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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화 (4/151)

4화
나 좀 숨겨 줘

리세트는 수도를 벗어나 국경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정착에 필요한 돈은 충분히 챙겼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생계를 유지하는 데 조금의 모자람도 없을 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려면 외진 곳, 특히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가 출몰해 완전히 인적이 끊긴 이 숲이 제격이었다.

지천에 널린 몬스터들의 잔해를 애써 무시하며 걷고, 또 걸었다. 쉬지 않고 걸어 나갔다.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면, 말을 하고 예쁘게 웃음 지을 수 있게 되면 그때 돌아오자.

리세트는 납작한 배를 매만지며 울음을 참아 냈다.

막상 자라난 아이를 본다면 요한도 그때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게 되겠지. 아이를 죽이라는,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지 못하겠지. 보고 느낄 수 없으니 그토록 잔인한 말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했겠지.

“하아.”

입가에 번진 한숨이 새하얗게 흩어졌다. 봄의 기운이 아직 이 깊은 숲까지는 닿지 못해 밤이 되면 급격히 기온이 내려갔다.

리세트는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며 모포를 꺼내 들었다. 몸을 단단히 감싸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떠올라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리세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라렸다.

요한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겠지. 영원히 숨기고 싶은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걸 기어코 묻어 둔 채로 그녀의 눈을 속이고, 끝내 아이를 죽이겠다는 결단을 내린 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작정 도망쳐 나온 순간을 때때로 후회하기도 했지만 리세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요한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테니까. 끝까지 거짓된 말들만 내놓을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아기를 죽이려 할 터였다. 리세트가 아는 요한 델피니움은 그랬다. 한 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런 요한을 끝까지 다그치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리세트는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이 알고 지내 온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불문율이었다.

요한은 침묵을, 리세트는 묵인을.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비밀 같은 것, 감추고 싶은 상처 같은 것들을 요한이 말해 주지 않는다 해도 둘 사이에 문제 될 건 없었다. 고작 그런 궁금증을 이겨 내지 못해 요한의 마음을 괴롭히고 싶지 않기도 했다.

네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게.

그 미련한 다짐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이런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달랐을까.

부질없는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이에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판단이 섰을 때 리세트는 자리를 정리했다.

수업과 임무를 위해 수시로 드나들던 숲이라 익숙했다. 이제 곧 숲의 끝자락에, 그 너머의 작은 마을이 보일 터였다.

마침내 리세트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나무 덤불을 헤쳐 나갔을 때, 깊은 절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저 멀리서 피어나는 굴뚝의 연기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 같은 건 귓가를 스치지도 못했다.

“어떻게, 이런…….”

요한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처럼 대대적으로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눈앞에 펼쳐진 마법진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리세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숲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는지 마법진은 일정한 간격으로 빼곡하게 숲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포위되었다.

아마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요한은 수도의 외곽 전체에 마법진으로 덫을 놓고 리세트를 찾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익숙한 마법진을 발견한 순간 리세트는 밟아 온 길을 되돌아갔다.

요한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곳으로.

결코 그의 의심을 사지 않을 사람에게로.

❖ ❖ ❖

리세트가 사라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아트반 크리프는 한숨을 내쉬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결국 오늘도 리세트를 찾는 일에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임신한 아내가 영지로 요양을 하러 갔다.

요한 델피니움은 그 한마디로 모든 귀족의 입을 다물리게 했다. 평민 출신에 전쟁고아라는 말로 리세트를 헐뜯는 사람들에게서 그녀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적은 인원으로 이 넓은 대륙을 다 뒤지는 건 무리라며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요한의 뜻은 완강했다.

겨우 일곱 명. 물론 전 대륙을 통틀어 손꼽히는 실력자들이지만 실종된 사람을, 그것도 작정하고 사라져 버린 사람을 찾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납치 사건인 줄 알았다. 요한이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사라졌어.’

모든 빛이 사라진 것 같은 요한의 두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리세트가 나를……, 나를 버리고 사라졌어. 나를 떠났어.’

무너져 내릴 듯한 그 목소리에 아트반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찾아 줄게. 나도 찾아볼게. 아트반은 오늘도 지키지 못한 약속을 되새기며 홀을 가로질렀다.

침실로 따라 들어오려는 사용인들을 전부 물린 아트반은 막막한 한숨을 뱉어 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리세트…….”

재킷을 벗던 그의 귓가로 작은 소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처음에는 참새가 유리창을 쪼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건 참새의 부리로는 낼 수 없는 둔탁한 소리였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에 한 여자가 비쳤다.

더러운 흙먼지로 뒤엉킨 빛바랜 은발과 찢어지고 낡아 해진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 분명 낯선 모습의 여자였지만 그 초록빛 눈동자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일 수 없는 빛깔이었다.

“……리세트?”

눈물이 차오른 맑은 눈동자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지켜보던 아트반이 발코니로 달려갔다.

“리세트!”

황급히 창문을 열자 리세트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라고 화가 나 소리를 치려던 그의 입술을 바들거리는 두 손이 막았다.

“숨겨 줘, 아트반. 부탁이야. 제발, 도와줘.”

“무슨 일이야. 대체 너한테 무슨…….”

“요한이 나를 찾을 수 없게, 나 좀 숨겨 줘.”

❖ ❖ ❖

아트반은 후작저의 유리온실 안에 방어 마법진을 만들어 주었다. 제국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까지 그의 마법진에 둘러싸여 있으니 요한의 의심을 살 일은 없었다. 그가 요한에게 사실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만약 아트반이 다 말해 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우리 아기는…….

침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리세트는 고개를 저으며 나쁜 생각을 털어 냈다.

아트반은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가슴은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아마 오늘 목격한 수도의 모습이 큰 충격으로 남은 듯했다.

수도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전시 상황처럼 곳곳에 펼쳐진 마법진의 장막을 떠올리면 저절로 온몸에 한기가 퍼졌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것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리세트는 알 수 있었다. 그 마법진은 리세트의 마력을 감지하기 위해 만든 덫이라는 걸.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의식적으로 그 말을 되풀이하자 차츰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긴장감마저 옅어지니 우습게도 졸음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따듯한 물로 씻고 보송한 침대 위에 누우니 속절없이 눈이 감기려 했다. 몸이 피곤해 금세 잠에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정신은 천천히 또렷해지고 있었다.

리세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가, 이제 안심해도 돼.”

어젯밤 꿈속에 나타났던 요한의 모습을 지워 내고 싶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던 그 모습을, 자신을 깊이 안아 주던 그 품의 온기를 기억에서 떠나보내고 싶었다.

“매일 숲에서 자느라 힘들었지? 오늘부터는 편안하게 자도 되니까 너도 푹 자. 좋은 꿈만 꾸고 좋은 것만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엄마가 미안해.

아기에게 계속 말을 건네주자 조금씩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요한을 닮은 예쁜 아기가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옹알이하는 모습을 잠결에 상상해 보기도 했다.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정말 예쁠 텐데.

포근한 불빛이 침대가로 번져 왔다. 리세트는 온기를 찾듯 손을 뻗어 빛이 스며든 이불 위를 매만져 보았다.

“어서 너를 만나고 싶어.”

한 달.

두 달.

어느덧 육 개월.

요한을 떠난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라나지 않았다. 리세트의 배는 미세한 변화조차 없었다.

❖ ❖ ❖

친구를 속여야 했다.

아트반은 또 다른 친구를 위해 침묵을 택했다. 그 거짓된 날들이 벌써 다섯 달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죽일 거라고 했어.’

요한에게 달려갈 그의 결심을 뒤흔든 건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요한이, 아기를 죽이겠다고 했어. 나 모르게. 나를 속이려고 했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리세트는 결코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요한은…….

요한이 정말 그런 말을 했을까. 믿을 수 없어 수없이 반문했지만 리세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똑똑히 들었어. 내가 직접, 그 말을 들었단 말이야. 제발 믿어 줘.’

아트반은 이마를 감싸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도대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지난 다섯 달 동안 두 사람을 면밀히 관찰했다.

리세트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 억지로 좋은 생각을 하며 음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지만 그 속은 결코 평화롭지는 못할 테지. 위태롭지만 그래도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심각한 쪽은 요한이었다.

요한은 몸이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리세트를 찾는 일에만 몰두했다.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하긴 하지만 오히려 제정신을 붙들고 있어 더욱 무서웠다.

하지만 과연, 이런 상태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찾아야 해. 빨리, 리세트를 찾아야 해. 매일 애타게 그 말만 반복하는 요한의 모습이 불쑥 떠올라 괴로웠다.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수행인의 목소리가 죄책감에 물들어 가던 아트반의 의식을 되찾아 주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아트반은 죽은 듯이 고요한 공작저를 눈에 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파릇파릇한 잎사귀, 푸르른 맑은 하늘, 정답게 지저귀며 그 하늘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

그림을 옮겨 놓은 듯한 완연한 여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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