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빈자리
리세트는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둘 짝을 지어 강의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오랜 시간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업을 들은 동급생들 무리였다. 공작 부인이 된 고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들은 가벼운 눈인사만 던진 후 사라졌다.
리세트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으며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리세트 델피니움.”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출석 여부를 확인하던 케서린 로티가 다시 리세트를 호명했다.
“앞자리가 비어 있으니 이쪽으로 와요.”
졸지에 맨 앞에서 수업을 듣게 된 리세트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수업 시간을 보냈다.
“이 부분은 꽤 어려울 텐데 질문하는 사람이 없네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는 열심히 질문해야 했고.
“지금 설명하는 마법진은 전개한 마법사 본인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치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나요?”
적절한 답변과 설명 또한 수업이 이어지는 내내 쉬지 않고 해야 했다.
“오늘 내용은 따로 복습할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니 지금 바로 시험을 보기로 합시다.”
예고 없이 시작된 시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무렵에 이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수고했어요. 채점한 시험지는 앞에 둘 테니 가져가고, 과제는 기한 안에 제출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소 지친 인사를 건넨 학생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하나둘 일어서자 리세트도 책을 챙겨 일어났다.
“무슨 일 있니?”
문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로티 선생님이었다.
“네가 웬일로 지각을 하지 않아서.”
“선생님…….”
치유 계열과 방어 계열의 건물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리세트는 종종 지각을 면치 못했다. 달리는 게 허락되는 곳이었다면 지각을 일삼는 아이로 낙인찍히지는 않았을 텐데. 그 당시에는 이동할 시간이 빠듯했다고 몇 번이나 변명했지만 로티 선생님은 언제나 지각생이라는 이름으로 리세트를 놀리곤 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서운하고 조금 밉기도 했지만 지금은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동기들과 크게 다툰 날이나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날이면 로티 선생님은 유독 리세트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대신 복수도 해 주셨다. 어마어마한 양의 과제와 반성문, 교육을 빙자한 사소한 괴롭힘 같은 것들을.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목격한 일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던 아이들 모두가 공교롭게도 리세트를 괴롭힌 그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속에서 작게 웅크리고 있던 감정이 툭 터져 나왔다.
그때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른을 향한 동경심이었던 것 같다고, 리세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수업도 집중을 통 못 하는 것 같더니 나와 단둘이 대화를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아……. 죄송해요.”
“보아하니 내 수업도 지루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따분한 것 같은데.”
“전혀요! 전혀 아니에요!”
부정하듯 허겁지겁 손을 내젓는 바람에 품에 안고 있던 책이 우수수 떨어졌다. 황급히 무릎을 굽혀 앉은 리세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닌 건 알겠는데 너무 강하게 부정을 하니 선뜻 믿기 힘드네.”
책을 주워 리세트에게 건네준 그녀는 질책하듯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임신했을 때는 좀 조심하는 게 어떻겠니? 밀란 선생은 아주 조심했던 기억이 있는데 너는 영 그런 기색이 없어.”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언제나 대답은 잘하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케서린 로티는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반. 한 시간 후면 치유 계열의 심화 과정 수업이 시작된다. 방어 계열의 수업은 끝났지만 리세트의 수업은 아직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밀란 선생의 수업까지 다 끝나고 나면 남은 일정은?”
“선생님께서 내 주신 과제를 열심히 해야지요.”
케서린 로티는 책을 안고 있는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훌륭한 학생의 자세구나. 자주 해 주었던 칭찬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거 말고, 네가 정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아니니.”
“예습이요?”
“그것도 아니야.”
“음……. 아! 복습!”
오답만 제시하는 제자가 답답해 그녀는 돌려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렇게 둔한 눈치로 식당에서는 왜 편히 식사를 못 하고 이리저리 기웃대는 것인지.
“선약이 없으면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할까?”
❖ ❖ ❖
리세트는 한적한 곳에 와서야 걸음을 늦추었다.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외곽을 지나던 무렵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떠다니는 풍성한 하얀 구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본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걸 떠올리자 리세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아가, 엄마가 자랑스럽지 않아? 제일 늦게 수업에 참여했는데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거야.”
뿌듯한 목소리로 리세트는 부지런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마 아빠였어도 힘들었을걸? 기껏해야 음…… 차석정도 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아카데미였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조금 욕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수업을 듣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모든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런 것일까.
엄연히 정규 학기에 등록한 것이니 수업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이라면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이러다 엄마가 수석까지 하면 어떡하지?”
리세트 하리펜은 지각생이자 만년 차석이었지만 리세트 델피니움은 수석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수석은 1등의 또 다른 이름이야. 엄마는 늘 1등을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게 됐네.”
요한이 없는 틈을 타 빈집을 차지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수석, 1등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니. 하지만 기분 좋은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점수가 매겨진 시험지를 꼭 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리세트는 바람에 실려 저 멀리 날아가는 시험지를 붙잡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며 웃을 처지가 되나.
자조 섞인 물음을 던지던 리세트의 머릿속으로 불쑥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곤히 잠든 그 예쁜 얼굴이.
오늘은 유독 아침 하늘이 아름다웠다. 해가 온전히 떠오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한 리세트는 제 몸을 가두듯이 껴안은 채 잠이 든 요한의 속눈썹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눈시울을 덮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요한은 끝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리세트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요한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길어진 햇살의 줄기가 요한의 얼굴에 닿은 순간, 바람이 다가와 짙은 파란빛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달아났다. 부드러운 감촉을 기억하는 손끝이 괜히 간지러워 리세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히 잠든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요한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더욱 숨을 죽이며 손을 움직였다. 머리카락보다 더 부드럽고 가느다란 속눈썹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온화하게 말려 올라간 입매를. 그렇게 차근차근 지나온 손길은 입술 위에서 멈추었다.
아프지 않게 살짝 입술을 눌러 본 리세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숨결이 겹쳐지기 직전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 냈지만 놀란 가슴은 아프도록 쿵쿵 뛰었다.
조금 더 요한의 모습을 눈에 담던 리세트는 시계를 확인한 후 그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마음은 급한데 요한은 리세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언제까지? 그를 따라 목소리를 낮추자 요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다시 스르르 잠이 든 요한을 리세트는 계속 바라만 보았다.
다행히 요한은 수업 준비를 할 최소한의 시간을 남겨 준 채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 덕분에 멍하던 시선에 초점을 잡은 리세트는 빠르게 준비를 해 수업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아빠는 언제나 엄마보다 먼저 일어났는데 어제는 많이 피곤했나 봐.”
아직도 요한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리세트는 공연히 배를 문질렀다.
“아빠는 잘 일어났을까?”
서서히 느려지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어 섰을 때 리세트는 몸을 돌려 기숙사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우리 같이 잠꾸러기 아빠가 아직도 자고 있는지 보러 갈까? 왠지 네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한참 멀었으니 기숙사에 들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오자.”
오늘도 분명 중요한 일정이 많을 텐데 늦잠 자다 늦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가는 거야. 걱정돼서.
아빠를 보지 못하면 네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
리세트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피어났다. 연녹색 잔디가 돋아난 바닥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일부러 힘을 주어 문을 두드린 리세트는 귀를 바짝 문에 댄 채로 얼마간 기다렸다. 자신의 방이었지만 아직 요한이 머물고 있다면 아무래도 노크를 하고 기다려 주는 편이 좋을 테니.
묘한 두근거림에 콩닥거리던 심장이 차츰 본래의 속도를 찾아갔다.
살짝 연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리세트는 찬찬히 방의 모습을 살핀 뒤에야 들어왔다.
“다행이다. 아빠가 잘 일어났나 봐.”
밝은 목소리였지만 힘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한곳에 고정된 리세트의 시선은 미동도 없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렀다. 몇 시간 전까지 함께 누워 있던, 어쩌면 방금까지도 요한이 누워 있었을지 모르는 침대가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와서 깨워 줄걸.”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리세트는 침대가에 걸터앉아 머리카락 끝에 묶인 끈을 매만졌다. 단정하게 정돈하여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미운 모습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다시 머리를 빗고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리세트는 치맛자락에 툭툭 손을 문질렀다. 이마와 콧잔등에 조그맣게 맺힌 땀방울을 시원한 물로 씻어 내고 나니 어느덧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리세트는 문득 몸을 돌려 텅 빈 방을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