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찾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속상한 마음에 저절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아트반은 조용한 한숨을 흘리며 요한을 살펴보았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창백한 낯빛과 야윈 뺨. 불분명하게 초점을 잡는 눈. 모든 감정이 메마른 듯한 표정.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요한은 가만히 찻잔을 쥐고만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래도 주어진 일은 완벽하게 해내고 있어 다행인가.
응접실로 오기 위해 억지로 집무실에서 요한을 끌어내던 순간에도 그는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일을 끝내야 리세트를 찾으러 갈 수 있을 테니 더욱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겠지만.
간신히 티 테이블 앞에 앉혔더니 요한은 이제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한,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거야?”
“…….”
“요한.”
“듣고 있어.”
영원한 안식에 빠져 버린 듯한 모습과 달리 너무도 차갑고 이성적인 목소리 때문에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잠은 자?”
“…….”
“식사를 안 하는 건…… 그래, 그것까지 관여하진 않을게. 그래도 잠은 자야지.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리세트를 찾을 때까지.”
단호하게 흘러나온 말에 아트반은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요한이 애타게 찾는 그녀를 지금까지 숨겨 주고 있는 게 자신이었으니까.
이건 기만이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리세트를 만나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 순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요한에게 이러저러한 충고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아트반이 입을 다물자 응접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리세트가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정말 슬퍼할 거야. 많이 걱정할 거라고.”
지금껏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요한의 얼굴 위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슬픔이었다.
“리세트가 나를, 걱정해 줄까.”
아마 걱정하지 않겠지. 그러니 떠나 버렸겠지. 나를 버려두고, 그렇게 갑자기.
나를 버리고. 나를 남겨 두고.
찻잔을 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든 게 귀찮았다. 맞은편에 앉아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트반도, 매일 걱정을 표하는 집사의 얼굴도, 그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용인들도.
리세트가 떠난 후로는 좀처럼 커튼을 걷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도 온통 어둠뿐인 리세트의 침실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야만 숨이 쉬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리세트가 곁에 없는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는 걸 느끼고 싶지 않았다. 깨닫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일 같은 건 모조리 내팽개치고 리세트를 찾는 것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공작저로 돌아오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 잠깐의 시간마저 아까웠다.
하지만 그 볼품없이 망가진 모습을 리세트가 우연히 보기라도 한다면?
어디서든, 언제든 리세트를 만날 수 있으니 요한은 최선을 다해 버텨 낼 뿐이었다. 망가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니까. 머저리 같은 꼴로 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 리세트가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만 있다면 이런 수고쯤은 얼마든지 감내해 낼 것이다.
그러니 리세트, 너만 돌아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텐데.
왜 떠났을까. 어째서 떠나 버린 걸까.
수없이 고민해 보아도 답을 알 길이 없었다. 그 답을 알려 줄 사람이 그를 떠나 버려서.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너를 조금 더 달래 주어야 했다. 입을 맞추고 끌어안아도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있던 너를 깨워 미안하다고, 사실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저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그 밤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당연한 일이잖아. 리세트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되어 가던 요한의 의식이 그 말을 받아들인 순간 명료해졌다. 슬픔이 번져 가던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네가 이러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리세트가 사라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는데. 그런데 네가, 아트반 크리프…… 네가 어떻게 그런 멀쩡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걸까.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트반을 마주했다.
이 세상에 나 다음으로 리세트를 걱정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일 텐데. 이럴 수는 없지 않나.
“언제부터였어?”
냉담한 목소리에 깃든 선명한 분노가 아트반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던 아트반은 생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에 가려진 입술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질문을 바꾸지.”
요한은 찻잔을 쥔 아트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위압적인 힘을 이기지 못해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언제부터 나를 속인 거지?”
❖ ❖ ❖
맑고 고운 새들의 노랫소리가 리세트의 잠을 깨웠다.
다소 강한 여름 특유의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오늘은 햇빛을 좀 쐬어야 한다며 아트반이 온실 천장을 덮은 천을 걷어 두겠다 엄포를 놓은 것이 떠올랐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원체 아침잠이 많기도 했지만 리세트의 수면 시간은 나날이 망가져 갔다. 잠에 드는 시간이 규칙적이지 못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악몽과 지독한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일어난 직후에는 무척이나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후작저를 떠나야지.
리세트는 이미 그 뜻을 아트반에게 분명히 알려 두었다.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니 요한의 감시도 느슨해질 테고, 그 틈을 타 수도를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라 해도 언제까지고 신세를 질 수는 없다. 게다가 아트반은 리세트뿐만 아니라 요한의 친구이기도 하다.
어디로 간다고 해도 후작저만큼 안전한 곳을 찾기 힘들다는 걸 알지만 리세트는 쉽게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아트반에게 더는 거짓말을 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큰 문제가 생겼다.
아기가 자라지 않는다.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아기가 떠나간 것일까.
덜컥 겁이 나 아트반에게 믿을 만한 의사를 구해 달라고 했던 리세트는 황당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아직 임신 초기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말도 안 된다. 임신 초기라니.
벌써 반년째 품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리세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후로도 의사는 믿기 힘든 말만 반복하다 사라졌다. 임신 초기에는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되며 아기는 아주 건강하다고. 그러니 안정을 취하라고.
장장 여섯 달. 그 시간 동안 아기가 자라나지 않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게 정상인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의사의 말을 종합해 보면 리세트의 몸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였다. 특별하게 아픈 곳도 없고, 병에 걸린 건 더더욱 아니었다.
“아가…….”
어째서 자라지 않는 거니.
한가로이 온실에서 평화를 만끽하던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마치 다가올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깜짝 놀란 리세트가 배를 감싼 순간 끔찍한 소음이 연이어 이어졌다. 무언가 깨지고 대지가 흔들리는 소리. 사용인들의 비명 소리. 원인불명의 소란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리세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온실의 입구를 살폈다.
바깥이 훤히 잘 보이는 유리온실은 아트반이 장막을 쳐 준 덕분에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리세트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온실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그 안전하고 아늑했던 공간 속으로 비명과 고성이 침투했다.
온실과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 저택의 대문 쪽에서 기다란 연기 기둥이 하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불길이 번진 것은 아닌 듯했지만 저건 꼭 재난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그 새카만 기둥이 온실까지 덮쳐 왔다.
완전히 검은 먼지로 덮이기 전, 리세트가 마지막 순간에 본 건 곳곳에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바람이었다. 자연재해가 아닌, 인위적인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마법 같은. 마법, 같은…….
멍하니 중얼거리던 리세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신발을 신지 못해 발바닥에 까슬까슬한 자갈이 달라붙었지만 그것을 인지할 겨를이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리세트의 뒷등에 식물의 커다란 잎사귀가 스쳤다. 작은 접촉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온실 밖을 살폈다.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그들의 비명 소리인지, 혹은 또 다른 이들의 절규인지 모를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가, 괜찮아. 괜찮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이곳은 안전하다. 적어도 아트반의 마법진이 파훼되지 않는 한은.
숨을 죽이며 이 소란이 잦아들길 기다렸지만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트반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큰일이 생긴 거라면 당장 이곳을 나가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치도록 불안했다.
후작저의 사람들이 크게 다치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게 되면, 요한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배를 감싼 손에 더 큰 힘을 실은 채 리세트는 문득 멈추어 섰다. 단말마의 비명이 다시 들려왔을 때, 리세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며 빠르게 마법진을 전개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소음이 일순간 증발한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처절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부른 그때, 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흙먼지가 퍼진 온실 입구의 바닥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찡그린 눈으로 그곳만 맹렬히 바라보던 리세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리세트가 전개해 나가던 마법진은 바람에 날려 가듯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안개처럼 넓게 퍼진 먼지바람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리세트는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리세트와 눈을 맞추듯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가 바닥에 손을 짚어 마력을 흘려 보내자 리세트를 감추어 주던 무형의 힘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못했던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찾았다.”
아름다운 미소와 다정한 눈빛, 밤하늘의 빛을 간직한 눈동자가 리세트를 담았다.
요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