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9)화 (9/151)

9화
뜻밖의 선물

침대에 누워 햇빛으로 물든 천장을 바라보던 리세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온기가 느껴질 것만 같은 옆자리를 손으로 훑어 보고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기도 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요한이 있는 것만 같아서.

홀로 어두운 숲을 떠돌다 후작저에 몸을 숨기고, 매일 들키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던 시간이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가, 잘 잤어?”

리세트는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오랫동안 잠을 자도 몸이 개운하지 않고 의식은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몽롱했던 시간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조금 아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몸이 근래에는 나날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배를 만지던 손을 내려 리세트는 포근한 이불을 꾹꾹 눌렀다.

“사실 엄마는 아빠가 굉장히 보고 싶었나 봐.”

의식을 거치지 않은 말에 리세트는 잠시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맞아……. 너무, 보고 싶었어.”

소리 내어 말해 보니 목이 꽉 막혀 오는 듯했다.

요한이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달려가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요한을 떠나온 순간부터 늘 그랬다. 아기가 태어나 커 가는 걸 본다고 해도 어쩌면 그날의 선택을 계속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돌아갈까. 어느 날은 그런 충동이 머리를 지배하기도 했다.

안 돼.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겠다고 했잖아.

마음이 한없이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끊임없이 그 말을 되새겼다.

공작저를 떠나던 순간에도 꿋꿋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았건만. 어째서 지금은 이리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걸까.

“잘 잤어?”

깜짝 놀란 리세트가 고개를 돌리자 문에 기대서 있던 아트반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야? 노크도 여러 번 했는데.”

“아직 잠이 덜 깼나 봐.”

“요한은 어제도 왔다 간 거지?”

“……응.”

“하여튼 요란한 사랑이야.”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트반은 진심을 듬뿍 담아 말했다. 요한 델피니움의 사랑 앞에는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따를 것 같았다. 이를테면 미쳤다거나, 미쳤다거나, 미쳤다는 것 같은.

약혼자도 없는 미혼인 후작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들이신지.

부부가 돌아가면서 거짓말을 시키질 않나, 이제는 버젓이 제집에서 함께 잠까지 자고 있었다. 리세트의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 합하면 셋. 세 명의 델피니움 때문에 요즘 그의 인생이 아주 복잡하게 꼬이고 있었다.

나중에 이 바보 같은 부부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날에는 그간 받은 설움을 한꺼번에 터트리고 마리라. 아트반은 마음속으로 조그마한 열망을 키웠다.

침대가로 다가온 그가 살며시 시선을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임시 아빠는 이만 일하러 가 볼게.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 엄마도, 아가도.”

실없는 말을 남긴 그가 방을 나섰고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조용하게 머무른 사용인들은 식사가 끝나자 소리 없이 떠나갔다.

정적과 함께 괜한 상념이 다시 찾아들까 싶어 리세트는 온실로 향했다.

“우리도 아빠한테 새를 키우자고 할까?”

리세트는 어느새 자신의 곁을 익숙하게 맴도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공작저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온실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새하얗고 정교한 무늬로 빚어진 분수대와 향기로운 꽃, 그곳을 노니는 아름다운 작은 새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함께하는 우리들. 다정하게, 매일매일 행복하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아직 한참 먼 미래의 일을 조금 더 자세하게 그려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이 이상은 무리였다.

우리 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는데. 언제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리세트의 상념이 깊어지던 무렵에 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마님! 저 왔어요!”

새의 둥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리세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운 얼굴이 양손 가득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리세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 ❖ ❖

“메이!”

메이 하핀은 리세트의 친구이자 수행 하녀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사람이었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얼마간 말없이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정말 너무하세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에게 미리……!”

차마 유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한 메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리세트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요한의 말을 기억해 냈다.

선물을 보내 준다고 했지. 설마 그 선물이 사람, 그것도 메이일 줄은 몰랐다.

“저한테는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런 힘든 일을 왜 마님 혼자 견디세요!”

속에서 무언가가 북받치는지 그녀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다 입술을 꾹 물기도 하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연신 닦아 냈다. 리세트는 조용히 메이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마님께서 없으시니까 너무 삭막하고 무서워요.”

상상만으로도 오한이 든 메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없는 공작의 얼굴이 불쑥 떠오른 탓이었다.

“저는 주인님께서 미치신 줄 알았어요.”

리세트의 한 손을 단단히 움켜쥔 채로 메이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식사를 거르시는 게 하루 일과에 당당히 들어가 있었을걸요? 새벽에 나가서 새벽쯤에 돌아오시고, 매일 눈은 치켜뜨고 계시고. 웃지도 화내지도 않으셔서 정말 미치신 줄만 알았어요. 사람이 어쩜 그리 감정이 없으실 수 있지요? 무슨, 괴물도 아니고…….”

너무 흉을 본 건가 싶어 메이는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 괜찮기는 해요. 물론 마님이 계실 때만큼은 아니지만.”

메이는 꾸역꾸역 차오르는 눈물을 내리누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바보처럼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어 이곳으로 온 것이니까.

“마님께서는 언제쯤 공작저로 돌아가실 생각이세요?”

“……글쎄. 잘 모르겠어.”

마님께서 모르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엉엉 울고 싶어진 메이는 어젯밤 자신을 호출했던 공작의 말을 되새겼다. 마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꼭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셨지. 마님께서 치료받길 거부하신다고.

그게 정말 마님의 건강 때문인지 주인님의 사심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메이는 어서 마님과 함께 안전한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단 테먼 씨를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후작저의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았어.”

“그래도 마님을 오랫동안 지켜본 테먼 씨가 훨씬 낫지요!”

리세트는 조용한 웃음으로 완강한 거부의 뜻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면 주치의는 그 모든 걸 요한에게 말해 줄 터였다. 그러다 만약 그의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테먼 씨가 마님께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없어. 아이를 잃었다는 걸 다시 확인받고 싶지 않은가 봐.”

“마님…….”

효과적으로 메이의 의지를 꺾은 리세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리세트는 창문을 짚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달이 하늘 높이 떠오르면 당연하다는 듯이 더 크고 무거운 상념도 함께 찾아왔다.

다시 도망친다는 건 계획에서 배제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국경이든 어디서든 잡힐 것이 뻔하고, 만약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요한의 감시가 더욱 철저해질 테니.

지금껏 요한이 온 인내심을 끌어모아 참아 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리세트의 반항쯤은 단숨에 제압해 공작저로 끌고 갈 수도 있지만 요한은 기다리고 있었다. 리세트가 스스로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공작저로, 요한에게 돌아가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선택이겠지.

요한에게는 아트반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해 두었으니 당장 아기에게 해가 될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친구의 아이를 제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그 단호한 얼굴 어디에서도 거짓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된 거짓말이 계속 불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점점 힘이 들었지만 가장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아기가 무사히 태어난다고 해도 요한을 닮으면, 그 마력을 물려받으면 어떡하지. 당연한 수순으로 거짓말이 발각될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된 요한이 아기를 살려 둘까?

아니. 어떻게든 죽이려 하겠지.

암담한 미래만 그려졌다. 까마득한 절벽 끝에 서 온몸으로 바람을 견뎌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기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숨을 쉬고 웃고 말을 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걸 요한에게 보이게 될 날만을 기다리려고 했지만…… 이제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는 내 아이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어.’

결혼을 약속했을 때, 요한이 해 주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델피니움의 후계자가 될 아이는 결코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지.

아이를 만든다는 말이 너무나 꺼림칙해서 더 물어봤지만 요한은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사과만 거듭 들려줄 뿐이었다.

대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애써 깊숙이 묻어 놓은 의문점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고심하던 끝에 리세트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기적과 마법뿐이다.

어느 가문보다도 역사가 깊고 손이 귀한 델피니움 공작가. 각 귀족 가문마다 존재하는 비전 마법. 혹시 그게 이 일을 해결할 열쇠이지 않을까.

요한은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지만 리세트를 안을 때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간단하고 정확한 방법은 당연히 요한에게 묻는 것이지만, 리세트를 속이려고 결심한 이상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신뢰할 수는 없었다. 비전 마법이라면 아트반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아카데미.”

마법에 관한 일을 조사하려면 아카데미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후계자에게만 전승되는 비전 마법이니 비밀을 완전히 파헤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실마리라도 발견할지 모른다.

요한에게 벗어나 편안하게 숨을 수 있는 곳, 사교계 귀족들의 괜한 억측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곳으로 아카데미는 훌륭히 그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결심이 선 리세트는 바로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후작의 집무실, 아트반이 있는 곳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