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화 (14/151)

14화
지각생

온기를 찾아 포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리세트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매만졌다.

“요한?”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시야에 담겼다. 맑고 따스한 노을은 명화 속의 한 부분처럼 아름다워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마간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던 리세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공작저의 침실보다 낮은 천장과 텅 빈 옆자리. 아담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깃펜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떠도 리세트가 보는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기숙사 같은데…….

멍멍한 의식 속으로 번뜩 스친 생각에 리세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언제 잠든 거야?”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던 리세트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침대를 벗어났다.

“아가, 너는 정말 잠이 많은 것 같아.”

아기에게 슬쩍 책임을 전가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뛰고 싶었지만 아기도 걱정되고,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라는 아카데미의 교칙이 떠올라 빠르게 걷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쁘면 조금 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시절에도 종종 들곤 했던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방어 계열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건물로 들어온 리세트는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흐트러진 숨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올 무렵에 바쁘게 움직이던 두 다리가 멈추었다.

케서린 로티. 리세트는 그 이름이 보이는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지각생인가 보군요. 어서 들어와요.”

질책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허락을 내렸다. 움찔한 리세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로티 선생님!”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리세트가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

“얼굴을 보아하니 낮잠을 잔 모양이구나. 어렸을 때 버릇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더니, 오늘 같은 날에도 지각을 하고 말이야.”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눈짓한 케서린 로티가 식어 버린 찻잔을 가리켰다. 리세트는 쭈뼛쭈뼛 들어와 그 자리로 가 앉았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지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옆자리에 누군가 풀썩 앉았다.

“괜찮아. 임신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법이거든.”

“밀란 선생님!”

셀번 밀란은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네가 오지 않아서 와 봤더니 아직 로티 선생도 너를 보지 못했다고 하지 뭐니. 어차피 만날 거라면 한 번에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여기서 기다렸어.”

보충 수업이 잡힌 탓에 먼저 자리를 떠난 케서린 로티를 제외하고 두 사람의 티타임이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오니 어떠니? 변한 게 없지?”

“아직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분수대를 제외하면 다른 건 그대로인 것 같아요. 여전히 예뻤어요.”

“분수대? 그건 원래부터 있던 거잖아.”

“커다란 분수대로 바뀌었던데요?”

고개를 갸웃하던 셀번 밀란의 콧잔등이 조금 구겨졌다. 섬세하다고 정평이 난 조각가의 유작인 아름다운 분수대를 제치고 아카데미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흉측한 분수대가 그제야 떠올랐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까먹고 있었네.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가 기부금으로 그런 걸 기증했어. 미관을 해치는 흉물 같아서 나는 별로란다.”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을 공유하는 사이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그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리세트는 조금 망설이던 질문을 꺼냈다.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언제나 궁금한 게 많은 하리펜 학생. 아, 이제는 아니지. 질문은 언제나 좋습니다. 질문하시지요, 델피니움 공작 부인.”

셀번 밀란은 흐뭇한 얼굴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어쩜 어렸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자랐을까. 예뻐라.

“혹시 아이가 자라지 않는 마법을 알고 계신가요?”

“아이? 글쎄……. 그런 건 왜 묻는 거니?”

“그쪽으로 공부를 해 보고 싶어서요.”

“네가, 그런 공부가 하고 싶다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셀번 밀란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가 자라지 않는 마법이라니. 성장을 촉진시켜 주는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는 많지만, 성장을 방해하는 걸 굳이 연구하는 미친 이가 있을까.

이런. 한 사람, 떠오르는 미치광이가 있긴 했다.

셀번 밀란은 그 미치광이의 범주에 어여쁜 제자가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 쓸모없고 극악무도한 마법을 굳이, 만들어 낼 필요는 없지.”

“그 말씀은 아직까지 그런 마법이 연구되지는 않았다는 건가요?”

“내가 알기로는 성공한 사례는 없단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거지요?”

유독 그 마법에 집착하는 제자를 보며 셀번 밀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성장이 느린 아이에 관한 연구가 좋지 않을까? 또래보다 발육이 늦는 아이들은 대개 위축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리세트는 조용히 시선을 내려 찻잔을 바라보았다.

“혹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태어날 아이에 관한 연구는 없나요?”

“태어날 아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눈만 끔뻑이던 셀번 밀란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태어날 아이라니. 설마 엄마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그 작은 생명체를 말하는 건가?

도저히 리세트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오기로 결심을 한 건 그만큼 학업에 대한 열의가 상당하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아기를 품은 채 공부를 이어 가는 건 힘들 터였다.

조급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엄하게 타이르기로 했다. 아끼는 제자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걸 막고 싶었다.

“리세트, 임신한 몸으로 학업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나도 너와 같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니까.”

리세트의 고민을 다 헤아린다고 말하듯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그런 가혹한 마법이라니.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렴. 공부는 아기를 건강하게 출산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선생님께서 나쁜 쪽으로 오해를 하셨구나.

무어라 항변하려던 리세트는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밀란 선생님과 제대로 대화를 이어 가려면 리세트가 간직한 비밀을 반드시 꺼내 놓아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처럼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이고 괜한 걱정만 사게 되겠지. 하지만 비밀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울 터였다.

“네, 그럴게요.”

“너라면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주저하지 말고 말하렴. 너에게 쓰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 ❖ ❖

리세트는 더부룩한 배를 살살 문지르며 건물을 나섰다.

식당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희미하게 음식 냄새가 섞여 있어 헛구역질이 났다. 주먹 쥔 손으로 가슴께를 툭툭 치며 입덧이 가라앉길 기다렸지만 오늘은 꽤 오랫동안 역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식당에서 나오던 학생들은 흘끔흘끔 리세트를 살피며 걸음을 늦추었다. 뒤통수가 따가워질 정도라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불현듯 리세트가 몸을 틀자 학생들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바쁘게 옮겨 달아났다. 이번에는 반대로 리세트가 그들을 오랫동안 쏘아보았다. 그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다 더욱 크게 놀랄 정도로.

그사이 식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럿이 모인 학생들과 음식 냄새가 훅 리세트의 등 뒤로 끼쳐 들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리세트는 잰걸음으로 식당 건물에서 벗어나 숲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외곽으로 향했다. 건물을 통해 이동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만 이렇게 빙 돌아가야 마음이 편안했다. 비록 다리는 퉁퉁 부어 잠에 들 때까지 괴롭겠지만.

나무를 스쳐 오는 청명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난 땀방울을 식혀 주었다. 한참을 서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아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급하게 먹었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던 시선이 어찌나 따갑던지. 학생들은 혼자 앉은 리세트를 구경거리인 양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행여 누군가 말이라도 걸까 싶어 리세트는 식사를 마친 후 허겁지겁 그 자리를 뛰쳐나온 참이었다.

요한 델피니움 공작. 리세트 하리펜. 유산. 불화설. 임신.

어느 건물을 지나와도 리세트를 둘러싼 많은 말들이 온갖 곳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요한과 함께 있을 때면 아카데미의 온 세상이 조용했는데 지금은 상점가의 한복판처럼 시끄러웠다. 별의별 소문을 떠들어 대다가도 요한을 발견하면 입을 꾹 다물어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이 이제는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보겠다는 심산인지 보란 듯이 목청을 드높였다.

옛날이었으면 당장 싸우러 달려갔겠지만 지금은 소중한 아기가 있다.

아기에게 예쁜 것만 보여 주고 싶고 좋은 말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이 아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테니까.

“앞으로 식사는 기숙사에서 하자. 물론 엄마가 제일 편하겠지만 너한테도 그게 더 좋을 거야.”

수업을 들을 건물과 기숙사는 멀리 떨어진 감이 있지만 오늘 같은 불편한 식사 시간을 견디는 것보다는 다리가 아픈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리세트는 조용한 도서관 건물로 들어오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험 기간이 아니라 열람실은 물론 책장이 늘어선 곳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문이 열려 있는 사서실에서도 희미한 불빛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종이 특유의 냄새는 역하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책상에 규칙적으로 비치된 잉크병에서 풍겨 오는 냄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러 책장을 둘러본 끝에 리세트는 원하는 책을 몇 권 골라 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조사도 시급하지만 일단은 아기의 일이 먼저였다.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조금도 자라나지 않던,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성장을 시작한 아기.

요한. 우리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리세트는 임신과 관련된 마법 서적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저녁달이 하늘 위로 높게 떠오를 무렵까지도 팔랑팔랑,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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