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입 맞추고 싶어
이제 곧 11시.
리세트가 없는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요한은 여전히 혼자였다.
이 시간에 너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 걸까.
느긋하게 밤의 풍경을 살피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들어오지 못했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가는 학생들도, 담벼락을 타고 오르려던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너를 찾으러 갈까. 아니면…….
고민하던 요한은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다.
조금만. 한 시간만 더 기다리자.
어렵게 내린 결정은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휘청거릴 정도로 위태로웠다.
너를 찾으러 가고 싶다.
그 마음이 큰 만큼 그와 반대되는 마음도 점차 견고해져 갔다.
너를 찾으러 가면 안 돼.
심지에 매달려 파르르 흔들리던 파란 불빛이 차츰 잠잠해졌다.
너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돼. 리세트에게 그 말을 전한 순간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물론 한 점의 거짓조차 없었다. 진심이었으니까.
리세트의 아이를 제 자식처럼 길러 후계자로 삼고,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가야지. 그 결심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너와 그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너를, 다정하게 그 남자와 손을 잡고 입 맞추는 너를,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아니. 그것만큼은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치워야지. 없애 버려야지.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다시는 내게서 너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없게 죽여야지.
당장이라도 찾아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의문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리세트가 그 남자를 떠나 아트반 크리프에게 간 이유가 무엇일까.
심하게 다투었다는 가정을 해 보았지만, 글쎄. 겨우 그런 이유로 리세트가 아이를 가진 채로 그 남자를 떠나지는 않았겠지.
하룻밤의 실수.
그것만큼 실소가 터져 나오는 가정도 없었다. 리세트는 결코 사랑 없이 그런 행위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버려지고 짓밟히는 기분을, 결국 혼자가 되는 비참함이 요한을 덮쳐 왔다.
리세트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 테니까.
그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만큼 사랑했을 테니까.
그 남자에 대한 사소한 정보라도 알아내기 위해 사람을 풀었지만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온 대륙을 뒤엎을 기세로 수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남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혹시 죽었을까.
환희를 넘어 희열마저 찾아온 순간, 우습게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을 속일 만큼 완벽한 솜씨로 그 남자를 숨겨 줄 수 있는 사람을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영원히 사랑할 연인과 지겨운 배신자. 리세트 델피니움과 아트반 크리프, 이 두 사람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지.
리세트의 마법진은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파훼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건 아트반 크리프인가. 전적이 있으니 한 번 더 그를 속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일 터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갈 무렵에 요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무성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소리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밤의 색을 무서워하는 사랑스러운 겁쟁이의 소리겠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며 물러서는 소리, 급하게 모아지는 마력, 황당하다는 듯 탄식하는 소리.
“멀쩡한 침대는 버려두고 왜 저기서 자는 거지?”
핀잔하는 듯한 말속에서도 애정이 묻어났다. 발끝으로만 서서 다가오는 것,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는 것에서도 그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눈을 뜨고 싶다. 눈을 떠 너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렸다. 곧 다가올 그 순간을 되새기면 그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옛날에는 겁이 많아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너무 없어서 문제네.”
마침내 그에게 다가온 리세트의 손길이 살며시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오늘 아침, 그를 만져 주었던 것처럼.
리세트는 그를 만지고 싶을 때면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요한은 그 손길이 좋았다.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이 순간. 리세트는 그가 잠들었다고 생각하면 평소보다 더욱 천천히, 조심스럽게 만져 주곤 했다. 몇 년 전까지는 방황하더니 이제는 일종의 의식처럼 그 순서까지 정해 놓은 듯했다.
머리카락을 지난 손은 눈가와 콧등을 매만지고 입술 위에서 멈추겠지.
요한이 예상한 대로 리세트의 손길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손길이 떠나가면 부드러운 입맞춤이 얼굴 곳곳으로 내려왔다. 애정이 충만한 의식의 마지막 순서였다.
요한은 그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 온전히 사랑받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리세트는 머뭇거릴 뿐 입을 맞추어 주지는 않았다. 자신을 떠나가는 작은 손을 움켜쥐며 요한은 눈을 떴다.
“안녕, 리세트.”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 ❖ ❖
이래서 결혼한 친구는 다 필요 없다고 하는 건가.
아주 오래전에 스치듯 들은 그 말을 떠올리며 아트반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만남이었다.
리세트가 아카데미로 도망치듯 가 버렸으니 요한은 또 제정신으로 살고 있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심지어 아이에 관한 문제도 있으니 여러모로 복잡하겠지. 그 속이야 썩어 문드러졌을 테고.
이러한 걱정과 더불어 요한이 아이를 싫어하는 이유를, 정확히는 죽이려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했던 아트반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주인님, 오늘은 꽤 늦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2층에서 업무를 보고 내려오던 집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델피니움 공께서 아직 일이 안 끝나셔서 생각보다 일찍 오게 되었지.”
“이 시간까지 일정을 잡으셨단 말씀입니까?”
감탄 섞인 목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려 아트반의 미간이 대번에 좁혀 들었다.
“아주 중요한 일정이긴 하지. 델피니움 공께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공작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답니까?”
“그건 아니고. 얼굴 보러 가야 한다고 빨리 사라지라던데.”
“세상에……. 아직도 그러고 사신답니까?”
“평생 그렇게 살지 않을까 싶어.”
서재로 들어온 아트반은 뻐근한 목 부근을 주무르며 의자에 앉았다. 주치의가 분명 리세트는 건강하다 확언했지. 앞뒤 사정을 모르니 그런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기가 반년 동안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치의는 모르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일을 리세트의 몸이 견뎌 내고 있는 것. 아마도 요한이 아이를 죽이려는 이유와 관련된 일일 것이라는 판단이 맞는 듯했다.
“태어날 제 자식을 아버지가 죽이려 한다면 어떨 것 같아? 쉽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어?”
한숨 쉬듯 말하자 집사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아트반이 막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설마 공작님께서 태어날 아기님께 공작 부인을 뺏길까 봐 그런 일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 정도로 미친 건 아니야.”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친 아트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닌가. 정말 리세트를 빼앗길 것 같아서 아이를 싫어하는 건가.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일은 아닌 듯해 기가 막혔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트반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요한이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겠지?
❖ ❖ ❖
요한은 물끄러미 리세트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두 사람의 시선이 편안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사과처럼 새빨개진 얼굴은 하얀 교복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어깨를 감싼 짧은 소매와 목 부분에 단정하게 묶인 물빛의 리본, 무릎을 덮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살펴 내려간 시선은 잠시 배 위에 머물다 다시 올라왔다.
“이상해?”
요한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리세트는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많이 어색하지?”
학년이 바뀌어 교복도 바뀌었다. 겨우 리본의 색만 바뀐 건데도 왜 이리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리세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보면 방금까지도 어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랜만에 입는 교복이라 들뜬 마음에 거울 앞을 오랫동안 서성거리기도 했으니. 그럼 지금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나도 알아. 너무 잘 아는데, 이게 교칙인 걸 어떡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 앞에서 리세트는 품에 안고 온 책을 힘껏 끌어안았다.
“예뻐.”
리본의 매듭 진 부분을 만져 본 요한이 리세트의 뺨을 감쌌다. 리세트는 질끈 눈을 감아 시선을 피했다.
이 뒤에 벌어질 일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입을 맞추는 순간에는 요한과 시선이 닿아서는 안 된다. 평소에도 쉽게 놓아주지 않는 그는 눈이 마주친 날이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곤 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와 본능적으로 알아낸 인과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요한은 잠잠했다. 한참이 지나도 입술에 닿는 감촉은 없었다.
의아해져 살며시 눈을 뜨자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스칠 거리였지만 요한은 이마를 마주 댄 채로 가만히 머무르기만 했다.
“입 맞추고 싶어.”
그처럼 황당한 말이 리세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내 허락을 받았다고?”
“잘 생각해 봐, 리세트. 허락받고 했어.”
대체 언제? 설마 처음을 말하는 건가.
요한이 말하는 허락의 시간이 대체 언제인지 가늠해 보려던 순간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아직 네가 나를 싫어할 수도.”
“그게, 무슨…….”
“지금도, 내가 좋아?”
그 남자보다 내가 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길. 사랑하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요한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배 위를 짧게 머무르고 떠나간 눈길에 리세트는 할 말을 잊은 채 숨을 삼켰다.
당연하잖아. 내가 너를 얼마나……,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데.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대신 리세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이를 아트반의 아이라고 믿고 있을 요한에게 그 말처럼 황당한 것은 없을 테니까.
“사랑해.”
매일 듣고, 매일 전해 주던 당연한 고백과 함께 요한이 다가왔다. 그와 처음으로 나눈 슬픈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