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네가 없는 지옥
대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로드니에게 한 하녀가 다가왔다.
“오늘도 주인님께서는 식사를 하지 않으시겠지요?”
“따로 준비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니 아마 그렇겠지.”
그 하녀가 주방에서 일한다는 걸 알아본 로드니는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안타까운 사실을 전했다. 맥없이 축 처지는 하녀의 어깨를 보니 마치 극악무도한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저희가 준비한 음식은 오늘도 버려지겠네요. 주인님께서는 대체 언제쯤 식사를 하실까요?”
마님이 돌아오셨을 때.
로드니는 간신히 그 대답을 꿀꺽 삼켜 냈다. 열심히 식사를 준비한 사람의 미약한 희망마저 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글쎄다. 그래도 이동 중에 짬을 내서 식사하시겠지. 아마도.”
결국 그처럼 형편없는 말을 끝으로 로드니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발 좀 물러갔으면 싶었는데 하녀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와 그의 숨통을 조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결기가 엿보였다.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저택에서조차 입에 대지도 않으시는 음식을, 밖에서 제대로 챙겨 드실까요?”
“그럴 거다. 수행인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까.”
“정말요? 음식다운 음식을 드시기는 한다는 거지요?”
“그, 그럼!”
무언가를 가늠하듯 유심히 그를 보던 하녀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역시 밖에서도 안 드시나 보네요.”
더 이상 반박할 자신이 없어 로드니는 하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으로 위로를 끝맺었다. 한숨을 포옥 내쉰 하녀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돌아갔다.
진땀 나는 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로드니는 곧 허리를 바르게 세워 몸을 돌렸다. 델피니움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로드니의 인사에 공작은 가벼운 눈짓을 보내며 홀을 살폈다. 문이 닫히고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그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로드니는 어렵지 않게 공작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알아챘다.
2층. 선대 공작 부인이 주로 사용했고, 이제는 공작 부부의 공간이 된 그곳.
결혼식을 올린 직후에 기어이 마님의 침실 근처에 집무실을 하나 더 만들고 공작 본인의 침실마저 옮긴, 그 층에 머무르는 눈길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침내 공작이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가자 로드니는 숨을 죽인 채 뒤따랐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럼 간식이라도…….”
“그것도 괜찮아.”
집무실 앞에 당도한 요한은 리세트의 침실에 한 번 시선을 준 뒤 문을 열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옮기던 하녀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물러났다.
“여기서 대기해. 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요한은 따라 들어오려는 수행인마저 물린 채 홀로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들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져 갈 즈음 요한이 움직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적막이 내려앉은 집무실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 가지런히 놓인 깃펜과 잉크병. 깔끔하게 정돈된 커튼과 소파. 그 모든 것을 차분하게 살핀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대로 책상을 지나친 요한은 책장이 일렬로 늘어선 벽면의 빈 공간을 손으로 짚었다.
손끝에서 번진 파란색의 마력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웠을 때 감추어 둔 문이 드러났다.
❖ ❖ ❖
언제 보아도 음습하고 불결한 장소였다. 아마 영원히 이 공간은 그런 곳으로 남을 테지.
요한은 아스라한 불빛이 전부인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빛이 어둠을 희석하고 있었지만 요한에게는 그저 진창 같은 암흑이 덧씌워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분명 빛이 맞는데, 전혀 빛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빛이 파란색이기 때문일까. 델피니움의 상징이자 나의 근간을 이루는 색이라서 그럴 수도.
한때는 자랑이었으나 이제는 저주로 느껴지는 물음들을 요한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발버둥을 쳐 본들 바뀌는 건 없으므로. 더 이상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순순히 인정했다.
체념인지, 수긍인지. 이제는 그런 것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요한 델피니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살아왔다. 죽는 순간에도, 죽어서도 그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살아가야만 했다. 그의 몸을 이루는 피와 살, 마력을 전부 도려내지 않는 한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원히, 죽어서까지도.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요한은 그만 모든 상념을 털어 냈다.
계단의 끝 지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한 문을 열자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가 지하실 통로에 울려 퍼졌다. 더러운 짓을 행한 장소답지 않게 내부의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이 깨끗했다. 고결하다 칭송받는 그 이름, 델피니움처럼.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만이 그날의 일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아, 또 한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자신이 그 일의 목격자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이 지하실에서 어머니가 쓸쓸히 죽어 갔다. 너무도 사랑한 동생도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결국 이곳에서 죽었을 터였다.
요한은 마법진 위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서면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두 사람의 비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착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 목소리조차 그리워 요한은 때때로 이 장소를 찾곤 했다. 그들을 추억할 방법이 이것뿐이라서.
살려 줘. 아파.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어 미안하구나, 아가.
동생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멀어져 가자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연인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사랑해, 요한.’
리세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아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리세트, 너는 지금 내 옆에 없지.
그 당연한 사실과 함께 공허함이 밀려왔다. 원망과 미움 또한 따라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반 델피니움.”
더럽고 질척한 모든 감정의 근원지를 향해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나는 리세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겠지.”
그렇게 죽어 주어 고맙다고 해야 하나.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당신 덕분에 나는, 당신이 미치도록 원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아버지.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델피니움의 이름은 계속될 테지만 그 더러운 핏줄은 내가 마지막일 테니까요. 죽는 순간까지 당신이 열망하던 그 이름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될 날도 머지않았으니 지옥에서 울부짖으며 무력하게, 꼭 내 어머니와 동생처럼 무력하게 지켜보길.
핏자국처럼 붉게 물든 마법진을 그만 벗어난 요한은 문을 굳게 닫은 뒤 계단을 올라갔다.
한 걸음씩 멀어질수록 어머니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동생의 목소리도 천천히 사라졌다.
남은 건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리세트, 너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세상을 향해 요한은 주저 없이 걸어 나갔다.
“주인님,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열린 문 때문에 놀란 수행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요한을 황급히 따라왔다.
“수행은 필요 없으니 이만 쉬어도 돼.”
요한은 수행인을 대동하지 않은 채로 문밖을 나섰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마부가 조용한 묵례로 인사를 올리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 몸을 싣기 전, 요한은 문득 고개를 돌려 어둠에 잠긴 저택을 바라보았다.
죽은 듯이 고요하고, 또 얼마쯤은 으슥한 그 아름다운 감옥을 뒤로한 채 요한은 마차에 올랐다.
❖ ❖ ❖
리세트는 팔짱을 낀 채로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메이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사랑스러운 분홍색 잠옷의 프릴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하듯 리세트의 상념 또한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였다.
마법으로 아기의 성장을 늦출 수 있는지 조사하던 중 과거에 행해진 연구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연구 결과가 담긴 보고서들을 살펴 내려가던 기분이 되살아난 듯해 리세트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 쳤다.
과거에 그런 연구를 진행한 사람들은 공통적인 목적이 있었다.
원하는 마력을 얻기 위해 아기의 성장을 막는다.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는지 연구 목표에 버젓이 그걸 써 놓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곧 그 연구의 연결 고리를 찾아냈다.
모체를 통해 태아에게 직접적으로 원하는 마력을 주입하는 것. 성공할 때까지 거듭하여 그 짓을 반복하는 것. 그러니 아기가 늦게 태어날수록 시간을 버는 셈이었다.
다시 짚어 보아도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들이 벌인 끔찍한 연구라는 평가만 남았다. 다행인 건 비인륜적인 행태를 꼬집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잠정적으로 연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강한 열망을 가진 귀족들이 연구를 지원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어 금세 시들해졌다고.
어쩜 사람이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있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리세트는 풀썩 침대에 몸을 누였다. 얼마간 침대 위를 부산스럽게 구르다 잠을 청하고자 했지만 결국 눈을 떴다.
어느덧 침대에 누운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본 그 연구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것이라 우겨 보았지만, 그럴수록 리세트의 머릿속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선명해져 갔다.
이곳에는 요한과 쌓은 추억이 너무 많아서.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곤혹스러웠다. 요한의 얼굴이 그 끔찍한 연구를 지워 주어 그나마 다행인가.
길어지는 한숨이 잦아든 건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마치 리세트의 침실 문을 두드리던 요한을 생각나게 하는 소리였다. 규칙적으로 똑똑똑, 그렇게 두드리는 소리. 벌떡 몸을 일으킨 리세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자신의 귀를 원망하며 리세트가 이불을 막 뒤집어썼을 때였다.
똑똑똑.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소리는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 리세트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자 다시 한번 똑똑, 간결하지만 언뜻 경쾌한 느낌마저 드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