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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화 (3/151)

3화
나를 떠났을 리 없잖아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지만 요한은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점점 빨라지던 발걸음이 이윽고 서서히 멈추었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언제나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가 감돌던 침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리세트가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공작 부인의 침실이 이처럼 정적에 휩싸인 건. 찬란한 햇빛이 들어와 온 방 안이 환하게 물들었는데 요한에게는 마치 캄캄한 어둠에 둘러싸인 듯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리세트.”

이름을 불러 보아도 밝은 목소리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리세트.”

애타게 다시, 또다시. 리세트. 리세트 델피니움. 끊임없이 그 이름을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가 정적 속으로 파고들었다.

요한. 그의 이름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데.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며 뒤에서 작은 온기가 맞닿아 올 것만 같은데. 얼굴 곳곳에 인사처럼 입을 맞추어 줄 것만 같은데.

“리세트!”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숨은 거야.

“장난치지 마. 어서 나와!”

이런 짓궂은 장난을 감내해 낼 인내심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없이 방 안을 서성거리던 요한의 발걸음이 돌연 멈춘 건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실의 모습을 간신히 알아차렸을 무렵이었다.

“왜…….”

보얗게 일어나는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혹시 몰라 침실을 치우지 않았다는 집사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리세트가 사라진 그날을 기점으로 침실은 내내 그 상태 그대로라고. 이렇게 버려진 채로, 더럽게 어질러진 그 모습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걸 좋아하는 그의 아내는 언제나 부지런히 침실을 정돈하곤 했다. 하녀들의 손길이 성에 안 차는지 꼭 제 손을 거쳐야 만족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현실이다.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구겨진 하얀 시트와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 깨진 유리 조각과 그 주변에 번진 아릿한 악취를 풍기는 약물, 그리고 동전 몇 개. 그 모든 것이 알려 주고 있었다. 리세트가 사라졌다는 걸. 다른 누구의 개입 없이, 납치 따위가 아닌, 리세트 스스로 이곳을 떠났다는 걸.

자세히 상황을 살펴야 하는데 어쩌자고 시야는 계속 흐려지기만 했다.

‘요한.’

어디선가 리세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데.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그를 맞아 주는 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침실과 깊은 정적뿐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리세트가 나를 떠났을 리 없잖아.

그 생각에 사로잡힌 요한은 침실과 연결된 다른 방까지 모조리 살폈다.

없다. 리세트가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또 그 안을 살펴볼수록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짐을 챙긴 흔적이 역력한 모든 공간을 눈에 담은 채로 요한은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리세트가 사라졌다. 2층의 온 방을 뒤엎고 나서야 요한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초점을 잡지 못해 방황하던 눈동자에 따사로운 빛줄기가 닿았다.

창가에 힘없이 늘어진 커튼 위로 스며든 햇살이 찬란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더욱 비참한 오후였다.

❖ ❖ ❖

역시 그 여자는 도둑이었던 건가.

이른 아침부터 여관에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짜고짜 누군가를 찾고 있다던 사내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가 떠나고 몇 분이 채 흐르지도 않았는데 더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이들 모두가 똑같은 로브를 입고 있다는 건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로브 뒷면에 어떤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지도.

그들은 때리거나 흉기를 들이밀고 죽이겠다며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은 그를 에워싸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많은 손님을 받을 생각에 들떠 그들의 말에 몇 마디 대꾸했을 뿐인데, 결과는 이처럼 참담했다.

자그마한 여자라 얕보아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설마 그 여자가 델피니움 공작 가문을 털었을 줄이야!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대단한 도둑이 아닌가!

감탄과 원망의 말을 여자에게 쏟아 내던 그는 이윽고 큰돈에 눈이 먼 자신을 탓하기에 이르렀다.

제발 여자와 한패라거나 일부러 숨겨 주었다는 오해만 받지 않았으면 싶었다. 여자가 건넨 돈을 모두 델피니움 공작가에 돌려준다면 이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에 끙끙거리던 주인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아니다. 이제 다 끝이다.

여자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이 근방에 그가 짐마차를 수소문한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니 조력자로 묶일 일만 남은 것이다.

“은발이라고 했나?”

그사이에 여관으로 들어선 한 남자가 불쑥 말했다.

그 남자를 알아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너머까지 이름을 알린 저 사내를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델피니움 가문의 젊은 가주,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요한 델피니움 공작이었다.

공작이 나타난 순간 자그마하게 품었던 희망은 산산이 깨어졌다. 얼마나 귀중한 걸 훔쳤으면 공작까지 직접 나섰겠나. 이제 다 끝났다. 나는 죽는구나.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공작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떨림도 더욱 커졌다. 이윽고 그의 앞에 선 공작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네 입으로, 이들에게 한 말이니 기억하겠지. 수상한 여자를 보았고,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은색이었다는 말, 확실한가?”

“네, 네……. 그, 그렇습니다.”

어쩌면 살려 주지 않을까. 진실을 얘기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브를 하도 꽁꽁 싸매서 얼굴은, 제대로 보, 보지 못했지만 머리카락은 확실히 봤습니다! 은발이었어요. 은발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쥔 그가 외치듯 말했다.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고?”

“네! 그렇습니다.”

“그 안에 든 건, 확인하지 못했나?”

“예, 예……. 그것까지는…….”

“이들에게 말했던 여자의 인상착의를 상세하게 말해 봐.”

요한은 침착해지려 부단히 노력했다. 벌써 열세 번이나 헛걸음을 하다가 간신히 쥔 희망이었다. 그러니 모든 게 확실해야만 했다.

“로브에 파묻혀 있었지만 체구가 아주 작은 여자였습니다. 손도 자그마하고 목소리도 가늘고 부드러웠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자세하지는 않지만, 언뜻 본 눈동자는 분명 초록빛을 띠었습니다.”

사실만 고하는 중인데도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겁에 질린 그는 최선을 다해 말을 쏟아 냈다.

“그 여자가 준 돈은 하나도 쓰지 않고 고이 갖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주조한 동전인데…….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요!”

마지막 말은 간곡한 어조로 전했다. 전쟁 영웅으로 온 대륙인들에게 선망받는 이 남자가 부디 자비를 베풀기를 바라며.

“그녀는 어디에 있지?”

갑자기 온화해진 공작의 분위기가 그의 말문을 막았다.

도둑을 그녀라는 단어로 칭하다니.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누그러진 공작의 기세에 힘입어 그는 제 신변을 위한 말을 외쳤다.

“저는 그 도둑년과 한패가 아닙니다!”

그 순간 공작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데, 델피니움 공작 가문에 해를 입힌 여자인 줄 알았다면 진즉 고발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잠시 돈에 눈이 멀긴 했지만 저는 결코 그 계집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그만. 내가 물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끅끅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미 떠, 떠났습니다.”

그가 구해 준 마차를 타고, 여자는 이곳을 떠났다.

“언제?”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는 알아차렸다. 공작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어제저녁에……. 그러니까, 한 열세 시간 전에 떠난 것 같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그 눈동자에 맺힌 기운보다도 더욱 차가운 목소리가 공작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어디로 간다고 했지?”

“외곽으로, 수, 수도의 외곽 지역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숲으로 갔겠군.”

몸을 돌려 세운 공작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 ❖ ❖

덜컹거리는 마차가 돌부리를 치고 지나가는지 심하게 흔들렸다.

리세트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물을 마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세 개의 검문을 통과했으니 곧 수도의 외곽에 다다를 터였다.

어깨에 부딪치는 나무 상자를 힘껏 밀어 내던 리세트는 등을 돌려 앉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어깨가 깨질 듯이 아픈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충격을 완화시켜 주었다.

떠들썩한 사람들의 소리와 갖가지 요리에서 묻어나는 풍부한 냄새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전혀 다른 곳으로 들어왔다는 게 실감 났다.

파닥거리는 새들의 날갯짓, 사락거리는 나뭇잎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에 마차가 멈추었다.

“이제 나오시오.”

마부의 큰 목소리가 도착을 알렸다.

마차를 가린 팽팽한 천을 잡아당기자 맑은 햇살이 쏟아지듯 눈가에 맺혔다.

찡그린 눈으로 마차에서 내려선 리세트는 재빠르게 자세를 낮추었다. 네 명의 사내들이 마차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진 것만 이곳에 내려놓고 가시오. 여행을 떠나려면 몸이 가벼운 게 좋지.”

“특별히 옷은 입고 가게 해 드리리다.”

“우리가 신사적으로 편의를 봐드리는 것이니 어서 돈만 놓고 가시오.”

리세트는 묻고 싶었다. 대체 이 상황의 어디를 보아야 신사라는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것인지.

되도록 마법을 전개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요한이 그녀의 마력을 쫓아 추적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해야지.

남자들이 동시에 달려든 순간 리세트는 제 주변에 흙으로 쌓은 두꺼운 방어벽을 만들었다. 난데없이 솟아난 벽에 부딪쳐 고꾸라진 남자들은 강한 충격에 그만 까무룩 기절했다.

“이게 뭐야! 갑자기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온…….”

유일하게 땅을 짚고 일어선 남자의 목소리는 두꺼운 벽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흙벽 안에 갇힌 그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동료들처럼 기절해 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리세트는 모든 마법진을 단번에 파훼했다.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나 앞으로 얼마간 걸어가자 숲길이 보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숲으로 리세트는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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