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내 아이야
요한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세트의 뺨을 매만졌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던, 한 번만 닿고 싶어 손을 뻗으면 어김없이 사라지던 아름다운 악몽이 아니었다.
달콤한 환영이 아니라 정말 너구나.
리세트를 품에 안고서야 요한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리세트.”
매일 홀로 되뇌어 본 그 이름의 주인이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익숙한 체취와 포근한 온기가 가득한 자신의 세상을 향해 요한은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왜 나를 떠났는지, 어째서 나를 버린 건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처음에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다시는 네가 싫어하는 짓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은 옅어져 갔다. 남은 것은 불안과 절망. 미칠 듯한 갈망과 해소할 수 없는 사랑만이 깊어져 서서히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꿈속에 찾아오는 너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었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너는 매일 밤 눈물을 흘렸다. 달래 주고 싶어 미친 듯이 달려가도 계속 멀어지기만 했다.
“리세트.”
울음 같은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보고 싶었어.”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조급해진 요한은 더욱 힘을 주어 리세트를 품에 가두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그녀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그렇게 불안에 떨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낸 탓에 현실감이 없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조금만,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더 머무를 수 있기를.
“가지 마.”
간절히 빌고 또 빌면서 요한은 애처롭게 속삭였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리세트는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안겨 있었다.
기억하는 목소리와 달리 낮고 갈라진, 조금은 낯선 그 목소리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도, 계속 미안하다며 사죄하는 목소리도. 무너져 내린 이 남자를 안아 주고, 달래 주고 싶었다.
“……요한.”
낮게 불러 본 그 이름에 요한의 어깨가 더욱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랑해.”
요한의 등을 감싸려 했던 손은 그 말이 들려온 순간 허공에서 멈추었다. 서서히 흐려지던 리세트의 시야가 차츰 또렷해져 갔다.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
사랑해. 그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찾아온 끔찍한 말이 리세트의 손길을 멈추게 했다.
네가 너무 그리웠어. 사실 너를 떠난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어. 네가 아이를 죽이겠다는, 나를 속이겠다는 그 말만 안 했어도 나는…….
리세트는 그를 마주 안으려던 손으로 그리웠던 품을 힘껏 밀어 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단단한 몸이 허망할 정도로 쉽게 밀려 났다.
단호한 얼굴로 일어선 리세트는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점차 간격이 커지는 것을 요한은 바라만 보았다.
리세트가 벌린 거리를 단숨에 좁힌 요한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오지 마.”
냉담한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왜?”
반문하며 리세트를 바라보자 다시 한 걸음,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리세트는 주위를 살펴보며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던 요한은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리세트를 살펴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눈동자를, 앙상하게 마른 두 팔을. 천천히 살펴 내려간 시선은 리세트의 배 위에서 멈추었다.
“아이는, 어떻게 됐어?”
“…….”
“죽었어?”
요한은 자꾸만 멀어지는 리세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픈 듯 리세트가 눈을 찌푸렸지만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놓을 수 없었다.
“어서 말해. 아이가 죽었어? 너는, 괜찮아? 아픈 곳은?”
그 목소리가 마치 아이가 죽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세트는 요한의 손을 뿌리치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맞아. 죽었어.”
“아픈 곳은, 없어?”
“아이에 대한 건 안 물어볼 거야?”
“상관없어. 나는 너만 무사하면 돼.”
요한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리세트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다시 아기를 가지면?”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너는…….”
“아니, 나는 중요해!”
요한의 말을 자른 리세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에게 다시 아기가 찾아오면?”
“이제 그럴 일은 없어.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거야.”
“……실수였구나.”
너에게 우리 아기는 고작 그런 존재였구나. 실수. 리세트의 의식은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비워졌다.
행여 아기가 들었을까 싶어 리세트는 더욱 소중하게 배를 감쌌다. 괜찮아. 마음으로 아이를 위로했다. 괜찮아, 아가.
리세트는 기도했다. 부디, 지금 하는 말을 아기가 듣지 않기를.
“나 임신했어.”
“……뭐?”
흔들리는 눈동자를 더는 마주할 수 없어 리세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아이, 네 아이가 아니야.”
❖ ❖ ❖
“후작님!”
가늘게 찌푸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아트반은 그 외침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델피니움 공작저의 주치의와 집사의 얼굴이 보였다.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괜찮으십니까?”
“자네는 이게 괜찮아 보이나?”
“정말, 죄송합니다.”
집사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아트반은 깨질 것처럼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곳이었다. 그가 예고 없이 공작저에 방문하는 날이면 눈살을 잔뜩 찌푸린 요한이 마지못해 내주던 그 방이었다. 그 살벌한 얼굴의 친구 옆에 선 리세트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심각한 외상은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흘깃 째려보자 주치의는 허허, 멋쩍은 듯 웃었다. 집사는 방 밖으로 나가 주치의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후 다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각하. 요즘 주인님의 심기가 불편하셔서…….”
“고작 심기가 불편하다 해서 사람을 죽일 것처럼 패지는 않겠지.”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 큰 분들께서 이런 해괴한 싸움을 벌이신 겁니까. 이제 그럴 나이는 한참 지나셨습니다.”
그걸 싸움이라 불러도 되려나. 일방적으로 맞느라 방어 한 번, 변명 한 번 못했는데.
“그래도 주인님께서 모처럼 기운을 차린 모습을 보이셔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신 겁니까? 그래서 싸우신 건가요?”
“아니. 확실한 건 나만 얻어맞고 끝났다는 거지.”
제 몸을 부술 것처럼 난도질한 마력의 여파가 여전히 생생해 아트반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요한의 마력에 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긴 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아트반의 눈동자에 낭패감이 스쳤다.
“요한은? 어디로 갔어?”
“후작저로 가신다 하셨습니다.”
낮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아트반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 나갔다.
❖ ❖ ❖
포로롱 날아오르는 새들의 소리뿐인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리세트였다.
차라리 요한이 화를 내 주었으면 했다. 어떤 반응이라도 좋았다. 눈물로 흠뻑 젖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리세트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요한!”
리세트를 안아 든 요한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내려놔, 당장!”
“집으로 가자.”
요한은 발버둥 치는 몸을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
“내 말 안 들려? 당장 내려놓으라고!”
“내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공포에 질린 눈을 마주하며 요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뺨, 조금 메마른 듯한 입술 위를 차근차근 지나왔다. 리세트가 제 품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때 가서 얘기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네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발작하듯 그를 밀어 내는 손은 필사적이었지만 요한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반항이 거세질수록 리세트를 안은 팔에도 힘이 실렸다.
“싫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싫어!”
아이를 죽이려는 사람. 리세트가 아는 것만 해도 벌써 두 명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에 동조한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겠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다.
“……싫어?”
몸을 속박하던 힘이 느슨해진 것을 느낀 리세트는 뛰어내리듯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너와는 상관없는 아이야. 제발, 그냥 돌아가!”
“……상관있어.”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말했잖아!”
“아이는 나와 상관없다 해도, 너는 아니잖아.”
요한은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는 리세트의 손을 붙잡았다.
“제발 집으로 가자. 같이 돌아가.”
“아, 아이 아빠가 기다려.”
요한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리세트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수척해진 얼굴과 물기 어린 뺨을 애써 무시한 채 그의 손을 단호하게 떼어 냈다.
힘없이 툭 떨어진 손을 한 번, 그리고 다시 리세트의 얼굴을 한 번. 느릿하게 살핀 요한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마치 즐거운 소풍을 앞둔 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이었다.
“아이 아빠가 누군데?”
“내가 그걸, 왜 너한테 말해야 돼?”
“걱정하지 마. 죽일 생각은 없어.”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그 사람을 죽이면 네가 슬퍼할 테니까.”
리세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이름을 고민하던 차에 요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면 상관없는 거지?”
다시 리세트의 손을 잡는 그의 손에는 조금 전과 달리 큰 힘이 실려 있었다. 손가락까지 단단히 엮은 후에야 요한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아이 아빠가 누구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그 말을 리세트는 믿을 수 없었다.
“리세트, 아이 아빠가 누구야?”
리세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이곳을 향해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번져 왔다. 일순간 차가워진 눈을 옮긴 요한의 얼굴에서는 모든 표정이 지워진 채였다.
부서질 듯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세트가 고개를 돌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온실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내 아이야.”
리세트와 요한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 아트반 크리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