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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3)화 (13/151)

13화
내 아이가 아니야

배정받은 기숙사의 방문 앞에 명패가 걸려 있었다.

리세트 델피니움.

그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 리세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려 있던 창문으로 들어온 눅눅한 바람이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아가, 어때? 마음에 들어?”

문을 굳게 걸어 닫고 신중하게 한 걸음씩 움직이던 리세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가 아카데미에 처음 왔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쭉 사용했던 방이야. 그때는 굉장히 커 보였는데 지금은 아담해 보인다. 아마 너한테는 엄청 커 보이겠지?”

창틀에 살며시 걸터앉으니 배시시 웃음이 났다. 마음을 가득 채운 걱정과 불안이 추억이라는 이름을 빌려 조금이지만 옅어졌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예뻤어. 엄마는 자주 앉아서 교정을 내려다보곤 했는데 겁쟁이 아빠는 위험하다고 매일 툴툴거렸어.”

아늑한 꿈처럼 찾아드는 바람의 감촉을 리세트는 눈을 감고 느껴 보았다. 귓가를 스친 바람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엄마와 함께 앉게 되었지만.”

손을 꼭 붙잡고 나란히 앉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속에서 이 바람을 닮은 구름이 떠다니는 듯했다.

어느 날은 맑은 하늘을, 또 다른 날은 어두운 밤하늘을, 눈이 오고 비가 내리는 다채로운 하늘을 함께 손을 잡고 올려다보았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소중했다. 아마 영원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테지.

리세트는 지금은 텅 빈 옆자리를 손끝으로 가만가만 쓸어 보았다.

리세트의 손을 잡아 주었던 소년은 조금 더 자라난 후에는 품에 그녀를 안은 채로 느긋하게 풍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리세트의 머리카락 끝을 감아쥐어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어깨와 허리를 단단히 감싸기도, 고개를 내려 어깨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완전히 여물지 않은 팔과 다리의 감촉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빠가 참 잘 자랐네. 그렇지?”

괜히 부끄러워진 리세트는 가볍게 창틀에서 내려섰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방이 조금 바뀌었네.”

책상과 의자, 옷을 걸어 놓을 수 있는 간이 옷장을 지난 시선이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리세트는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조금 낯선 가구들로 채워진 방 안에는 눈에 익은 것이 존재하긴 했다. 처음 누워 봤을 때 너무 푹신해서 바닥으로 꺼지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침대가 유일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대에 몸을 누인 리세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배를 어루만졌다.

“아가, 너도 잘 자라고 있는 거지?”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지고 피곤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전에 없던 증상은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처음 임신을 확인해 준 주치의가 예견해 준 증상들이었으니까.

우리 아가, 더디지만 조금씩 자라나고 있구나. 다행이야.

“그동안은 왜 자라지 않았어? 엄마는 네가 사라져 버린 줄 알고 너무 슬펐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이곳에서는 마음껏 내보일 수 있었다. 함께 고민해 준 아트반에게는 미안하지만 혼자인 지금이 훨씬 마음은 편했다.

“이러다 갑자기 막 자라나서 나오고 싶다고 하면 안 돼. 알겠지?”

원래대로라면 아이는 넉 달 뒤에는 세상에 나와야 했다. 하지만 임신 초기라 단언한 후작저의 주치의의 말처럼 아이는 이제야 자라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너는 왜 더디게 자라는 걸까.

당장 해소되지 않을 의문이 머릿속을 채워 갈 무렵에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잠기운이 두 눈 가득 스며들었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움직일까?”

밀란 선생님, 로티 선생님도 만나야 하고, 식사도 해야 하고.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던 의식 속으로도 잠기운이 번졌다. 스르르 눈을 감은 작은 얼굴 위로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 ❖ ❖

로드니는 조금은 안도한 얼굴로 공작을 살폈다.

공작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거나 눈을 감아 현실에서 도피하던, 까마득히 위태로운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심란한 쪽은 로드니였다.

마님께서 유산을 겪으시고 다시 임신을 하셨다 하였지. 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받을 일이었지만 로드니는 마음껏 그러한 감정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바로 그의 눈앞에 제 아이를 죽이라 명했던 남자가 있다. 일말의 망설임도 깃들지 않은 그 냉혹한 눈빛이 떠올라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로지 완벽한 후계자를 보겠다는 집념으로 광기처럼 몰아치던 선대 공작의 눈과 결코 자신의 피를 이을 후계자를 용납하지 않는 현 델피니움 공작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원인은 정반대였지만 둘 모두 어느 한 곳에 미쳐 있다는 점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리세트 주변에 사람을 붙여. 믿을 만한 자로.”

상념에 젖어 들던 로드니는 조금 늦게 공작의 명령을 이해했다. 공작이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넘어가기 힘들었다.

“마님을 감시하라는 말씀입니까?”

“리세트가 무엇을 하든 나에게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어. 그냥, 리세트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들만 살피면 돼. 누구를 만나는지, 그것만 알아 와.”

“……알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명을 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드니는 늘 하던 대로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충직한 답변을 전했다.

“주인님.”

망설이던 로드니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공작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곧 태어나실 아기님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님이 다시 임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애써 미뤄 온 문제였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확답을 들어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또 여러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

아, 짧게 터져 나온 탄식과 함께 공작은 실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따로 준비해야 할 일은 없을 거야.”

그것이 아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처럼 들려와 로드니는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누구보다 제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는 공작의 입에서 선뜻 저 말이 들려오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공작은 아이를, 제 뒤를 이을 후계자를 포기할지언정 결코 아내를 포기할 남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로드니는 그것만큼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지하실을 개방하실 생각…….”

“그럴 필요 없어.”

요한은 싸늘하게 집사의 말을 자르며 서류를 넘겼다.

“내 아이가 아니야.”

❖ ❖ ❖

“메이 하핀.”

침울한 얼굴로 주방 일을 돕고 있던 메이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집사님?”

조용한 눈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뜻을 보인 로드니는 먼저 몸을 돌려 주방을 벗어났다. 어리둥절한 메이가 하얀 앞치마를 정돈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사용인들이 청소를 마친 오후의 정원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한기가 든 메이는 팔을 연신 문지르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무슨 일 있으세요?”

“메이, 혹시…….”

말끝을 흐린 로드니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언제나 단정한 모습을 보여 왔던 그에게 익숙한 메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님께서는 건강하시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한 로드니의 입에서는 그처럼 실없는 말만 흘러나왔다. 괜히 긴장했다는 듯이 메이는 흘깃 눈을 가늘게 뜨다 싱그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마음과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밝은 웃음소리였다.

“그럼요! 후작저의 주치의께서 얼마나 신경을 써 주셨는데요. 산책하러 많이 가시고 책도 읽으시고, 되게 잘 지내셨어요.”

“그래……. 그렇구나.”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인가요?”

내심 주방 일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겼다는 생각이 들어 메이는 조급하게 질문했다. 긍정의 대답이 들려온다면 바로 주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집사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마님께 따로 편지가 온 적은 없고?”

차마 누군가 찾아오지 않았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로드니가 긴장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는 사이에 메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요?”

곰곰이 생각하던 메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귀부인들께서 괜한 편지를 보냈을까 걱정하시는 거지요?”

한참 잘못 짚은 말이었지만 로드니는 허허허,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편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으니.

“그래.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온 사람은 없었고? 한 번이라도 마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다 알려 주렴. 여인이든 사내든 가리지 말고.”

거짓말로 누군가를 속인다는 죄책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였다. 지금 그의 처지가 그런 것을 가릴 만한 여유가 없었으므로.

“정기적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기는 하지요. 여인도 사내도 있어요.”

결국, 누군가 있기는 한 것인가.

눈을 내리감은 로드니는 노쇠한 심장을 위로했다. 아무렴 조금 전 공작의 집무실보다야 지금 상황이 훨씬 견딜 만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끝마친 상태이니까.

“후작저의 하녀들이 우리 저택의 사용인들만큼이나 신경을 많이 써 주었어요. 얼마나 고맙던지. 제가 나중에 꼭 감사의 편지를 보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요?”

“……사내는?”

말똥말똥 눈을 멀거니 뜬 메이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사내의 정체를 밝혔다.

“크리프 후작 각하시지요.”

그쪽은 이 일과는 무관한 사람일 텐데.

긴 한숨을 흘린 로드니는 더는 캐물을 수가 없어 메이를 그만 보내 주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달아났다.

“설마?”

크리프 후작과 공작 부인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던 로드니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 더 그럴싸했다. 마님과 크리프 후작이라니. 이 무슨 따듯한 아이스크림 같은 소리인지, 원.

문제는 크리프 후작이 아니었다. 마님께 다른 남자의 아이가 생겼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로드니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작이 아닌 다른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 치며 무시했을 거다. 아니지! 감히 우리 마님을 음해하려 한 그 작자를 향해 화를 내며 따져 물었을 터였다.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자신보다 훨씬 젊은 주인의 머릿속이 걱정인 집사의 염려가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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