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붉은 갑주를 두른 기사단이 전장을 가로지른다.
그 앞을 악마와 드래곤이 되지 못한 괴물.
그리고 잘못 만들어진 거신이 가로막았다.
허나 기사단의 질주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촤악-!
선봉에 선 기사가 휘두른 칼에 악마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 뒤를 이어 중미에 선 기사들이 드래곤이 되지 못한 괴물, 드라칸의 날개를 잘라냈다.
그 놀라운 연격에 악마들이 눈을 치켜뜬 그때였다.
후미에 선 기사들이 거칠게 소리쳤다.
“거신의 약점은 발목이다! 우리가 놈을 교란하지!”
이 말과 함께 후미에 선 기사들이 고삐를 휘어잡았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군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정면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돌격을 지켜보던 거신병이 이를 갈았다.
[크오오오-!]
거신병이 예고 없이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지면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덕분에 지상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지만 거신병을 향해 달려가는 기사단은 달랐다.
휘이이잉-!
그들의 태운 군마는 지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향해 뛰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으면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 묘기와도 같은 질주 속에서 결국 후미에 선 기사단이 거신병의 지척에 도달했다.
그 순간 기사단이 쇠사슬로 묶인 창을 치켜들었다.
촤악-!
재빠르게 뻗어나간 20개의 창이 거신병의 발목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양방향으로 찢어져 달리기 시작한 기사단이 거신병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당황한 거신병이 쇠사슬을 떨쳐내기 위해 손을 휘둘렀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악마와 드라칸을 학살하던 또 다른 레버쿠젠 기사단이었다.
확-!
그들이 거신병의 손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단 한번도 베어내지 못한 거신병의 피부에서 녹색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처음으로 고통을 느낀 거신병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크와와왁-!]
고통을 참지 못한 거신병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태산과도 같은 덩치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게 휩쓸렸다.
하지만 기사단은 그 난장판 속을 유유히 벗어났다.
그리고 거신병의 뒤를 점한 채 높이 뛰어올랐다.
[…!]
눈을 치켜뜬 거신병이 등 뒤에서 느껴져 오는 낯선 감촉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허나 이미 달리기 시작한 기사단은 그 눈먼 손짓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 후 거신병의 머리까지 거침없이 질주한 기사단이 눈빛을 번뜩였다.
“네놈들에게 칼이 통한다면 두려울 게 없지.”
이 말과 함께 다섯 명의 기사가 검을 휘둘러 거신병의 머리를 베어냈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한 거신병의 목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악마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하등한 인간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신병.
그들의 두꺼운 피부는 인간이 자랑하는 온갖 무기는 물론이고 기사들의 검기마저도 잘라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거신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하등한 인간들한테 장난감 마냥 난도질 되고 있었다.
그 광경은 공포를 모르는 악마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레버쿠젠 기사단은 놓치지 않았다.
“가주 가십시오-!”
외침과 함께 쓰러진 악마 거신병을 뒤로한 레버쿠젠 기사단이 양옆으로 늘어섰다.
“길을 뚫었습니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이 말과 함께 레버쿠젠 기사단이 양옆으로 밀려오는 악마와 드라칸들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뻥뚫린 길 너머.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괴물, 라 하르칸이 보였다.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엘린이 눈을 치켜떴다.
‘도망치려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니었다.
생존을 갈구하는 한낱 미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생존에 집착이 강한 라 하르칸이라면 이 이상 자존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내가… 인간의 칼날에 쓰러… 진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말을 되풀이하는 놈이 날갯짓을 했다.
예상대로 전장에서 도망치기 위해 날아오르려는 모양이었다.
만약 놈이 다시 허공에 떠오른다면 더 이상 추격할 수단이 없는 상황.
그랬기에 엘린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
간신히 고통을 이겨내며 일어나던 라 하르칸이 눈을 흠칫 떴다.
뻥 뚫린 길 너머.
새하얀 섬광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며 소리쳤다.
[엘린 레버쿠젠-!! 네 놈이 진정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거친 외침과 함께 라 하르칸의 주둥이에서 불꽃이 모여든다.
드래곤 브레스.
오로지 드래곤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권능이 세상 밖으로 토해져 나온 것이다.
허나 엘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근.
제 심장에서 울려되는 또 다른 울림.
누군가 전해준 아주 소중한 그 울림이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가거라 나의 기사야. 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엘린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존재시여.”
이 말과 함께 엘린이 드래곤 브레스와 정확히 맞부딪쳤다.
쾅-!
울려퍼지는 폭음과 함께 드래곤 브레스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경악을 토해내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된다! 이건 거짓이다! 인간이 내 브레스를… 브레스를…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몸을 부르르 떤 라 하르칸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늦은 날갯짓을 시도하며 허공에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라 하르칸에 도착한 엘린이 검을 치켜들었다.
촤악-!
흩뿌려지는 달빛과 함께 라 하르칸의 거대한 날개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른 라 하르칸이 추하게 지상으로 추락하며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죽을 수 없다…. 천 년을 기다려 간신히 되살아났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엘린이 천천히 대답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먹고 사는 녀석이 정작 자신이 죽을 각오는 하지 않았어?”
이 말과 함께 엘린이 검을 치켜들었다.
번쩍이는 달빛에 라 하르칸이 악을 질렀다.
[저주한다! 엘린 레버쿠젠! 내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너에게 가장 끔찍한 저주를 내리겠다!]
엘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지옥이야.”
[…?]
“네가 모든 걸 빼앗아가서 이미 지옥이라고.”
엘린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런 내게 저주를 내려봐야 하나도 안 두려워. 그러니까….”
치켜든 검에서 달빛이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눈을 치켜뜬 라 하르칸이 몸을 비틀었다.
허나 이미 늦은 뒤였다.
푹-!
폭발한 달빛이 목을 넘어 심장을 꿰뚫었다.
천년 만에 되찾은 심장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그 속에서 엘린이 뒷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좀 죽자 이 괴물아.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니깐.”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의 육체에서 거친 빛이 터져 나왔다.
화악-!
쏘아져 나간 달빛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그 빛과 함께 점점 검은 재로 변해가던 라 하르칸이 중얼거렸다.
[살… 고… 싶어….]
이 말과 함께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괴물이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달빛의 중심에서 지켜보던 엘린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낮은 탄식과 함께 사라져 가던 달빛에서 흐릿한 잔영이 보였다.
홀란 레버쿠젠.
그리고 자신에게 또 다른 심장을 준 은빛 비늘의 드래곤이었다.
두 존재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엘린을 향해 속삭였다.
[수고 많았다 엘린.]
이 말과 함께 잔영이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엘린이 침묵하다 흠칫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엘린이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전해준 심장의 울림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아직 남아있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엘린이 중얼거렸다.
“다 끝났어.”
복수도 원한도 전쟁도.
길고 길었던 서막이 마침내 막이 내린 순간이었다.
* * *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천 년을 산 하이엘프.
하이네스의 몸에 둘러져 있던 검은 색 기운이 하늘로 솟구쳤다.
쿠크크크-!
하늘을 가르며 뻗어나간 검은색 기운이 점점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괴물 혹은 괴물이라 불리는 무언가였다.
난생처음 보는 그 끔찍한 형태에 지니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게… 정령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저런 끔찍한 괴물이 정령이라니.
그건 옆에 있던 실프와 노움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저게 정령이야?]
[저건 정령이 아니라… 괴물 아니야?]
이 말과 함께 두 정령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을 때였다.
하이네스가 돌연 손짓했다.
“……!”
그 손짓에 형체를 갖추어 나가던 괴물이 입을 벌렸다.
그 순간 검은색 점액질이 지상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흠칫 놀란 지니가 귀를 파르르 떤 그때, 검은색 점액질이 무언가로 변했다.
“…엘프?”
점액질이 변한 것은 놀랍게도 엘프였다.
형체가 다 일그러지긴 했지만 뾰족한 두 귀만은 온전히 가진 엘프.
그 탓에 지니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 그 때, 하이네스가 중얼거렸다.
“먼 옛날 엘프의 왕국이 존재했었죠…. 하지만 그 왕국은 천사들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말과 함께 하이네스가 방긋 웃었다.
“그 왕국에서 살아남은 건 저 혼자였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지니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설마 당신… 같은 동포를 팔아 넘긴 거예요?”
하이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감이 조금 그렇긴 하지만… 예 맞습니다 지니.”
하이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죽어가던 엘프들을 제물로 바쳐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왕이고 이들은 백성. 죽어서도 저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숙명대로 저는 제 백성들을 제물로 바치고 살아남았습니다.”
이 말과 함께 하이네스의 두 귀가 쫑긋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피부 색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순백색의 피부에서 탁한 검은 색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던 지니가 입술을 악물었다.
“엘프 왕국을 멸망시킨 건 천사가 아니라 너야.”
하이네스가 대답했다.
“왕국과 백성은 왕이 있기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났으니 왕국과 백성은 또다시 만들면 그만이에요.”
하이네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 멸망을 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제품에서 살아 숨 쉬지 않습니까?”
이 말과 함께 점액질로 변한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니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괴로워하고 있어… 지금도 고통을 느끼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저들은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 고통을 느꼈다는 이야기다.
그 사실에 지니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오랜만에 진짜 죽이고 싶은 년이 나타났네.”
이 말과 함께 지니가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옆에 있던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지, 지니!]
[지, 진정해! 일단 도망치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지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도망칠 수 없어.”
지니가 눈빛을 번뜩였다.
“이성이나 상황을 따질 때가 아니야. 지금 눈앞의 저년을 모가지를 비틀지 않으면 분해서 참지 못하겠어.”
[…….]
“그러니 도망치려면 너희 둘이라도 도망쳐. 말리지는 않을게.”
지니의 단호한 어조에 실프와 노움이 눈을 치켜떴다.
[…….]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본 실프와 노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지니의 곁으로 다가와 서서 중얼거렸다.
[…아더보다 무대포인 귀쟁이와 엮일 줄이야.]
[귀쟁이란 말은 취소해 노움. 지니는 지니야.]
두 정령의 말에 지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든든하네. 자… 그러면.”
말을 흐린 지니가 검은색 점액질을 향해 뛰쳐나갔다.
“어떻게든 한 번 해보자고!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으니깐!”
이 말과 함께 두 정령이 지니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실프의 능력이 지니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노움의 능력이 지니의 앞을 가로막는 점액질 괴물들을 막았다.
그 때 괴물이 포효를 토해냈다.
[…!]
눈을 치켜뜬 실프와 노움의 몸이 굳어졌다.
괴물을 견제하던 엘퀴네스도 다름이 없었다.
그 심상치 않은 반응에 지니가 힐끔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얘들아 왜 그래!”
그 외침에 노움이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지니.]
이 말과 함께 노움이 빛으로 변했다.
“…!”
그 변화에 지니가 깜짝 놀라는 사이 실프와 엘퀴네스도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 예상치 못한 변화에 당황한 지니가 중얼거렸다.
‘뭐? 정령계로 역소환당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포효만으로 정령들을 정령계로 역소환시킨 거지?
처음 겪어보는 변화에 지니가 당황해 주춤거렸다.
그리고 그 빈틈을 하이네스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컥-!”
뒷덜미를 붙잡힌 지니의 고개가 강제로 돌려졌다.
피부색이 검게 변한 하이네스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엘프가 정령을 쓰지 못하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죠.”
빙그레 웃은 하이네스가 선언했다.
“포기하세요, 지니. 저는 당신을 못 이깁니다.”
이 말에 지니가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정령들이 역소환….”
“모든 정령의 원조가 저기 있습니다.”
“…?”
“저들에게 있어 저 원시정령은 부모와도 같은 존재. 그 부모의 말을 어길 수 있는 정령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지니가 눈을 치켜떴다.
그 속에서 하이네스가 지니의 뒷덜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 이제 끝입니다, 지니.”
“….”
“엘프가 정령을 쓰지 못하는 이상 당신이 절 이길 확률은 없습니다. 순수히 제 백성이 되세요. 당신의 삶을 제가 다시 살아가겠습니다.”
하이네스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지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가 엘프가 정령밖에 못 쓴대?”
“…?”
“천 년이나 산 노인네라 그런가. 유행에 뒤처져도 너무 뒤처진 거 아니야?”
하이네스가 눈을 치켜떴다.
그와 동시에 거친 총성이 울려퍼졌다.
입을 벌려 놀란 하이네스가 중얼거렸다.
“엘프가… 총을 쓴다고?”
지니가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왜? 총 쏘는 엘프 처음 보냐?”
이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에서 다시 한번 불이 뿜었다.
비스트라는 이름을 가진 권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