

리세트가 숨 쉬는 게 버거워 고개를 돌릴 때면 요한은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뺨과 코끝에, 눈시울을 지나 다시 입술로. 달래는 듯이, 그렇게 천천히. 한순간도 멀어지지 않았다.

“잠깐, 조금만, 떨어져…….”

“부족해.”

평행을 맞추던 시선이 어긋났다.

창틀에서 내려온 요한은 뒤로 물러서던 리세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달빛 아래에서 하나가 된 그림자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살짝 밀려났다가 다시 끌려오는 작은 그림자가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묻혔다.

길게 이어지던 입맞춤의 끝을 알린 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책들이 만들어 낸 소음이었다.

책을 놓친 것도 눈치채지 못한 리세트는 요한의 품에 갇힌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요한은 가늘게 떨리는 등줄기를 쓰다듬어 주며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저 애는 천사가 아닐까.

아카데미에서 다시 리세트를 만났을 때 진지하게 고민했던 물음이 이 순간에도 되살아났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느다란 은발은 여름의 햇살을 듬뿍 받아 정말 천사의 날개처럼 보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고정해 놓은 끈을 풀자 은빛의 물결이 흘러내렸다. 요한은 달빛을 머금은 듯한 머리카락을 쥐고 자잘하게 입 맞추었다. 고귀한 존재를 숭배하고 예를 갖추듯이, 한껏 정성스럽게.

가쁘던 호흡이 차츰 진정되어 가자 리세트가 몸을 뒤척였다.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답답해. 숨 좀 제대로 쉬고 싶어.”

“숨, 지금도 쉴 수 있잖아.”

“지금은 불편해!”

마지못해 요한이 팔에서 힘을 풀자 리세트는 금세 달아나 버렸다.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난 채로 리세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빤히 쳐다보면서, 이럴 때만 꼭 피하지.

“왜? 얼굴이 또 빨개졌어?”

“……그건 아니고. 조금 뜨거운 것 같아서.”

“빨개졌겠네.”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문 고집스러운 얼굴로 리세트는 제 뺨을 지그시 눌렀다. 열감을 식히려는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숨을 길게 내뱉기도 했다.

요한은 느긋하게 창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그의 숨결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세트의 노력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는지 뺨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귓바퀴와 눈시울도 같은 빛깔이었다. 단정하게 목에 묶여 있던 리본의 매듭은 헝클어져 있었고 머리는 부스스했다.

“망가졌어.”

“응?”

“리본.”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던 리세트의 손이 엉망이 되어 버린 리본을 풀었다. 이리저리 구겨진 것은 리본뿐만이 아닌데도 리세트는 다른 곳은 살피지 못하고 애꿎은 리본의 주름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구김이 진 치맛자락과 살짝 부푼 입술을 훑은 요한의 눈길은 새하얀 목으로 향했다. 리본이 사라진 자리는 허전해 보였다.

“리세트.”

리본을 묶어 가던 손이 멈칫거렸다. 요한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리세트에게 다가갔다.

“이제 잘 거잖아.”

“그런데, 왜?”

요한은 평온이 깃든 얼굴로 리세트의 눈가를 문질렀다. 예민하게 날을 세우듯 치켜 올라간 눈매조차 사랑스러웠다.

“굳이 리본을 다시 해야 하나 싶어서.”

리세트의 손이 리본을 움켜쥐기 전에 빼앗아 든 요한은 살랑살랑 가벼운 움직임으로 리본을 흔들었다. 애써 펴 놓은 걸 다시 구겨 버리면 리세트의 시선은 또 리본으로 향할 테니까.

“씻고 자야 하잖아.”

맑은 색감을 가진 물빛의 리본은 마치 리세트의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웠다.

“씻으려면 옷을 벗어야 하고, 리본도 풀어야 하고.”

요한은 곱게 접은 리본을 리세트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씻으러 가자.”

“너랑, 같이?”

당황한 듯 반문하는 말이 상당히 의외라 요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눈동자에 미묘한 장난기가 번진 순간 리세트는 황급히 그에게서 달아났다.

“실수야. 실수였어. 말이 잘못 나왔어.”

“아아, 그래?”

“당연하잖아! 여긴 기숙사라고! 나 먼저 씻을 거야!”

뒷걸음질 쳐 도망가던 리세트의 발길에 무언가 걸렸다. 넘어질 듯 휘청거린 리세트의 허리를 붙잡아 준 요한은 상체를 숙여 책을 주워 들었다. 전부 임신에 관련된 책이었다.

하나씩 제목을 살피던 그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처음 임신을 확인받은 리세트가 열심히 사 모으던 책들의 제목과는 사뭇 달랐다. 아기의 건강 상태가 나쁘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나 읽어 볼 법한 것들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런 책들뿐이었다.

그가 주운 책을 황급히 뺏어 든 리세트는 품에 감추듯이 그것을 팔로 감싸 안았다.

“이런 책 수십 권을 읽는 것보다 의사를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네가 모르지 않을 텐데.”

“혹시 모르잖아. 미리 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앞에서 리세트는 태연해지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거짓말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한결 담담해진 눈빛과 어조로 리세트는 가볍게 얘기할 수 있었다.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의사를 바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잖아. 그럴 때를 대비하는 거야.”

“너한테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테지만,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읽어.”

가볍게 턱 끝을 까딱인 요한은 하나 남은 책을 주우려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임신에 관련된 책이 아니었다. 익숙하고도 저주스러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영광에 가려진 델피니움의 탐욕>

낡고 오래된, 제대로 관리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책을 쥔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제 눈에 비치는 게 현실인지 얼마간은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놀리듯 책의 제목은 더욱 선명하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리세트가 왜, 이런 책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누가 너한테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 ❖ ❖

조심스럽게 상체를 세운 요한은 깊은 잠에 빠져든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얘기는 좋은 것밖에 없잖아. 그런데 이런 제목의 책도 있는 게 신기해서, 궁금해서 빌려 온 거야.’

임신과 관련된 책을 언급할 때도, 델피니움에 관한 책을 말할 때도 리세트는 당황한 기색 없이 편안해 보였다. 한순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이 일정하게 흘러나왔다. 미리 준비해 놓은 말을 읊는 것처럼 너무도 부자연스럽게.

이런 일일수록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끝에 말을 하던 아내를 기억하는 만큼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리세트, 너는 알까. 너의 숨결 하나조차 신경 쓰는 나에게, 너의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는지. 불안해 보였는지. 위태로워 보였는지.

굳게 다물린 요한의 입술 끝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꿈에도 모르니 잘도 그런 거짓말을 했겠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임신에 관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유산을 겪었으니 불안하겠지.

그렇게 불안하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어렵게 참아 냈다. 분명 싸우게 될 테고, 어렵게 풀어 놓은 분위기를 또다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평화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 마음은 너무나 견고했다.

하지만 델피니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얘기가 달라진다.

리세트의 말대로 그 이름을 나쁘게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학자들은 신비로운 힘, 혹은 기적이라 부르며 칭송하곤 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펼쳐 든 책장 위로 달빛에 희석된 파란 불빛이 스며들었다. 낡은 종이 위를 어른거리던 불빛은 요동치듯 흔들렸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고 반드시 밝혀지게 된다. 델피니움의 추악한 일면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 그 이름이 가진 영광은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며 나의 오명과 억울함이 풀리리라.]

힘을 주어 단단히 새겨 넣은 듯한 글귀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책장을 덮은 요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비록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꽤 정확하게 본질을 꿰뚫는 책이었다.

끝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해 보이지 못한 채 저자는 생을 마감했지만 요한은 그의 집념만큼은 인정했다. 책에 기록된 시간은 장장 50여 년.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친 열망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억지로 짜 맞춘 소설 같은 책이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겠지만 진실에 꽤 가깝다는 걸 요한은 알았다. 그 혼자만 알고 이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책의 가설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겠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리세트, 뭐가 궁금한 거야?”

상념을 지워 내기 위해 요한은 부드러운 숨결을 흘려보내는 입술을 머금었다. 그에게 고민을 안겨 준 상대에게서 안정을 갈구했고 끝내 되찾았다. 그런 제 모습이 우스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미안해.”

기나긴 입맞춤 끝에 흔들리던 눈빛과 마음은 본래의 상태처럼 평온해졌다. 그러니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책장을 덮은 요한은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려 보냈다.

책의 모든 부분을 검게 그을리자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바친 연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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