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1)화 (11/151)

11화
단 하나의 이유

아트반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리세트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향했다.

무슨 짓을 더 저지르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한은 공작저로 돌아갔다. 그래 보아야 몇 시간 뒤 밤이 깊어지면 다시 리세트를 만나러 오겠지만.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아트반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리세트가 방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트반!”

그를 발견한 리세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문득 한기가 든 아트반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요한의 그림자가 있는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다행히 리세트에게 단단히 미친 그 친구는 잘 돌아간 듯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

리세트는 고개를 들어 신중하게 아트반의 얼굴을 살폈다. 새파랗게 멍 든 자국이나 피가 흐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뭐 그렇게 본격적으로 사과를 할 것까지야.”

아트반은 편하게 보시라는 의미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장난을 쳐 볼까. 아프다는 듯 눈을 와락 찡그리자 곧바로 리세트의 반응이 돌아왔다.

“혹시, 맞았어?”

“맞지는 않았고, 맞을 뻔했지. 여차하면…….”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을 수도 있고.

“나중에 요한이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내가 꼭 막아 줄게.”

“…….”

“정말 미안해.”

말이 없는 아트반에게 리세트는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흐음, 낮은 한숨을 흘린 아트반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네가 어떻게 막아 주게. 너 없을 때 나를 괴롭힐 텐데. 우리 델피니움 공께서는 절대 부인께 악랄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을 거거든. 정말 치사하고 못되셨지.”

“치사하고 못된 건 아니지 않아? 화는 당연히 나겠지. 물론 전부 내 탓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내 편은 안 들어 주네. 역시 친구보다는 남편이라는 거지?”

아트반은 한껏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 리세트가 입술을 달싹이며 안절부절못하자 아트반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장난을 끝맺었다.

“몸은 좀 어때? 지금도 괜찮아?”

“응. 잠만 조금 많아진 것 말고는 임신하기 전이랑 크게 다른 건 못 느끼겠어.”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더위에 살짝 지친 분홍빛 뺨을 살핀 아트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혈색도 좋고 체중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뚜렷한 변화가 없는 몸은 그래서 더욱 이상해 보였다.

“꼭 아카데미로 가야겠어? 너의 부탁이니 도와주긴 하겠지만, 나도 요한과 같은 입장이야. 너를 혼자 아카데미로 보내고 싶진 않아.”

“이대로 공작저로 돌아가는 건 무서워서. 어차피 공부는 더 하고 싶었으니까, 이 기회에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고집하고는.”

방으로 들어오자 조금 어두워진 하늘이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아트반은 직접 촛불을 밝혀 주며 리세트를 의자로 이끌었다.

“요한이 아이를 죽이려 하는 이유 말이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이유는 하나뿐인 것 같아.”

아이가 들을까 봐 걱정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아트반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아트반이 건네는 물잔을 받아 들던 리세트의 얼굴 위로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쁜 떨림이었다.

“무조건 이유는 너 하나야.”

“……어떤 근거로?”

“요한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결국 너 하나뿐이니까.”

“아이를 죽이려고 한 게, 나 때문이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 아니면 요한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네가 낳을 너의 아이잖아. 이것 말고는 설명이 안 돼.”

요한이 나 때문에 아기를 죽이려 한다. 리세트가 필사적으로 피해 온,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던 최악의 가정이었다.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릴 것 같아 리세트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잖아, 아트반.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리세트는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주어 꾹 말아 물며 물잔을 움켜쥐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정적 속으로 파고들었다. 억눌러 놓은 서러움을 담은 목소리도 뒤따랐다.

“정말 나를 위했다면 나한테 최소한의 설명은 했어야지. 하지만 요한은…… 나를 속이려고 했어. 나 모르게 아이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그건, 그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안 되는 일이잖아.”

자신의 감정이 지나치게 격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리세트는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차가워진 손끝이 빳빳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리세트, 네가 왜 부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돼. 그래야 방법을 찾을 것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나 때문에 자기 아이를 죽이려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너는 아직 요한을 잘 모르는구나. 너를 위해서라면 제 자식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네 남편이야. 요한에게 너를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리세트에게 상처가 될지 아트반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눈을 가린 채로 진실을 외면하고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아이가 반년 동안 자라지 않았다는 게 너무 이상하잖아. 지금까지는 네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나는 그래서 더 불안하고 무서워.”

❖ ❖ ❖

리세트를 끌어안은 따스한 품은 오늘따라 더 집요했다.

리세트가 살며시 몸을 뒤틀 때마다 그 품의 주인은 빈틈없이 맞붙어 왔다.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자 리세트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파란빛으로 물든 방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요한. 안 자는 거 다 알아.”

할 수 있는 한 가장 냉담한 목소리를 낸 리세트는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야. 만약 입학 신청서를 가로채면 계속 다시 보낼 거야. 나를 받아 줄 때까지.”

이쯤 되면 대답이 들려올 텐데 요한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단히 몸을 감싸 안은 팔이 아니었다면 꼭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리세트는 이제 자신의 의견만 전하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 계획한 대로 공부를 끝마친 뒤에 돌아갈게.”

그러니 요한, 제발 나를 막지 마. 네가 왜 아이를 죽이려는 건지 알아야겠어. 너는 말해 주지 않을 테니 이렇게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잖아.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리세트는 소리 낼 수 없는 비난을 꾹꾹 눌러 담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는데 의식은 점차 또렷해져 갔다. 명료해지는 의식 속으로 요한을 떠나온 시간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어두운 숲을, 그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 몬스터가 출몰했던 곳을 힘겹게 지나고, 멀쩡한 집을 내버려 둔 채 다른 이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그뿐인가. 기어코 자신을 찾아낸 요한에게 해서는 안 될 거짓말까지 했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인지, 이것이 최선이었는지 끊임없이 자책했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리세트는 같은 선택을 되풀이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것이 끔찍이도 슬펐지만 리세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를 불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쿵쿵쿵. 맞닿은 몸에서 울리는 그 낮은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질수록 마음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 ❖ ❖

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 끝내 막을 내렸다. 장장 일주일간 이어진 싸움의 승기를 잡은 리세트는 홀가분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조심히 잘 다녀오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해. 알겠지?”

리세트를 배웅하러 나온 아트반은 끝까지 염려를 떨치지 못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진 것을 보니 잠도 잘 못 이룬 듯했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한 게 많아. 그동안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꼭 작별 인사 같잖아.”

“아카데미에 가면 당분간 자유롭게 볼 수는 없으니까.”

“혹시 다시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아트반은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세트는 그 말의 뜻을 뒤늦게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응. 아니야.”

“그래. 그런데 참…… 안심이 되지는 않네.”

리세트를 아카데미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아트반은 친구라는 이름의 선을 지켰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리세트는 엄연히 델피니움 공작 부인, 요한의 아내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 과하게 친밀해 보이는 장면을 보여 주어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 저 녀석, 저택의 문 앞에 서 있는 요한 델피니움에게는 더더욱.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마무리한 두 사람에게 요한이 성큼 다가왔다.

“가자, 리세트. 이제 출발해야 돼.”

요한은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리세트는 그 손을 잡고 델피니움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푸르른 나무가 흘러가는 창밖으로 어느덧 작은 점처럼 멀어진 아트반과 후작저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쭉 마차가 달리다 보면 아카데미가 보인다. 붉은 건물이 위용을 드러내는 그 아름다운 곳이.

마차가 달려 나가는 길 위로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리세트가 수도로, 아카데미로 오게 된 건 부모님을 여읜 후였다.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향하던 길에 몬스터가 습격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제대로 마법을 써 보기도 전에 부모님을 공격한 몬스터가 어린 리세트까지 덮치려 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흉악하게 생긴 몬스터가 입을 쩍 벌린 채 달려오던 순간, 자신의 앞을 막아선 소년을 리세트는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자신을 지탱해 준 그 손의 온기까지도.

자유자재로 마법을 부렸던 소년이, 자신과 달리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그 힘이 부러워 무작정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는 마법사를 길러 내는 아카데미가 있다고, 부모님께서 미안하다는 듯 말씀하곤 하셨으니까.

몰래 고아원을 빠져나가 짐마차를 얻어 타고 아카데미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요한을 만났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생명의 은인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무시와 냉대로 익숙해진 그곳에서 요한은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영웅이라 여겼던 소년이 지금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리세트는 언제나 그랬듯 파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서늘했던 저 눈동자에 언제부터 따스한 온기가 담기기 시작했나.

갑자기 시작된 의문을 떨치듯 리세트는 품에 안고 있는 입학 허가서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