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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화 (8/151)

8화
다시, 내 곁으로

리세트의 침실로 들어온 요한은 창가로 다가갔다.

평소에는 눈길조차 던진 적 없던 서편 너머를 배회하는 시선에서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곳에 리세트가 있으니까.

요한은 끝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리세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듯한 리세트와 시선을 맞추자 그 결심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리세트를 계속 아트반 크리프 곁에 둘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언젠가 다시 데려와야지.

다시, 내 곁으로.

굳은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아이가 생겨난 걸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멋대로 찾아와 결국 죽어 버린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요한, 우리 아이야.’

벅찬 기대와 숨기지 못한 초조함을 담은 초록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래서 더욱 미안했던 그 아름다운 빛깔을 간직한 눈동자.

‘나도 믿기지 않아. 하지만 우리에게 찾아온, 우리 아이야. 정말이야.’

리세트에게는 기적이었지만 요한에게는 이 세상 가장 두려운 불행의 씨앗이었다. 델피니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결국 그 정도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제 아이라는 것은 그 견해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요한은 미지근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내리감았다.

리세트가 떠올랐다. 아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납작한 배를 가만히 감싸 안은 리세트가, 행복에 겨워 입을 맞추어 주던 그 순간이 너무나 아름다워 영원히 그날을 잊을 수 없겠지.

그리고 그건, 나는 평생 가져서는 안 될 미소겠지.

리세트의 향기가 사라진 침실은 싸늘한 공기만 맴도는 듯했다. 무더운 계절의 변화 같은 건 조금도 스며들지 못했다.

침대에 몸을 누인 요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대체 누구이기에 너와 아트반이 그토록 감싸는 걸까.

얼굴도 이름도, 심지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남자를 향한 분노. 그리고 그 맹렬한 분노를 태우고 난 뒤의 허탈함. 저 스스로도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 변화에 요한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자신은 줄 수 없고 주어서도 안 되지만, 그 남자에게는 허락된 행복의 시간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래도 괜찮다. 그에게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수히 많았다.

저주스럽지만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 이름과 가문의 영광, 재물. 그 모든 것을 리세트의 아이에게 주고, 사랑할 것이다. 리세트가 평생 아이의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의 형체를 그리는 것처럼 요한은 팔을 뻗어 리세트가 눕곤 했던 자리를 매만졌다.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피로감이 뒤늦게 몰려왔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 ❖ ❖

티파티가 한창인 어느 가문의 정원이 새로운 주제로 떠들썩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세상에, 그 불쌍한 고아가 유산을 했다지 뭐예요?”

전후의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가문에 보탬이 될지 치열하게 논의하던 귀부인들은 선뜻 그 대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래서 요양을 핑계 삼아 영지로 내려갔나 봐요. 괜히 떠들썩할 거라는 걸 다 알고 피신한 것이겠지요?”

“그러면 뭐 하나요. 어차피 다 알려질 일인 것을요.”

“델피니움 공작가의 꼴만 우스워졌네요.”

한 귀부인에게서 시작된 말을 이어받은 또 다른 귀부인들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바로 또 임신을 하다니. 금슬이 참 좋네요. 하긴, 그러니 그런 근본 없는 여자를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힌 것이겠지만.”

“이번 대의 델피니움 공작께서는 후계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비록 천한 핏줄이 섞이게 되겠지만 그 유구한 이름이 어디 쉽게 더럽혀질 이름인가요?”

“이래서 오래 살고 봐야 해요. 자식 혼사까지 제대로 끝낸 후 죽어야 여한이 없지요. 선대 델피니움 공작께서도 지금쯤 하늘에서 가슴을 치고 있을걸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귀부인들은 넓은 티 테이블의 화제를 하나로 고정했다. 리세트 하리펜, 거슬리는 그 이름이 그녀들의 먹잇감이었다.

“유산을 하고, 다시 임신을 하고. 그런 건 다 차치하더라도 참 이상하지 않나요?”

누군가 던진 악의적인 궁금증을 다른 귀부인이 받았다.

“아무래도 이상하지요.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텐데, 남편의 곁도 아니고 크리프 후작저에서 지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크리프 후작의 이름이 거론되자 한 귀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

“원래 유명했잖아요. 델피니움 공작과 크리프 후작 사이에 낀 예쁘장한 고아. 셋이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워낙 막역한 사이이니, 그곳으로 요양을 하러 갔을지도요.”

자신의 딸아이에게 크리프 후작 부인의 칭호를 주고 싶었던 그녀는 그 이름에 흠집이 나지 않게 신중을 기했다. 한 번도 더러운 추문에 얽힌 적 없던 후작을 잘 아는 귀부인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화제를 돌렸다.

“인정할 수 없는 공작 부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아주 우수한 마법사인 건 맞잖아요?”

“학업 성적이 우수하면 뭐 하나요. 막상 실전에 나가서는 짐만 됐다는걸요.”

“어머, 정말인가요?”

“공작 부인께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델피니움 공작이 부인의 일까지 직접 처리했다. 이 소문,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파다하지요.”

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은 그녀가 제게 집중된 수많은 눈동자를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참 운이 좋아요. 결국 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역으로 이름을 올리고, 결혼을 해 공작 부인이 되고, 이제는 후계자가 될 아이까지 가졌잖아요?”

“손이 귀한 가문의 후계자를 하나도 아니고 벌써 둘씩이나 가졌으니 여러모로 운 하나는 타고났다고 봐야겠지요.”

“그 가문은 대부분 첫 아이가 마력을 계승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번 변수는 어떤 일을 몰고 올지 기대되지 않나요?”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졌다. 리세트 하리펜에서 델피니움의 영광된 이름을 이어받을 그 아이에게로.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기적이라 불리는 사람과 축복이라 불렸던 사람의 아이니 말이에요.”

❖ ❖ ❖

커튼을 열어 둔 창가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방 안을 밝힌 촛불의 그림자가 불어오는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리세트는 이불을 조금 더 올려 덮었다. 아무리 바람이 많이 불어온다고 해도 추위를 느낄 수 없는 계절이지만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몸을 더 웅크렸다.

답답했지만 이불 속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네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매일 너를 보러 올게.’

요한은 저 혼자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 낼 심산인지 밤마다 찾아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찾아와서 특별한 일을 하다 가는 건 아니었다. 리세트는 눈을 꼭 감은 채로 그를 무시했고, 요한은 그런 리세트를 품에 안은 채로 머무르다 날이 밝으면 사라져 버렸다.

밥은 잘 먹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요한은 가끔 그런 질문들을 건네곤 했지만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일방적인 질문과 일방적인 무시 속에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리세트가 한숨을 뱉어 내던 순간 황금빛으로 일렁이던 촛불의 빛깔이 바뀌었다. 선명한 파란빛으로, 요한을 닮은 색으로. 요한이 곧 이곳에 당도한다는, 이미 지척에 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리는 신호였다.

방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흔들었다. 리세트는 흠칫 몸을 굳히며 눈을 꼭 감았다.

“나 왔어.”

대답하지 않는 리세트의 등 뒤로 단단한 몸이 붙어 왔다. 어깨를 감싸 안는 손에는 부드러운 힘이 실려 있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

그 뒤로는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리세트가 이제 막 안심하려던 찰나에 요한이 피식 웃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웃음인지 몰라 다시 긴장하게 된 리세트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쥔 리세트의 손을 커다란 손이 덮었다. 요한은 한 번 힘주어 잡은 후 곧바로 손을 풀어 주었다.

“조금 더 시간을 줄게. 잘 생각해 봐.”

그가 자세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의 요지는 간명했다. 언제 공작저로,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너와 아기에게 좋지 않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고저 없는 목소리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나는 너의 아이를 사생아라는 이름에 묶어 키우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 입에 네가 오르내리는 것도 싫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에 리세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났구나.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할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어. 수도에 있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알아. 그래서 곧 떠날 생각이고.”

“크리프의 영지로 갈 생각이야?”

“그건…….”

요한은 고개를 돌리는 리세트의 머리카락 끝을 느슨하게 감아쥐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아트반 크리프가 끝까지 너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라도 했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어조는 언뜻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를, 아트반 크리프가 끝까지 지켜 줄 수 있을까?”

리세트를 따라 몸을 세운 요한은 고집스럽게 시선을 맞추지 않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자 어렵지 않게 시선을 끌어올 수 있었다.

“나한테서 너를, 빼앗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요한의 눈길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위에서 멈추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지. 요한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대답하지 않는 리세트와 다시 시선을 맞춘 요한은 이만 몸을 돌려 세웠다.

“오늘은 그만 갈게.”

방을 나서기 전, 요한은 마지막으로 리세트를 돌아보았다. 리세트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이 아니었다면 인형처럼 보일 듯했다.

“얼굴을 봤으니 내일은 선물을 보내 줄게.”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까지 멀어졌을 무렵에 리세트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배를 감싸 안았다. 크게 들썩이던 가슴이 점차 진정되어 갔을 때 방 안을 비추던 파란 불빛이 사라졌다.

요한이 후작저를 완전히 벗어났구나. 오늘은 그만 돌아간 거야.

리세트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넓은 침대가 지나치게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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