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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8)화 (18/151)

18화
저런 게 사랑이라면

아트반은 가늘게 뜬 눈으로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세트가 아카데미로 떠났으니 흙빛으로 썩어 가는 몰골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멀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니.

웬일로 저 반질반질한 얼굴에서는 빛이라도 나는 듯했다. 그것이 너무도 이상해 아트반은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요한을 살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지도 않고, 제대로 식사를 하고 서류를 보는 그 모습을.

“공작 부인께서 오래 자리를 비우시는 터라 공께서 상당히 슬퍼할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

“아니면 이제야 철이 드신 건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축하해.”

“…….”

“귀에 이상이 생길 나이도 아닌데 내 말을 이리 무시하는 걸 보면 음식과 함께 내 말도 같이 씹어 드시는 건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라지만, 이런 냉대는 좀 아니지 않나?

지은 죄가 있어 따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오죽 민망하면 공기처럼 머무르는 사용인들이 눈치를 살필 지경이었다.

계속되는 무관심에 굴하지 않은 아트반은 공작저에 온 목적을 한 번 더 상기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 미운 친구의 아이를 위해 이토록 헌신하고 있는 자신에게 온갖 찬사를 건네주며.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아?”

눈짓으로 사용인들을 물린 아트반은 넌지시 물었다.

“어찌 되었든 첫아이를 잃은 거잖아.”

비록 거짓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슬픈 기색을 보여야 정상 아닌가? 저렇게까지 제 아이에게 무관심한 태도라니.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저의가 뭐야?”

“우리 사이에 저의라는 단어는 좀 아니지 않아? 걱정돼서 물어본 건데.”

“쓸데없는 걱정이야. 차라리 네 앞날을 걱정하는 게 어때?”

“내 앞날?”

“언제까지고 후작 부인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둘 수는 없잖아. 나와 이럴 시간이 있나?”

마음속에서 간신히 잡고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의 이름은 인내심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트반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께서는 참 운이 좋아. 그딴 말본새로 어떻게 공작 부인의 마음을 잡았을까? 평생 결혼이라는 단어는 공과 인연이 없을 줄 알았거든.”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했고, 나는 했지.”

“나는 마음이 없어서 안 하는 거고. 공께서는 받아 줄 여자가 없어서 독신으로 늙어 죽을 줄 알았다니까?”

대번에 찢어지는 저 살벌한 눈초리를 언젠가 꼭 리세트에게 보여 주어야지.

“공작 부인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당장 이혼하자고 할지도 모르겠는걸?”

“손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식사는 이미 끝난 것 같네. 이제 그만 후작저로 돌아가지 그래?”

“아직 안 끝났어. 디저트까지 제대로 먹고 돌아갈 생각이거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요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묘하게 대화의 방향이 틀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아트반이 다시 화두를 돌렸다.

“네가 많이 슬퍼할 줄 알았는데 의외란 말이지. 이상할 정도로 아이에게 애정이 없어 보여.”

“허튼소리를 계속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 너 상대해 줄 시간 없어.”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시나. 혼자 바쁜 척은 다 하는 저 모습을 보니 아트반은 더욱 순순히 귀가하고 싶지 않아졌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

“바빠.”

“왜?”

“리세트에게 가야 해.”

할 말이 없어진 아트반의 손에서 포크가 툭 떨어졌다. 접시에 부딪친 포크가 만들어 낸 작은 소음만이 이 정적 속의 유일한 소란이었다.

설마 아카데미까지 드나들 줄이야.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낸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아트반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공작저에서 아카데미까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지? 심지어 지금, 이 시간에?

“저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텅 빈 맞은편 자리를 응시하던 아트반의 음성에서는 사뭇 비장한 각오가 묻어났다.

“나는 절대 저러고는 못 살아.”

고개를 내젓는 몸짓도 꽤 단호했다.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 ❖ ❖

모처럼 편하게 식사를 마친 리세트는 괜스레 배를 쓸어 보았다.

조금 부푼 것 같은데 착각일까. 아침까지만 해도 납작했던 배가 갑자기 볼록해지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너무 열심히 배를 채운 것 같다고, 리세트는 뺨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몸을 따듯하게 해 주는 차란다.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편하게 마시렴.”

케서린 로티는 알맞게 식은 차를 따라 주며 리세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교복까지 반듯하게 입혀 놓으니 영락없는 리세트 하리펜의 얼굴이 드러난 듯해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님, 저 꼭 1등이 하고 싶어요. 노력하면 할 수 있겠지요?’

45등. 맨 밑바닥의 숫자가 적힌 성적표를 들고 달려와 간절하게 묻던 어린 제자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선생님! 로티 선생님! 이번 시험 전체 석차는 2등이지만, 그래도 우리 계열에서는 제가 1등이에요. 제가, 1등을 했어요!’

감길 듯 말 듯 간신히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우렁찼지. 조막만 한 손으로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내밀던 아이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 성적표를 작성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굳이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냥,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연구실의 책장을 유심히 살펴보는 제자가 기특해 저절로 미소 지어졌다.

“태어날 아기는 아주 똑똑할 것 같네.”

수석과 차석을 나란히 차지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인 만큼 명석한 두뇌는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격적인 부분까지 제 엄마를 닮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지.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차기 델피니움 공작은 어떤 마력을 물려받게 될까.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그리고 이 제국을 넘어 온 대륙 전체가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번 대에도 델피니움 공작가는 대대로 유지해 온 고결한 마력을 지켜 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마력을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 세간의 이목은 이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법사로 태어날 아이는 부모 중 한 사람의 마력을 물려받게 된다.

변칙적인 확률로 행해지는 일이라 감히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델피니움 공작가를 제외한 모든 귀족 가문이 그랬다.

신의 가호가 깃든 가문. 초대 공작부터 고스란히 이어지는 하나의 마력을 그 외에 어떤 단어로 칭할 수 있겠는가. 계승되는 마력의 정통성이야말로 델피니움 공작가의 위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과연, 이번에도 영광된 그 이름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오롯이 신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마력 계승을 벗어난 존재, 리세트 하리펜. 지금껏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모든 규칙을 부수어 놓은 그 이름이 유명해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모 모두가 평생 마법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것은 논외라 하더라도 두 가지의 마력을 동시에 지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리세트 하리펜에게 일어났다. 온 대륙 역사를 죄다 살펴보아도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대했다.

델피니움의 후계자는 어떤 마력을 계승하게 될까.

델피니움의 역사를 견고하게 쌓아 올린 전투 계열? 어미의 마력을 물려받아 방어 계열을 계승할까? 그것도 아니면 치유 계열? 혹은 전혀 다른 계열? 이 주제를 놓고 내기 판까지 깔릴 지경이었다.

“태어날 아이가 어떤 마력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니?”

“……요한의 마력이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 거 말고. 나는 너의 생각이 궁금한데?”

잠시 망설이던 리세트가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사실 그런 것까지 자세하게 고민할 시간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요한의 마력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지금은 달라요.”

“어떤 점이?”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요. 아무런 고민 없이 제 안에서 잘 놀다가 제때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무사히, 건강하게요.”

조심스럽게 배를 감싸 안는 리세트를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유산을 하였다고 했지. 뒤늦게 그 일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로운 가십처럼 떠들어 대는 인간들과 자신이 별다를 바 없이 느껴져 부끄러웠다.

“건강하게 잘 태어날 거란다.”

어두운 그림자에 감싸인 것만 같은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케서린 로티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건강하고 똑똑한, 타인을 위할 줄 아는 그런 따스한 성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겠지. 너를 닮았을 테니까.”

단순한 위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거짓 한 점 담기지 않은 진심이었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너보다는 덜 용감했으면 좋겠어.”

케서린 로티는 부디 태어날 아이가 리세트를 닮길 바랐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울 테니까. 아무래도 요한 델피니움보다는 리세트를 닮는 편이 아이에게도 좋겠지. 그 견해는 리세트의 임신 소식을 들은 후부터 쭉 이어져 왔다.

문득 실없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입가에 감돌던 웃음이 차츰 흩어졌다.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니?

케서린 로티는 리세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슬퍼 보인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두려워 보인다는 한 단어로 치부하기에도 부족했다. 여러 감정이 혼재되어 도무지 리세트의 표정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다른 고민이라도 있니?”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는 것 같아서요.”

맑은 미소를 담은 얼굴은 익숙했는데, 그 얼굴 속에 감추어진 감정은 낯설었다.

‘리세트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아이의 성장을 늦추는 마법에 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해. 아무리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 해도, 리세트는 그럴 아이가 아니잖아.’

셀번 밀란의 말까지 불쑥 떠올라 한층 더 고민이 깊어졌다.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선생님.”

그렇게 말하는 네가, 어째서 셀번 밀란에게는 그런 것을 물어본 걸까. 며칠 사이에 간단히 마음을 돌릴 만한 일이 결코 아닌데.

“선생님은 정말 아이가 저를 닮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케서린 로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리세트에게 말 못 할 일이, 그것도 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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