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2)화 (12/151)

12화
불화설

리세트는 고집스럽게 창밖을 응시했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계속 무시하지는 못했다.

“메이 하핀을 데려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눈이 마주치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건넸다.

“아카데미에 수행인을 데려가는 건 교칙 위반이니까.”

“어길 놈들은 다 어겨. 너도 알잖아.”

제논의 아카데미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적어도 교육의 현장에서만큼은 수행인을 대동하지 말 것. 하지만 그 규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계승되는 마력을 가진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그들 사회에서 사용인의 존재란 공기처럼 당연해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아카데미의 전 과정은 무상으로 진행되지만 그렇기에 더욱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기부금이라는 이름을 빌린 거액의 돈을 지불한 가문의 자제는 기숙사 안에서 버젓이 사용인들을 거느렸다.

기부금의 액수와 가문의 이름. 그것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은 공공연하게 계급이 나뉘어 있었다. 종종 변방의 귀족이나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가문의 자제들이 운 좋게 희소성 있는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금세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평민인 리세트에게는 그곳마저도 천국이었다. 돈이 없어도 마법을 배울 수 있었고 고아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교칙을 어기고 싶지는 않아.”

“이미 모두가 다 하고 있는 걸 네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 애들이랑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요한의 눈동자는 언뜻 차갑게 빛나는 듯했다.

“아니, 달라. 너는 내 의지로, 어쩔 수 없이 사용인을 받아들이는 거니까.”

리세트는 부딪쳐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요한이 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리세트는 혼자 생활하고 싶었다. 그래야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

“보내지 마. 전부 공작저로 다시 돌려보낼 거야.”

“학장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괜찮겠지.”

“기부금을 내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을게.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로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차가 멈추어 섰다.

교칙까지 바꾸어 버릴 생각을 하던 요한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리세트의 눈을 계속 바라보면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니 이것이 최선이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해.”

마차에서 내린 요한이 손을 건넸다. 리세트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서며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어두운 갈색과 농도가 짙은 붉은빛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선 곳 중앙에 분수대가 있었다. 너무 화려하고 커 분수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쨌든 분수대는 분수대였다.

따가운 햇살에 저절로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 순간 새하얀 물줄기가 하늘 높이 뻗어 나갔다.

“원래 이렇게 컸나?”

리세트는 다소 멍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 가문에서 열심히 기부금을 갖다 바쳤겠지.”

요한의 견해에 동의한 리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학생들로 교정이 붐볐다. 두 사람이 가는 길을 터 주기는 했지만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야? 정말 저 여자…… 아니,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아카데미로 돌아온 거야?”

“공작께서 함께 오신 걸 보면 잠시 아카데미를 둘러보러 오신 게 아닐까?”

그들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바로 요한이 절대 놓으려 하지 않는 문제의 그 손이었다.

무더운 여름의 날씨보다 학생들의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져 리세트는 마주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싶었는데 요한의 손가락은 조금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은 좀 놓는 게 어때?”

웃는 얼굴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리세트가 신기한지 요한은 빤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델피니움 공작 각하.”

이번에도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부른 리세트는 조금 어눌한 말투로 강경한 뜻을 내비쳤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봤어요.”

“이대로 손을 놓으면 불화설에 힘을 싣는 거로 보일 텐데.”

요한은 의견을 구하듯 시선을 내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마차에서 내리기 전, 요한은 두 사람을 둘러싼 소문 하나를 알려 주었다.

리세트가 후작저에서 지내는 것을 두고 많은 억측이 쏟아졌다고 했다. 지금은 불화설에 단단히 무게가 실린 상태라고. 그것을 잠재우려면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기에 리세트는 마지못해 요한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이런 거로 불화설을 잠재울 수 있을까. 애초에 나는 정말 그런 걸 위해 이 손을 잡았나.

약간의 후회와 자괴심 사이에서 헤매던 리세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는 요한을 따라 그대로 멈추어 섰다. 반문하듯 바라보자 요한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증인이 많으니 쓸데없는 소문은 금세 사그라지겠지.”

리세트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 예쁜 웃음을 담은 얼굴이 다가왔다. 이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요한의 웃음소리도, 헉하고 탄식을 흘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도 전부 멀게만 느껴졌다.

“그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마음껏 공부하시지요.”

요한은 리세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그만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리세트는 괜스레 간지러운 이마를 문질렀다. 멍하니 고개를 비스듬히 든 리세트의 눈동자에 넝쿨 식물이 외벽을 타고 오른 고즈넉한 건물이 비쳤다. 벌써 기숙사에 도착한 거구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리세트는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지켜본 시선의 정체를 깨닫자 리세트의 얼굴이 화르르 타오르듯이 붉어졌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학생들의 얼굴도 리세트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기숙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처음부터? 아니면 아까 그 부끄러운 장면만 본 건가. 그런 궁금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리세트는 마침내 깨달았다. 학생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리세트는 도망치듯 기숙사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꽤 다급했다.

요한!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리세트는 마지막 층계에 발을 디뎠다.

❖ ❖ ❖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다급하게 강의실로 돌아갔고 어느덧 교정은 텅 비워졌다. 한적한 교정을 거닐며 요한은 천천히 주변을 감상했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만큼 건물 곳곳에서 묻어나는 추억의 흔적이 보였다.

시간이 빠듯해도 점심시간에는 꼭 카페에 가야 한다며 달려가는 리세트, 교칙을 위반해 혼났지만 결국 원하는 케이크를 손에 넣었다고 뿌듯하게 웃는 리세트,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게시판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가던 리세트 하리펜.

이제는 리세트 델피니움이 된 연인의 모습을 요한은 차근차근 되새겨 보았다.

아카데미의 모든 곳에서 리세트의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단 하나의 장면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걸음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시작된 회상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전투 계열의 마력을 지닌 학생들이 교육받는 건물을 빙 돌아가자 요한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우거진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를 알아본 요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따가운 햇살을 가려 주는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에서 리세트를 만났다. 그날도 오늘처럼 더웠나. 그 애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한데 그 외의 모든 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안녕! 혹시…… 나, 기억해? 리세트 하리펜. 그날 내 이름도 알려 줬는데.’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데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요한은 어렵지 않게 그 작은 여자애를 기억해 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은발, 눈물이 가득 고여 있던 초록빛 눈동자, 요한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로 엉엉 울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던 그 여자애. 리세트 하리펜.

설마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요한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여자애가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마법사였나. 잠시 스친 의문도 저 애의 모습처럼 터무니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평민이 마력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꿈인가 싶어 바라보고만 있자 리세트가 다급하게 달려와 말을 쏟아 냈다.

‘네가 나를 구해 줬어. 덕분에 내가 살았어. 이래도 기억이 안 나? 정말?’

기억을 되찾아 주고 싶은지 리세트는 필사적이었다.

그 애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요한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해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세트의 오른쪽 가슴 부분에 새겨진 치유 계열과 방어 계열의 문양을 보자 다시 의문이 찾아들었다. 두 가지 마력을 지녔다니. 역시 꿈인가.

리세트가 하도 열심히 말을 거는 탓에 의문을 되짚어 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조금 더러웠지? 오랫동안 산을 타서 제대로 못 씻었거든. 몬스터를 피해 달아나다가 구르기도 했고……. 아! 내 몸에 흙을 묻히면 기억하려나.’

기억하고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리세트의 동작이 훨씬 빨랐다. 바닥에 깔린 모래를 가득 쥐어 온몸 구석구석 펴 바르고 있는 리세트를 요한은 조금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때? 이제 조금은 기억이 나?’

털썩 그의 옆에 앉은 리세트는 해맑게 웃었다. 깨끗했던 그 애의 옷은 모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괜찮아. 기억 못 해도 돼. 내가 다 기억하거든.’

리세트는 살며시 하늘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내 영웅이야.’

어쩐지 요한은 그 여자애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웅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귓바퀴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종알종알 쉬지 않고 말하는 리세트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요한은 그만 몸을 돌렸다.

추억의 빛깔이 짙어질수록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웃고 떠들며 일상을 공유했던 시간들이 오늘은 유독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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