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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2)화 (2/151)

2화
사라진 아내

바깥의 소란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문틈이 벌어질수록 심장 박동이 달음박질치는 것처럼 빨라졌다.

침착하자.

리세트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에 물건이 떨어지고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젠장, 저쪽으로 내려갔어!”

“잡아!”

“다들 따라와!”

일제히 사람들이 뛰어가는 듯 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살짝 열린 문틈은 더는 벌어지지 않고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저기…… 혹시 누가 있나요?”

조심스럽게 밖을 향해 묻던 리세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 앞으로 다가갔다. 꼭 쥔 손안에는 제 몸을 위험으로부터 지켜 줄 방어 마법진을 그려 놓은 채였다.

리세트는 문 옆의 벽에 붙어서 슬쩍 곁눈질로 바깥을 살폈다.

방금까지의 소란은 전부 거짓인 양 복도는 평화로웠다. 깨진 유리병, 굴러다니는 동전, 바닥에 어지러이 펼쳐진 갖가지 물건을 제외하면. 다시 문을 굳게 닫은 리세트는 문손잡이를 쥐고서 긴 한숨을 뱉어 냈다.

떠들썩한 소리는 이제 2층을 벗어나 1층으로 번진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던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전혀 기척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없는 움직임으로.

바닥을 밟아 가던 소리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리세트는 그 소리가 자신이 머무르는 방 앞에서 끊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군가 침입하면 바로 마법을 전개하려고 했지만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손님.”

투박한 손길로 문을 두드려 제 존재를 알린 여관 주인은 상세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송 중 도망친 도둑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그래서 위병들이 그 도둑을 쫓다가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문을 살짝 연 리세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 다 늦은 시간에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한쪽 눈을 찡그린 주인은 금세 표정을 감추었다. 방에서도 저 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니. 혹시 여관으로 숨어든 도둑놈과 한패가 아닐까?

겉모습을 꽁꽁 감춘 여자의 행색이 다시금 수상쩍게 느껴졌다.

흘긋 로브 앞섶으로 눈길을 내린 그는 심드렁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무렴. 여자가 도둑놈과 한패라고 해도, 이미 그놈은 위병들에게 잡혀서 끌려갔다. 저 조그만 여자 혼자 남아 무얼 할 수 있을까.

“편히 쉬셔요.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리세트는 귀를 기울여 복도의 기척을 살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제외하면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문을 닫으니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렸다. 움츠러들었던 목을 주무르며 리세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가, 괜찮아.”

납작한 배를 오래도록 쓰다듬고 있으니 서서히 사위가 밝아졌다. 커튼 밑으로 비집고 들어온 새벽 끝자락의 차가운 빛이 바닥에 길게 뻗어 왔다.

고단했던 새벽을 지나 아침이 찾아왔다.

❖ ❖ ❖

“짐마차를 구할 수 있나요?”

수상쩍은 손님이 그보다 더 수상쩍은 부탁을 불쑥 던졌다.

“짐마차요?”

주인의 미간에 진 주름이 깊어졌다. 혹여나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지만 그 손님은 고개만 끄덕였다.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잠기운이 삽시간에 달아나 그는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가능하면 빨리, 수도 외곽으로 향하는 마차를 구하고 싶어요.”

허허, 황당하다는 듯 웃은 그는 여자의 차림새를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훑었다.

가까이서 본 로브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재질인 것 같았다. 이 낡은 여관에 어울리지 않는 보송한 향기도 물씬 풍겨 왔다.

심지어 이 여자는 어마어마한 방값을 지불하지 않았나.

여자가 건넨 주머니 안에 있던 찬란한 동전들은 모두 이 제국에서 주조한 화폐였다. 신용도는 물론이고 다른 동전과 비교해 값어치가 훨씬 높은, 그 아름다운 동전을 본 순간 그는 하마터면 주머니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는 여자가 이곳에서 머무는 것도 수상한데, 이제는 짐마차까지 구한다니.

여자가 들고 온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니 짐을 따로 맡길 일은 없을 터.

혹시 귀족 가문의 금고를 털었나? 그래서 이처럼 숨어서 도주할 준비를 하는 건가!

갑작스럽게 뇌리를 스친 생각에 그는 그만 아찔해졌다. 이 골칫덩어리 손님을 고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도둑이 아니라면?

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슬슬 문지르는 사이에 여자가 또다시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한 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저 안에는 필시 어제와 같은 빛을 간직한 동전이 가득 들어 있을 테지.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알아봐 줘요.”

리세트는 멀뚱히 자신을 보고만 있는 주인의 앞으로 주머니를 더 밀어 넣었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주머니 위로 이른 아침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인이 멍하니 앉아서 침묵하니 속이 탔다. 리세트가 막 입술을 열려던 순간 주인은 돈이 든 주머니를 와락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는 사뭇 비장하게 대답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예. 맡겨 주십시오.”

눈앞에 들이밀어진 돈을 거절하기에는 그의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이건 정당한 대가다. 손님의 편의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받은, 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돈. 그는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며 밖으로 나섰다.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해야 할 차례였다.

그는 짐마차를 몰고 다니는 이들이 모여 있을 여관으로 달려갔다.

❖ ❖ ❖

지겹도록 마주한 몬스터들의 사체에서 발굴해 낸 뼈와 심장, 눈, 뿔 같은 것들을 가득 실은 마차가 먼저 수도로 향했다.

원활하게 일을 마무리했지만 이번 임무에 차출된 일행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무가 진행되는 내내 있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오늘이 제일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피곤을 지워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모든 건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도 않은 새벽, 그들을 이끄는 상관께서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일꾼들을 지휘한 탓이었다.

귀족 가문의 마차가 줄지어 늘어선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새벽부터 모든 준비를 끝마친 그 남자, 일을 몰아치듯 사람을 굴려 댄 요한 델피니움 공작이었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저 무표정한 얼굴에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아내에게 푹 빠져 산다더니. 하긴, 그러니 그런 흠결 있는 결혼을 감행한 것이겠지만.

불쑥 든 생각을 차차 마무리한 귀족들은 빠른 걸음으로 공작에게 다가갔다. 살며시 찡그려지는 공작의 미간을 보아하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될 듯싶었다.

“남은 일은 수도로 돌아간 후에, 차후 열릴 회의에서 논의하도록 하지요.”

요한 델피니움 공작은 그 한마디로 모든 인사를 대신했다. 간결하다 못해 지나치게 짧은 인사에 공작의 수행인이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공작은 마차에 올랐다. 허겁지겁 뒤따라 공작의 맞은편에 앉은 수행인은 슬쩍 그를 살폈다. 평소에도 기쁨이나 환호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에는 오늘도 이렇다 할 표정이 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도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마차가 수도의 외곽을 통과했을 무렵에 공작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 끝이 살며시 올라갔고 날카로운 눈초리도 한결 온화해졌다. 질리도록 목격한 변화였지만 그는 늘 기이한 광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밤에 어울리는 색채를 가진 얼굴이 이제는 한낮의 오후처럼 평온해지다니.

햇살이 내려앉은 차가운 남색의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짙은 색감을 지닌 눈동자에도 평온이 깃들었다. 언뜻 미소마저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오늘부터 일주일, 그 동안에는 모든 일정을 비워. 되도록 집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만, 그 외에 것은 그 후에 잡아.”

수행인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지만 요한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낯익은 풍경들이 펼쳐졌다. 광장을 지나쳐 갈 무렵에는 리세트의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일 그리워한 미소였지만 수도로 돌아왔다는 자각을 하니 더욱 보고 싶었다.

광장 안에 자리한 상점가 주변에 리세트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어서. 그걸 먹겠다며 계절의 변화를 손꼽아 기다리던 아내가 떠올라 저절로 미소 지어졌다.

이제 곧 리세트가 바라는 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더위에 취약해 힘들어하면서도 오로지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자고 여름을 기다리다니.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기다림이지만 기꺼이 함께 기다려 주었다. 리세트가 그걸 원하니까.

봄을 지나 여름이,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올 것이다. 끔찍한 존재는 가을과 겨울의 사이, 차가워지는 바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나겠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경직된 등줄기를 타고 싸한 바람이 지나쳐 가는 듯했다.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지.

아이 생각을 그만 미루어 둔 요한은 소중한 아내의 얼굴만 되새겼다. 창밖의 풍경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을 무렵 수행인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집. 사랑하는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 ❖ ❖

대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요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정보다 이른 귀환이지만 그가 타고 온 마차를 곁눈질하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거슬렸다. 당혹스러운 것보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요한을 그렇게 바라보곤 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유독 하얗게 질리는 얼굴이나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는 그 모습이 괜한 불안을 부추겼다.

설마 리세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요한은 수행인이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려섰다.

햇빛을 등진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들을 지나쳐 홀을 가로지르는 요한의 눈길은 2층을, 리세트의 침실이 있는 그곳을 향해 있었다.

곳곳에서 번지기 시작한 소란에 리세트가 계단으로 내려올 법도 한데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주인님.”

요한이 2층에 막 당도해 집무실을 스쳐 지나는 순간 집사가 달려왔다. 머뭇거리던 그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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