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0)화 (10/151)

10화
임신 초기

리세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편지를 보낼 것. 그녀를 그리워하는 하녀에게 요한이 내건 조건이었다.

집무실로 들어온 요한을 반겨 준 건 그 하녀의 편지였다.

편지를 살펴 내려가는 시선은 신중하게 이어졌고, 로드니는 숨을 죽인 채 그런 공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의가 한창인 와중에 편지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온 공작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내에게 맹목적인 공작임을 잘 알지만, 그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로드니는 그런 공작의 모습이 아직도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공작저로 친구를 데려와 방학 동안 함께 머물겠다고 선언한 어린 공작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공작이 아내에게 미친 건 어쩌면 아주 어렸을 적부터일지도.

아련한 과거를 되짚어 보는 로드니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떠오르려던 찰나였다.

“주인님?”

갑자기 벌떡 일어선 공작이 윗옷을 챙기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크리프 후작저의 방향인 듯 보였다.

“후작저에 다녀올 거야.”

“지금, 말씀이십니까?”

공작은 대답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갔다. 닫힌 문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로드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구겨졌다.

“회의는 어쩌시고요.”

공작에게 닿지 못한 말이 집무실을 외롭게 떠돌았다.

❖ ❖ ❖

밤에만 찾아오는 요한이 석양이 질 무렵에 나타났다.

침대머리에 기댄 채로 아기에게 말을 건네던 리세트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로 가겠다고?”

메이가 바쁘게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문득 배신감이 느껴진 리세트는 하녀가 있을 문 너머를 쏘아보았다.

“집으로 가.”

리세트의 뺨을 감싸 제게로 시선을 끌어온 요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에게 다 듣고 온 거 아니야? 나 아카데미로 갈 거야. 가서 공부도 더 하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교육자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카데미는 집에서도 충분히 다닐 수 있어.”

“기숙사로 갈 거야.”

요한은 고집스럽게 앙다문 리세트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이 아버지가 그곳에 있어? 그래서 아카데미로 가려는 거야?

입 안에서만 맴도는 질문을 삼키며 요한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불을 움켜쥔 손의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지기만 할 뿐 요한의 표정은 심연처럼 잠잠했다.

“너와 아이를 생각해.”

“나와, 아이?”

“유산을 하고, 다시 임신을 하고. 지금 네 몸은 결코 안정적이지 못해. 너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왜?”

미움과 원망이 담긴 음성이 요한의 말을 잘랐다.

“우리 아기는 한 번도 걱정해 주지 않았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아빠 노릇을 해?”

요한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붉어진 눈시울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리세트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남의 아이는 이렇게 걱정하면서!”

“남의 아이이기 전에 너의 아이야. 내가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전에도 내 아이였어. 우리의 아이였다고!”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이불 위로 툭 떨어진 눈물 자국을 지난 그의 눈동자가 다시 리세트를 담았다.

“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아카데미는 그 후에 다시 얘기해.”

“내 상태가 그렇게 걱정되면 후작저의 주치의를 만나 봐. 그거로 충분할 테니까.”

“충분하지 않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끝낸 건 경쾌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아트반 크리프였다.

“요한,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너랑 할 얘기 없어. 나가.”

차갑게 그를 일별한 요한의 눈길은 다시 리세트에게 돌아왔다.

“나야말로 너랑 할 얘기 없어, 요한. 내 몸이 걱정된다면 후작저의 주치의를 만나. 아카데미에 관한 일도 너와 상의하고 싶지 않아. 이미 가기로 결정했고, 입학 신청서도 제출했어.”

리세트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입학 신청서 같은 건 내 선에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어. 고집부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와. 그러면 보내 줄게.”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잖아!”

“이유가 뭐야. 제대로 말해.”

“다시 공부하고 싶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요한은 샅샅이 파고들듯 가늘게 뜬 눈으로 리세트의 반응을 모조리 살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눈동자를, 결국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는 리세트를.

“공작저는 싫고, 후작저는 괜한 소문을 끌어들인다는 걸 알았겠지. 그래서 선택한 곳이 아카데미인 거고.”

“억측하지 마. 공부가 더 하고 싶어져서 가는 것뿐이니까.”

“억측이라……. 그런데 어떡하지? 지금 네 말을, 나는 조금도 믿어 줄 수가 없는데.”

미세한 틈도 생기지 않는 날카로운 대화가 이어질 동안 아트반은 그저 탄식을 흘리며 지켜보았다. 저 싸움에 괜히 끼어들어 수명을 깎아 먹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예전에는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붙어 있더니, 지금은 마주치기만 해도 싸우는 이 골칫덩어리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두면 오늘 안에 끝이 안 날 듯싶었다. 아트반은 리세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요한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트반.”

리세트가 부르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요한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하여튼 유치한 질투심은 여전하기도 하시지.

“잠시 요한을 데려갈게. 아무래도 우리 아이한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너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리세트.”

다행히 요한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어쩌면 이 싸움을 중재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노을빛이 비쳐 드는 긴 복도를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쯧쯧 혀를 찬 아트반이 불편한 침묵을 깨트렸다.

“너희는 어떻게 만나기만 하면 싸워?”

“작작 해.”

저 살벌한 눈초리를 리세트가 봤어야 하는 건데.

아트반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자신을 죽일 듯이 바라보는 얼굴 앞에서 괜한 객기를 부리지는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은 소중하니까.

“너무 그렇게 째려보지 말아 줄래? 좋은 일 하러 가는 건데 마음이 바뀌려고 하네.”

“네가 리세트를 말려.”

“너도 못 말리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아트반은 천하의 둘도 없는 멍청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요한을 응시했다. 본인도 못 하는 걸 왜 나에게 떠넘기나. 이런 제안은 극구 사양이었다.

“리세트가 순순히 고집을 꺾을 사람인가. 그냥 보내 주지 그래.”

“장난은 그쯤 해.”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이게 장난으로 보여?”

제 주변을 휘감기 시작한 파란빛의 마력을 보며 아트반은 손을 휘휘 저었다.

“하여튼 이런 걸 보면 천생연분이라니까.”

원하는 바가 있으면 꼭 이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망할 부부. 아트반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일단 이 무시무시한 마법진부터 치우고 얌전히 따라오시지요, 델피니움 공.”

❖ ❖ ❖

응접실로 들어선 요한은 낯선 이를 마주했다.

“기억 못 하나? 하긴 네가 리세트 말고 관심 있는 게 있어야지. 리세트가 아주 건강한 상태라는 걸 보증해 줄 우리 가문의 주치의.”

아트반의 소개와 함께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후작저의 주치의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지? 이미 리세트와 말을 맞추었을 텐데.”

“우리가 쌓아 온 신뢰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두 사람은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공작저의 주치의가 리세트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공작저의 주치의야말로 믿을 수 없는데? 그쪽은 너와 입을 맞추었을지도 모르잖아. 마님의 몸은 상당히 약해지셔서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이럴 것 같은데?”

“어쨌든. 이쪽은 믿을 수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 방법이 하나 있네.”

아트반은 주의를 환기하듯 손뼉을 한 번 크게 쳤다.

“리세트를 직접 공작저로 끌고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할 수 있다면 말이야.”

“…….”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굳이 감행하는 아빠라니. 그 가문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를 미워하게 되겠어.”

무의미한 대치 상태가 길어질 것 같아 주치의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기로 했다. 응접실을 채워 가는 두 개의 마력에 질식해 죽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주치의는 자신을 쳐다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의사로서 본분을 다했다.

“지극히 안정적인 상태이십니다.”

당연한 사실을 고한 것뿐인데도 공작의 얼굴을 더는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흘러가는 정적 속으로 그의 한숨이 흘러들기 직전에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리세트를 오랜 시간 봐 온 것도 아닌데, 리세트의 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냔 말이야.”

“알고 지낸 시간은 의사인 제 소견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기준으로만 보아도 공작 부인은 상당히 건강한 축이십니다.”

공작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다는 듯 치켜 올라가자 그는 조금 주저하다 마지막 당부를 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말은 꼭 전해야 하기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지요.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일만큼은 없어야 합니다.”

마지막 말은 목숨을 걸고 전했다.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일.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작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임신 초기.”

반박의 말이 들려올 줄 알았던 주치의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번뜩 스친 생각에 그는 온화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런, 제가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고 말았군요.”

이 냉혈한 같은 공작이 벌써 아버지가 되었다니.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저택의 문을 넘어오던 어린아이가 지금은 아버지가 될 날을 앞둔 사내가 되었다니.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은 그의 눈가에 인자한 웃음이 번졌다.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비록 한 번의 유산을 겪은 뒤라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과한 걱정은 공작 부인을 힘들게 한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공작을 위해 그는 늦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공작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안도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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