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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화 (7/151)

7화
내 곁에서, 내 품 안에서, 내 눈이 닿는 곳에서

아트반은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흘러 리세트가 제자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면, 그때는 요한에게 무릎이라도 꿇어 용서를 빌 생각이었다. 너를 속이고 리세트 숨겨 주어 미안하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죄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또다시 요한을 기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리세트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라니.

요한이 후작저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이 때문에 이토록 길을 헤매는 것이 마음 아팠고, 어쩌면 리세트의 오해로 이 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요한이 설마…….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저 혼자만의 아이라면, 미친 망상이지만 정말 그렇다면 요한이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세트의 아이를, 요한이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그러니 어서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오해를 풀어 주어야지. 그리고 웃으면서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지내야지. 친구이자 동료. 우리는 오랜 시간 그런 관계를 맺어 왔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결심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을 때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죽었느냐 묻던 요한의 목소리는 절대 아버지의 것일 수가 없었다. 리세트의 말대로 너는 아이가 죽기를 바랐구나.

리세트가 요한에게 숨기기로 마음먹었다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줄 대역이 필요했다.

비밀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잘 지켜지기 마련이다. 다른 누군가를 대역으로 세우는 것보다는 그가 나서는 편이 나을 터였다. 겁 없이 요한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기도 했다.

“아이 아빠가, 너라고?”

반문하는 요한의 어조는 차분했다.

“……응.”

“아아, 그래?”

너무도 선선한 반응에 아트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느리게 멀어진 요한의 시선은 다시 소중한 아내의 얼굴 위에서 멈추었다.

“그래. 잘됐네. 나는 말이야, 리세트. 네가 품고 있는 게 다른 놈의 아이라 해도 상관없어. 기분은 조금 더럽겠지만.”

요한은 다시 한번, 이번에는 정말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트반을 바라본 후 완전히 등을 돌렸다. 리세트를 두 눈에 가득 담고서 요한은 미소 지었다.

“너만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면 돼.”

요한은 제 손을 떼어 내려 버둥거리는 리세트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그림자에 파묻힌 작은 여자가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아름답고 황홀한 세상에게서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나, 아이 낳을 거야. 낳아서 기를 거야.”

“낳아.”

구름이 해를 삼켜 버린 것인지 갑자기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하늘의 그림자가 맺힌 요한의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고였다.

“내 곁에서, 내 품 안에서, 내 눈이 닿는 곳에서.”

“…….”

“그렇게 낳아.”

어두운 하늘에서 세찬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뚝뚝뚝, 온실을 때리는 빗방울이 점점 늘어났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은 둥지로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고 빗줄기는 계속 거세졌다.

평온이 깨어진 온실을 바라보며 아트반은 생각했다.

어쩌면 요한은 이미 미쳤을지도 모르겠다고.

❖ ❖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공작저로 가지 않겠다며 맹렬하게 소리치는 리세트와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려가려는 요한. 소음에 놀라 어지럽게 온실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 그 치열한 전쟁의 끝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리세트가 혼절하듯 잠이 들고서야 막을 내렸다.

리세트의 전쟁은 잠시 멈추었지만 아트반의 외로운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온실 안을 훑어보는 요한의 눈동자는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세트를 누인 침대와 작은 테이블, 여러 벌의 옷과 망가진 가죽 가방. 그 모든 것을 담은 눈이 마침내 아트반에게 돌아왔다.

“미안해.”

이제 영원히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것이 너무 슬펐지만 아트반은 변명을 하는 대신 거듭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담담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아트반은 고개를 숙여 곤경을 피했다. 몇 시간 전 자신에게 죽일 듯이 덤벼든 요한이 그리워질 무렵에 픽,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이 형편없네.”

“……무슨 소리야.”

“아직도 네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말이 하고 싶어?”

확신이 깃든 목소리가 아트반의 변명을 막았다.

“그 형편없는 거짓말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그래 존중해 줄게.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하겠다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너희가 숨겨 주려고 하는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그놈이 바로 너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아트반은 끝내 참아 냈다.

“찾아내면, 죽이기라도 하게?”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서늘한 표정이 아트반의 탄식을 불러왔다. 분명 리세트에게는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순간에 거짓말을 할 만큼 침착했을 리 없는데…….

“사고사로 위장하든, 자연사로 위장하든 죽일 방법은 많아.”

요한 델피니움은 아내에게 미친 사내이다. 아트반은 그 생각을 부정할 마음이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가 사라졌으니 미쳤을 것이다. 그 견해를 아트반은 정정해야만 했다.

아내가 사라져 미쳐 버린 것은 맞지만, 아내를 되찾기 위해 그 본성을 숨기고 평정을 유지해 내는 게 바로 요한 델피니움이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때도 다 죽일 생각이야?”

“응.”

요한에게서는 약간의 주저함도, 자신이 죽일 이름 모를 인간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다 죽이다 보면 내 곁으로 돌아오겠지. 더 이상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유일하게 남은 나를 다시 보러 와 주겠지.”

미친놈. 이놈은 정말 미친놈이다.

작게 뒤척이는 소리에 두 사람은 시선을 옮겼다. 요한은 거친 숨을 내쉬는 리세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침대에 몸을 누였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를 죽이겠다 예고한 남자가 저토록 다정해질 수 있다니. 아트반은 선뜻 믿기지 않았다. 두 눈으로 목격한 후인데도 말이다.

“리세트는 일단 지금처럼 계속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 방은 따로 내줄게.”

“아니, 집으로 갈 거야. 우리의 집으로.”

요한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제안을 곧바로 거절했다.

“공작저를 불편해할 거야.”

“그럴 리 없어.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건 아이의 아버지 때문이겠지.”

“아아…….”

아트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뒤늦은 후회와 그래도 과거로 돌아간들 똑같은 선택을 할 자신이 미워지던 순간이었다.

“너에게 속죄할 기회를 줄게.”

“뭐, 기회?”

“이제부터 너는, 나를 속인 것처럼 리세트를 속이는 거야. 나는 계속 아이의 아버지를 너로 알고 있는 거고.”

요한은 선심을 쓰겠다는 듯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 ❖ ❖

아름다운 악몽이 찾아왔다.

리세트는 예쁜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꼭 닮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요한, 어서 이리 와. 우리 아이야. 빨리 안아 줘.

아기를 요한에게 건네려던 순간, 그의 손이 아기의 여린 목을 움켜쥐었다.

요한! 하지 마!

말리려고 몸부림을 쳐도 온몸이 묶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리세트는 무력하게 모든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아기가 터트리는 울음을, 아기를 내려다보는 무정한 눈을.

“안 돼!”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 리세트는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방금까지 본 끔찍한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파랗게 물든 흐릿한 어둠뿐이었다.

“꿈이야. 이건, 전부 꿈이야. 나쁜 꿈이야.”

두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도 익숙해 일찍이 눈치채지 못한 따스한 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리세트는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요한은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아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는 것을 본 요한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차가운 손에 온기를 불어넣듯 손등에 길게 입 맞추었다.

요한은 헐떡이는 리세트를 안아 제 품에 기대게 한 뒤 입가에 물잔을 기울여 주었다. 호흡이 편안해지길 기다리며 마른 등을 쓸어 주고 토닥이기도 했다.

“나를 버리고, 아트반에게 가고 싶어?”

리세트는 차마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요한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나중에 모든 진실을 밝힌다 해도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겠지. 어쩌면 더 큰 배신감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에 잠긴 리세트의 젖은 눈시울을 바라보던 요한은 한결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담긴 건 오롯이 자신뿐이었다. 두려움도 공포도 아닌, 미안함과 요한 델피니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네가 아트반에게 가면, 그 아이는 영원히 사생아라는 이름 속에서 살아야 해.”

“사생아라니. 내 아기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하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너와 아트반 크리프는 부부가 아니거든. 네 남편은 나야.”

리세트가 그의 품 안에 있다. 그녀의 아이까지도. 그 사실만으로 요한은 리세트의 실수조차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곁에서 낳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떻게, 아트반의 아이를 네 곁에서 낳아?”

“그래야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는지 리세트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찌푸렸다.

“델피니움의 이름을 줄게.”

“…….”

“후계자로, 내 아이로 기르면 돼.”

“…….”

“너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니까.”

리세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체 너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 나는 너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 우리 가족을 만들고 싶었어. 내가 바라던 건…….

참지 못한 눈물이 흐느낌과 함께 흘러나와 리세트의 의지를 배반했다. 힘겹게 막아 놓은 서러움이 툭 터져 버렸다.

“좋은 아버지가 될게.”

그토록 우리 아기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을 짜 맞춰진 거짓 속에서 듣게 되었다.

만약 네 아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도 너는 나에게 같은 말을 들려줄까?

그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막막해졌다. 언제가 요한이 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조심스럽게 품었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커져 가는 울음소리 속으로 간절한 바람을 담은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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