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9)화 (19/151)

19화
거슬리는 이름

리세트는 하늘이 어두운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에 연구실을 나섰다.

로티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중간부터는 기억이 흐릿했다. 델피니움의 마력. 그렇게 일컬어지는 특유의 마력을 떠올린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델피니움의 이름을 가진 네가 생각나서.

너는 오늘도 찾아올까.

“아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은 거야?”

기숙사로 향해 가던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너는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리세트는 단호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기숙사를 등지고 서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가 있는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텅 빈 방을 보면 왠지 슬퍼질 것만 같았다. 외로울 것 같았다. 오늘, 요한이 떠난 방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순간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는 마음을 다잡는 리세트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뛰듯이 걸어간 건물 앞에 멈추어 선 리세트는 작은 점처럼 멀어져 보이는 기숙사의 꼭대기 층을 바라보았다. 불빛 하나 없이, 창문이 굳게 닫힌 그 방을.

“공작 부인께서는 여전하시네요.”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도서관 건물로 들어가려던 리세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시간에 도서관으로 가시는 걸 보면 아직도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신 것 같고.”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늘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 눈은 너에게 이곳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항상 리세트를 초라하게 만들어서.

고아. 평민. 그런 말로 리세트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는 너에게 요한 델피니움이 가당키나 하냐며 집요하게 괴롭히곤 했다. 쟤는 왜 하필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거지?

“이제는 제법 귀족다운 태가 나시는군요.”

대꾸하기도 귀찮아 리세트는 고개를 한 번 까딱여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시를 당한 게 분했는지 남자가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듣자 하니 공작저가 아닌 기숙사에서 머무르신다고…….”

“여전하시네요.”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어 낸 리세트의 한쪽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안타깝지만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할 일이 많거든요.”

리세트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건물 밖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노바르 로슈만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

하긴, 매 학기마다 치열하게 순위 다툼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자신을 잊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오늘은 꼭 인사를 하자. 싸우지 말고, 인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노바르 로슈만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눈초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 ❖ ❖

여러 번 문을 두드렸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요한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꼼꼼하게 커튼을 쳐 둔 방 안은 희미한 불빛마저도 없는 캄캄한 암흑에 묻혀 있었다. 요한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리세트가 없다는 것을.

본인은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지만 사실 그의 아내는 겁이 많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며 어느 순간부터는 주먹다짐을 그만둔 것도, 어두운 곳에 들어서면 숨을 죽이는 것도. 상처받고 다치는 게 두려워서라는 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을 튕겨 방 안 곳곳에 자리한 양초에 불을 붙인 요한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9시. 잘 준비를 마친 리세트와 침대에 누워 하루 일과를 서로에게 얘기해 주던 그 시간. 요한을 가장 설레게 했던 시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왔지만 그는 지금 혼자였다.

혹시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걸까.

얇은 이불을 움켜쥔 손아귀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마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라면 이분들이 전부입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게 올라온 순간 리세트 주변에 심어 놓은 정보원의 말이 떠올랐다. 치유 계열의 셀번 밀란, 방어 계열의 케서린 로티. 요한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아, 한 놈이 더 있긴 하지.

이불을 놓아준 손으로 요한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노바르 로슈만.

거슬리는 그 이름이 리세트 주변을 맴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교묘하게 그런 짓을 행하던 머저리가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너무나 황당해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쟤가 정말 싫어.’

리세트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요한에게 노바르 로슈만은 차석에서 밀려난 3등으로, 그러다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질 수많은 타인 중 하나일 터였다.

‘나만 보면 막 화를 내. 나는 자꾸만 나를 쳐다보길래 먼저 다가가 말을 건 것뿐인데 내 손을 뿌리치고 소리를 질렀어.’

상당히 억울했는지 리세트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네 손을 왜 뿌리친 건데?’

‘악수하는 것도 싫은가 봐.’

평소였으면 리세트를 위로했을 것이다. 너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말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고, 그러니 이처럼 다시 떠올릴 만한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요한은 그 순간만큼은 리세트를 위로하지 않았다.

‘너를 싫어하나 보네.’

시무룩하게 내려간 눈꼬리를 보았을 때는 미안했지만 요한은 이미 내뱉은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요즘 부쩍 아트반 크리프가 따라다니는 것도 거슬리는데 굳이 한 놈을 더 붙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다음부터는 너를 쳐다보더라도 무시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설마 다음 날 바로 머리채를 뜯고 싸울 줄은 몰랐지만.

자랑스럽지 않으냐는 듯 리세트가 한 움큼 그놈의 머리카락을 쥐고 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회색빛의 머리카락 사이에 익숙한 금발도 드문드문 섞여 있어 놀라움은 더욱 컸다.

‘아트반이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아트반 머리카락까지 뽑아 버렸어. 괜히 미안하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걔도 이해하겠지. 속이 좁은 애는 아니잖아.’

‘그렇겠지?’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리세트의 얼굴과 주먹 쥔 조그마한 손,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힘으로 누른다면 충분히 리세트를 제압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 멍청한 놈이 일부러 맞아 준 모양이었다.

하긴.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차분하게 리세트를 살핀 시선은 건물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에게 달려오는 리세트를 바라보고 있던 그놈에게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듯 쓰다듬어 주자 리세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폴짝폴짝 발돋움을 하며 뛰었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요한은 함께 웃어 주었다. 건물의 그림자에 쥐새끼처럼 몸을 숨기고 있던 노바르 로슈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거치적거리는 이름이 가져다준 과거를 되짚어 보며 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슬슬 리세트를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문으로 향하던 요한은 문득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방문과 침대, 창문까지 느리게 살펴본 뒤에 창틀에 올라앉았다.

오랜만에 기다려 볼까.

혹시라도 내가 너를 찾으러 간 사이에 네가 돌아오면 안 되니까. 길이 엇갈리는 것보다는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굳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핑계를 전부 끌어오면서 요한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락거리는 치맛자락과 흥얼거리는 듯한 작은 노랫소리, 리세트의 소리가.

❖ ❖ ❖

리세트는 골몰하는 얼굴로 다음 책장을 펼쳤다.

보편적으로 아이는 부모 중 한쪽의 마력을 물려받지만 드물게 같은 혈족의 마력을 계승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힘의 우위에서 밀린 방계의 마력을 지니게 되어 가세가 기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마법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 익혔던 내용이라 이 책에서는 새롭게 건질 만한 게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가볍게 복기하며 책장을 넘기던 리세트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단 한 번도 어떠한 불상사 없이 마력이 이어지는 게 가능한 일인 걸까.

신의 가호.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건가.

예전 같았으면 별다른 의심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온 대륙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델피니움가(家)의 비전 마법에 의문을 품은 이상,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인위적인 힘의 개입 없이,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델피니움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리세트가 궁금해하는 내용에 관한 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직 기적, 신의 축복, 찬란하고 유구한 영광. 그렇게 기록될 뿐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수 대에 걸쳐 기록한 책에 하나의 견해만 존재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그녀보다도 훨씬 배움이 깊고 넓은 사람들 중 누구도 그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 의심의 불이 붙으니 그저 모든 게 의심스럽기만 했다.

책 기록 보관소로 간 리세트는 다시 한번 델피니움 공작 가문에 관한 역사서를 살펴보았다.

역시 똑같다.

모든 책이 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저자와 학파, 연구 분야가 모두 같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래도 한 명쯤은 다를 텐데.”

책장의 맨 밑, 가장자리로 밀려난 책을 뽑아 든 리세트는 제목과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책이 보관된 위치나 흐릿한 글자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발표 당시 큰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델피니움에 관한 책이 이런 제목을 가졌으니 주목받기는 힘들었겠지.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을 발견한 리세트는 미리 골라 놓은 책과 새로 고른 책을 품에 안아 든 채 잰걸음으로 기숙사를 향해 갔다.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방문을 연 리세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군가 방에 침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교칙상 유혈 사태는 막아야 하니 방어 마법에 가두어 신고할 생각이었다.

“……어?”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 사이로 환한 달빛이 들어왔다. 방 안을 채우고 있는 따스한 파란 불빛도 그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든 빛을 담은 얼굴까지도.

파스스 깨어진 긴장감과 함께 손 틈 사이로 마력이 흩어졌다.

요한이 창틀에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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