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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화 (1/151)

1화
사랑해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제논 제국을 괴롭혀 온 전쟁이 막을 내렸고, 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축복과 찬사, 아름다운 부부의 출발을 환영해 주는 인사들.

계속 그런 날들이, 이 행복한 순간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리세트는 따듯한 남편의 품 안에서 반짝 눈을 떴다.

“불안해.”

리세트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던 손이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본래의 움직임을 되찾았다.

“왜?”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고심하는 리세트의 이마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요한은 리세트의 눈가를 매만지며 눈을 맞추었다. 졸음이 가득 몰려온 초록빛 눈동자가 그를 미소 짓게 했다.

“뭐가 불안해.”

“……그냥, 모르겠어. 계속 불안해.”

뒤척이느라 살며시 내려간 이불을 다시 올려 덮어 주며 요한은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실었다. 깊이, 더 깊이 안아 주는 넓은 품속으로 리세트는 얼굴을 묻었다.

“너무 행복해서 무서운가 봐.”

리세트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행복 속에서 유일한 불안을 찾는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안 돼.”

단호한 거절의 말이 리세트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요한은 무어라 대꾸하려는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안 돼, 리세트. 너도 알잖아.”

무심코 자신의 배를 감싼 리세트는 입술을 앙다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세트가 임신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늘 함께 몬스터 토벌에 나섰다. 이제는 제국을 괴롭혔던 흉악한 몬스터들이 대륙의 끝자락까지 내몰린, 말 그대로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지만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절대로 다치면 안 돼. 알겠지?”

그래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걱정하지 마.”

요한은 리세트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지워 주고 싶어 더욱 깊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죽은 몬스터들의 잔해만 치우는 작업이야. 더 이상 이 제국에 위험은 없어.”

품에 안은 아내를 달래 준 후 요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실을 떠나기 전, 그는 다시 한번 아내의 뺨에 입 맞추었다.

“어서 자.”

리세트는 착한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고, 그 소리는 천천히 멀어지다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조용한 발걸음 소리마저 사라지자 온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내일 요한이 떠난다.

나를 남겨 두고 혼자, 그 위험한 곳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시선이 캄캄한 밤하늘 위에서 멈추었다. 포근한 달빛이 투명한 창문 위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한 번만 더. 얼굴만 보고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고민을 끝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침대맡에 놓인 숄을 어깨에 단단히 여민 리세트가 문밖으로 나섰다.

부부의 공간인 2층에는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작은 집무실이 있었다. 그곳은 리세트의 침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언제나 문을 굳게 닫아 놓지 않아 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양초의 불빛이 사방을 수놓아 그리 어둡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그려진 이정표 같은 빛이 사라진 건 내심 아쉬웠다. 리세트는 그 불빛이 일렁이곤 했던 바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문을 두드리려던 리세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 건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온 순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지?

덜컥 불안해진 리세트는 배를 감싸 안으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리세트가 알아서는 안 돼.”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무슨 일이냐며 따져 묻고 싶은데, 차가운 목소리가 모든 전의를 사그라지게 했다. 몸은 바보처럼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지금 죽어 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그런 건 애초에 생겨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언제나 사랑을 속삭여 주었던 그 낮은 음성이 이 순간만큼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요한의 목소리였으니까.

만류하는 듯한 집사의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결국 그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 후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리세트는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막막해진 의식을 차지한 건 오직 하나. 죽여. 그 말을 내뱉은 무심한 목소리가 전부였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을 들어 리세트는 입술을 단단히 막았다. 숨을 죽여 자리를 벗어나던 리세트의 귓가로 또렷한 목소리가 다시 스쳤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안 돼. 반드시 죽여.”

❖ ❖ ❖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헐떡이며 숨을 내뱉은 리세트는 문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일정하게 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틀림없는 요한의 것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리세트는 엉금엉금 기어 침대에 당도했다.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숨을 죽인 순간 문이 열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곧이어 침대가 작게 흔들렸다.

왜, 어째서 그런 말을 했어?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야? 설마, 우리 아기는 아니지? 그렇지?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말해 줘.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울음과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리세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살며시 이불을 들어 올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금세 등 뒤로 따스한 온기가 닿아 왔다. 단단한 팔이 리세트의 머리를 받쳐 주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랑해.”

귓바퀴와 목, 어깨를 지난 입술이 뺨을 스쳤다. 달콤한 고백이 리세트의 입술 위에서 부서졌다.

“사랑해, 리세트.”

새가 부리를 비비는 듯한 정다운 입맞춤 끝에 요한이 멀어졌다.

“금방 다녀올게.”

문이 닫히고 조용한 발걸음 소리마저 사라졌을 때 리세트는 눈을 떴다. 뿌연 시야에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움켜쥔 손으로 가슴께를 퍽퍽, 아무리 세게 두드려 보아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사랑해.’

그 다정한 고백을 건넨 남자가.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쏟아져 내린 눈물이 베갯잇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리세트는 일어설 수 있었다.

“……안 돼.”

요한은 아이를 죽일 거야. 죽일 생각인 거야.

그 끔찍한 판단이 바로 서자 달콤했던 목소리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어두운 하늘 저편을 바라보던 리세트는 서랍에 정리해 놓은 약초 꾸러미와 두꺼운 모포,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여러 벌 챙겼다. 갈색 가죽 가방에 욱여넣듯 짐을 챙기는 순간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창백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 ❖ ❖

허름한 여관의 문을 연 리세트는 뒤집어쓴 로브를 더욱 푹 눌러썼다.

“묵을 곳을 찾고 계시오?”

걸걸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한 여관의 주인이 다가왔다. 머리부터 온몸을 칭칭 감싼 차림새가 수상했지만 문 앞에서 이리저리 기웃대는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은 방이 있나요? 빨리 쉬고 싶은데.”

“방은 있지요. 그런데 손님께서는…….”

찬찬히 리세트를 훑어보던 주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체구가 작아 당연히 여자일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영 찝찝했다.

이 늦은 시간에, 아니지, 늦었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한참을 늦은 새벽을 틈타 외진 여관으로 올 여자가 많지는 않다.

전쟁이 끝나 세상은 평화로워졌지만 범죄는 오히려 들끓었다. 목숨은 확보되었으나 배고픔은 깊어졌다. 전쟁의 상흔이 남지 않은 수도라고 해서 좀도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상쩍은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은 곧 마음을 놓았다. 여자가 도둑질을 하러 왔다고 해도 그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어서 안내해 줘요.”

가냘픈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괜한 걱정까지 싹 날아갔다.

“어서요.”

주인은 리세트가 건넨 작은 주머니를 잡아채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내쫓으려 했지만 거금을 지불하는 손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조막만 한 여자쯤이야, 뭐.

“어휴, 빨리 따라오셔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피곤하시겠네.”

앞장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주인은 복도 끝에 자리한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편히 쉬십시오.”

문을 열자 낯선 방 안에 감돌고 있던 차가운 바람이 리세트에게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로브 자락이 펄럭였다.

덮어쓴 로브가 벗겨지지 않게 꼭 붙잡은 리세트는 계단 밑으로 사라지는 주인을 흘끔거리다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왔다. 열려 있는 창문을 조급한 손길로 닫고 커튼까지 단단히 쳤다.

아직 어둠이 더 짙은 새벽의 시간이니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그녀가 사라진 걸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거다.

안도감이 밀려들자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푹 눌러쓴 로브의 모자를 벗어 넘긴 리세트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로브로 감추어 둔 은빛의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등허리로 흘러내렸다.

‘아이는 없어도 돼. 리세트, 너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나는 그거로 충분해.’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의 밤, 요한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라 리세트는 창문을 등진 채로 멈추어 섰다. 요한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임신 소식을 전할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임신했다는 말을 처음 들은 요한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그려졌는지, 마지못해 웃어 주던 그 순간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리세트는 서글픈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렇구나.’

한참 침묵하던 요한이 전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어쨌든 우리의 아이니까. 요한이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으면 해서 일부러 아기 얘기를 많이 재잘댔다.

그럴 때마다 미묘하게 겉돌던 대화의 방향을 리세트는 최선을 다해 부정해 왔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건 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방법이 없었다. 요한이 리세트의 눈을 속이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 어떻게 해서든 목적을 달성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어서.

침대에 몸을 누인 리세트는 배를 소중히 감싸 안으며 눈을 감았다. 퀴퀴한 냄새가 묻어나는 이불을 덮으려 손을 뻗던 순간에 바깥에서 때아닌 소란이 벌어졌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리세트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힘껏 움켜쥐었다. 로브의 모자는 다시 푹 눌러쓴 채였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철컥,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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