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전부, 다 기억해
무심코 환하게 웃은 리세트는 곧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나는 네 앞에만 서면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요한 앞에서는 늘 감정을 숨기는 게 힘들었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것들이 전부.
“여긴 왜 왔어? 시간이 너무 늦었어. 어서 돌아가.”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리세트는 얼른 요한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한이 와 주어 기뻤다. 그 기쁨이 큰 만큼 요한을 기만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선명해져 견디기 힘들었다.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는 작은 손을 제 손안에 가둔 요한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 한 걸음 물러서던 리세트는 얼마 못 가 다시 그에게 손을 붙잡혔다.
“약속 지키러 왔어.”
“약속?”
“기억 안 나?”
뜬금없이 나타나 약속이라니. 곰곰이 생각하던 리세트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입술을 살며시 다물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워.’
설마, 그럴 리가. 겨우 그 말을 기억하고 왔을 리 없잖아.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 말을 한 이후로 리세트는 홀로 잠든 기억이 거의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요한이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면 그는 언제나 리세트 옆에서 잠이 들었으니까.
“기억 못 해도 괜찮아. 내가 다, 전부 기억하니까.”
“갑자기 무슨 궤변이야? 어서 공작저로…….”
“맞아. 사실 다 핑계야.”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요한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걸 깨달은 순간 리세트는 매정하게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불쑥 질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리세트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너 없이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왔어. 그러니까 나 쫓아내지 마.”
“내가 가라고 하면, 갈 생각은 있어?”
“아니. 받아 줄 때까지 부탁할 거야.”
“그럴 거면 왜 물어봐?”
요한은 가늘게 눈을 찌푸린 리세트를 안아 들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긴 했지만 리세트는 그를 밀어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앉아도 거뜬한 창틀에 자리를 잡은 요한은 리세트를 끌어안은 채로 바깥 풍경을 살폈다. 어둠이 내려앉은 교정은 포근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왜 아직 못 잤어?”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요한은 힐긋 리세트의 얼굴을 살폈다.
“잠이 안 왔나.”
가만히 기다렸지만 리세트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향한 완강한 거부처럼 느껴져 요한은 무심결에 손끝에 힘을 실었다.
“내 머리카락을 죄다 뽑으러 온 거야?”
뾰족하게 닿아 오는 시선에 정신을 차린 요한은 살며시 힘을 풀어 느슨하게 머리카락을 감아쥐었다. 간지러운 이 감촉이 좋았다.
“낮잠을 너무 많이 자서 안 졸린 것 같아. 주치의가 나중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는 시기가 올 거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졸릴 줄은…….”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던 요한은 말을 멈춘 리세트의 뺨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응. 듣고 있어.”
“그냥, 요즘은 낮에도 잠이 부쩍 많아졌다는 뜻이었어.”
리세트는 뺨에 닿은 손가락을 살짝 밀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마음처럼 막막한 빛으로 물든 하늘에는 그 흔한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도 알아. 임신하면 잠이 많아진다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주치의에게 물어봤으니까.”
“언제, 물어봤는데?”
“처음에. 네가 임신했을 때.”
처음에는 우리 아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거야?
입 안에서 맴돌던 그 말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포근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었다.
“내가 한 말 전부 진심이야. 나는 우리 아이에게 모든 것을 줄 거야. 네가 바라는 애정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전부. 그러니 내 눈치 보면서 어색하게 피하지 마.”
“나는…….”
리세트가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요한은 더욱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자.”
요한은 리세트의 머리카락 위로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나는 너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돼.”
“내가 밉지 않아?”
리세트는 서서히 다가오는 잠기운의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무어라 대꾸할지 두려워 차라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 모든 소리를 가져가 주었으면, 그런 실없는 바람도 되뇌어 보며.
“내가 너를, 어떻게 미워하겠어.”
제 아이를 남의 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중에 네가 모든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나를 많이 미워할 텐데.
고민이 밀려오는 와중에도 등에 닿은 심장의 울림이 좋아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했다. 참을 수 없이 잠기운이 밀려들었다.
“잘 자.”
다정한 인사를 건넨 남자의 얼굴이 리세트가 잠들기 전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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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입맞춤을 나누고. 가슴 떨리는 그 모든 추억은 전부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가 듣기 좋아서 요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좋았다. 제 품에 안겨 편안하게 잠이 든 모습도, 얌전히 모든 걸 내맡긴 듯 부드럽게 이완된 몸도.
‘겁쟁이.’
지금보다 더 가볍고 높은 리세트의 목소리가 그날을 닮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듯했다.
‘이제 보니 너, 상당한 겁쟁이구나?’
다시, 또다시. 경쾌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겁쟁이라니. 누가 누굴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진 요한은 반박하려다 말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피했다. 왠지 부끄러워서.
‘그래. 무서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상당히 당황했지만 요한은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을 끝까지 잘해 냈다. 리세트는 다정한 아이니까. 무섭다는 친구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네가 손을 잡아 주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응. 손잡아 줘.’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다.
겁쟁이라며 실컷 놀리고 웃은 리세트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요한은 그 손을 잡고 천천히,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린 동작으로 창틀에 올라섰다.
‘어때? 막상 올라와 보니까 너무 좋지? 자, 어서 밑에 좀 내려다봐 봐. 얼마나 예쁜지 몰라.’
좋은 것을 친구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아이는 마주 잡은 손을 더욱 꼭 잡아 주었다.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듯이, 다정하게. 리세트는 손가락으로 건물들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저곳은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리세트는 맞잡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어때? 예쁘지?’
불어오는 바람결에 가느다란 은빛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기대감에 부푼 분홍빛 뺨을 지나온 시선은 반짝이는 눈동자 위에서 멈추었다.
‘예뻐.’
요한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할 수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깊이, 더 깊이 바라보면서.
‘나 아직 무서우니까 손 놓으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절대 안 놓을 거야.’
어디선가 온도가 달라진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바람을 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의 손을 잡고 이 창틀에 걸터앉곤 했던 작은 아이가 어느덧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제는 조금 더 자라난 여자의 모습으로.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리세트의 목소리에서는 슬픔이 가득 배어났다.
요한은 리세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앗아 간 몬스터를 몇 년 뒤에는 직접 토벌하러 갈 테니 당연히 무섭겠지. 그가 오기 전에 이미 엉엉 운 게 분명한 눈가를 문질러 주자 리세트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훌쩍이기 시작했다.
‘너는 절대, 절대로 다치면 안 돼. 알겠지?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내가 꼭 구해 줄게. 전부 치료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잠시도 떨어지면 안 돼. 약속해 줘.’
리세트는 붉어진 눈가를 힘주어 닦아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요한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 전쟁이 다 끝나면, 그때는 결혼할까?’
수없이 고민한 날들이 무색하게도 그런 형편없는 고백이 불쑥 나와 버렸다.
너에게 어울리는 맑고 화창한 날에, 이 세상에서 가장 탐스럽고 아름다운 분홍빛 장미꽃을 안겨 주며 고백하려던 계획은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졌다. 오직 너 하나만. 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너만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사랑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 요한은 반듯한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그날과 같은 고백이 흘러나온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를 안아 창틀을 내려왔다.
“거짓말쟁이.”
침대에 누워 한 손으로 턱을 괸 요한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며 아프지 않게 리세트의 뺨을 톡, 두드렸다. 소리를 죽이려고 살금살금 내디디던 발걸음 소리가 떠올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쩜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건지.
‘이건 너한테만 알려 주는 비밀인데, 나는 매일 엄마 아빠랑 같이 잤어. 그래서 혼자 자는 게 무서워.’
요한은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을 한 리세트의 표정이 하도 심각해 온종일 고민했던 날이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운 순간, 나날이 눈 밑에 그림자가 짙어지는 리세트가 불쑥 떠올랐다.
그래서 그날 밤 요한은 이 방으로, 리세트가 있을 이곳으로 몰래 찾아왔다.
문을 열어 준 리세트는 놀라긴 했지만 주위를 빠르게 살펴보곤 그의 팔을 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 동작이 어찌나 날렵하던지. 한 침대에 누워 손을 꼭 붙잡은 두 사람에게 맑은 달빛이 내려앉았다.
‘이제 안 무서워?’
요한이 묻자 리세트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눈물을 감추려는 듯 리세트가 밝게 웃었을 때 요한은 충동적으로 약속했다.
‘혼자서는 잠도 못 자는 겁쟁이는 이제부터 나랑 자면 되겠네.’
기쁜 듯 웃던 리세트는 곧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요한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자 리세트는 작게 웅얼웅얼 말했다.
‘선생님들한테 들키면 어떡해? 나보다는 네가 더 혼날 거야.’
‘안 들켜.’
‘그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들키면 어떡해?’
마주 잡은 손은 더욱 꼭 움켜쥐면서 그런 걱정을 하다니.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번진 그 눈을 요한은 여전히 기억할 수 있었다. 종종 너는 아직도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니까.
“잘 자.”
먼저 잠이 든 리세트를 껴안으며 요한도 눈을 감았다. 흐릿한 달빛이 스며든 방 안에는 고요한 숨소리만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