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칼을 휩쓴다.
카셀은 그 기분 좋은 느낌에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 후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더럽지 않습니까?”
이 말에 아이린이 중얼거렸다.
“누가요? 카셀이요?”
“예… 분명 피투성이일 텐데.”
“…저도 피투성이에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카셀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피투성인 치고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지금 저 유혹하는 거예요?”
“어라? 유혹해도 되는 겁니까?”
“….”
아이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카셀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귓가를 살랑이는 그 기분 좋은 웃음에 아이린이 중얼거렸다.
“카셀… 죽지 마요.”
이 말에 카셀이 대답했다.
“저도 죽기 싫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의원한테 가죠.”
“아뇨. 의원한테 가기 전에 먼저 죽을 겁니다.”
아이린이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그게 말이 돼요!? 살고 싶다는 사람이… 사람이… 왜 치료를 안 받으려 하는 거예요!”
아이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발 고집 부리지 말고… 저랑 같이 가요. 지금이라도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을지 몰라요….”
카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랐던 그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민했다.
‘아이린의 말대로… 치료를 받아볼까?’
만약 치료를 받아 살 수 있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도 아직 죽고 싶지 않았으니깐.
하지만 카셀은 곧 고개를 저었다.
두근…
몸도 심장도.
진작 한계를 넘은 상태였다.
속된 말로 지금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다.
그런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더 욕심을 부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쓸 수 있는 기적은… 이미 충분히 다 쓴 상태다.’
할리버라는 세기의 칼잡이.
어쩌면 검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가장 강한 칼잡이일지 모르는 그를 천운에 기대어 이겼다.
그런 자신에게 더 이상의 기적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카셀은 쓴 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의원에게 간다한들… 저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아이린.”
“…카셀!”
“설령 간다고 한들, 그전에 제 숨이 먼저 끊어질 겁니다. 그럼 저는 가장 행복한 순간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하고 가겠지요.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에 카셀의 머리 위로 무언가 뚝뚝 떨어졌다.
아이린 바이에른의 눈물이었다.
카셀은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마십시오…. 아이린도 저도… 이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고,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으니깐.”
카셀의 부탁에도 아이린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 탓에 카셀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 어떻게 하면 자신을 웃는 얼굴로 보내줄까.
고심하던 카셀은 곧 적당한 답을 찾아내고서 질문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아이린이 눈물을 흘리다 멈칫했다.
“…전황이요?”
“네. 하트… 우리와 함께 싸웠던 전우들. 그들이 지금도 힘을 내고 있습니까?”
아이린이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주제를 돌리려는 카셀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다.
하지만 아이린은 그 의도가 뻔하다는 것을 암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셀의 시선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힘을 내는 것 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싸우고 있어요.”
카셀이 빙그레 웃었다.
“그 싸움에서 이기고 있습니까?”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번쩍이는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하늘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한데 엉켜 있었다.
한쪽은 여섯 마리의 드래곤.
다른 한쪽은 그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그리고 그 괴물에게 맞서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레버쿠젠을 위하여-!”
거친 외침과 함께 엘린 레버쿠젠이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라 하르칸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터지는 피분수와 함께 라 하르칸이 거친 비명을 질렀다.
허나 엘린 레버쿠젠을 따르는 드래곤들은 그런 라 하르칸의 비명을 참아주지 않았다.
콰직-!
이미 피투성이인 드래곤들이 라 하르칸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라 하르칸인 그런 드래곤들을 상대로 거친 몸부림을 쳤지만 여섯 마리의 드래곤들을 이기지는 못했다.
쿵-!
결국 지상으로 추락한 라 하르칸이 신음을 토해냈다.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이린이 목소리 끝을 떨며 중얼거렸다.
“고, 괴물이 쓰러졌어요 카셀-!”
카셀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괴물이라면… 라 하르칸 입니까?”
“네, 네!! 그 괴물을… 그 괴물을….”
말을 흐린 아이린이 환호했다.
“엘린 레버쿠젠! 이 땅의 주인이 쓰러트렸어요!”
카셀이 웃음을 터트렸다.
“뛰어난 기사인 줄 알았는데… 그 괴물을 쓰러트리다니… 역시 대단하군요….”
이 말과 함께 카셀이 다시 질문했다.
“다른 쪽 진영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잘 싸우고 있습니까?”
아이린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악마들에게 성벽을 빼앗겼던 레버쿠젠 군인들이 거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위대한 주인을 위하여-!”
그 외침과 함께 성벽 위의 악마들이 조금 씩 후퇴한다.
여태 두려움을 모르고 전진만을 하던 악마들인 것을 고려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허나 레버쿠젠 군인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 몸을 던져 악마들을 밀어냈다.
그 광기와도 같은 전진은 결국 악마들을 성 벽 위에서 몰아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휘하는 한 남자가 피를 토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남쪽의 진영이 헐겁다! 북쪽에서 지원을 보내! 남은 공백은 시민들로 잠시 매꾸고 어떻게든 양방향의 성벽을 사수한다!”
윌렛 크레스톨.
이 곳, 북부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도시인 아케인에서 달려온 그 연료한 노인이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높은 마루에서 모두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아이린이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하며 다시 설명했다.
“모두… 모두 싸우고 있어요. 그리고….”
말을 흐린 그녀가 눈빛을 반짝였다.
“이대로라면… 이길 수 있을지 몰라요 카셀. 이 전쟁에서 저희가 승리할지도 모른다고요!”
카셀이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럼 아이린. 전쟁에서 승리하면 뭘 할 겁니까?”
아이린이 눈을 깜빡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뭘 하거냐고요?”
“예. 살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저희 모두 살 수 있습니다…. 그 삶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카셀의 질문에 아이린이 잠시 망설였다.
‘나는 뭘 하고 싶지?’
살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정작 그 욕망을 충족한 뒤는 생각해놓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으니깐.
하지만 조금의 고민 끝에 금방 그림이 그려졌다.
이 모든 전쟁이 끝난 뒤.
모든 문제가 해결하고 난 뒤의 먼 미래.
그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리던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여행을 하고 싶어요.”
카셀이 웃음을 터트렸다.
“들었던 것 같군요… 여행을 하고 싶다고. 그럼 가장 먼저 어디를 가고 싶습니까?”
아이린이 금방 대답했다.
“아케인이요. 오라버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가 바로 아케인이라고. 그곳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이라고.”
카셀이 질문했다.
“그 아케인에서 뭘 하고 싶습니까?”
“어… 아케인에는 뭐가 유명하죠?”
“아케인에서는 뭐든 다 유명합니다.”
아이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성의 없는 설명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만… 진짜 그렇습니다, 아이린. 아케인에서는 모든 것이 다 유명해요.”
“음… 그러면 모두 구경할래요.”
아이린이 상념에 젖어든다.
그 상념은 곧 그녀의 입 밖을 통해 나직한 노랫소리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유명하다니 일단 거리를 걸어볼래요. 그 다음은 유명한 관광명소를 가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들어갈래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다음 날에는 노천 카페에서 푹 쉬고 싶어요.”
카셀이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쁘지 않군.’
마지막에 그녀가 울지 않는 모습을 봐서 다행이다.
웃지는 않지만 적어도 행복을 그리는 모습을 봐서 좋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른 카셀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인생이군.’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이뤘다.
복수도 원하는 것도 지켜내고 싶은 것도.
하나도 이루기 힘든 것을 세 가지나 쟁취했다.
그랬기에 카셀은 아쉬움을 뒤로 했다.
이제야 편히 쉴 수 있게 된 지금.
뒤늦은 후회를 하기에는 이 시간이 너무 값졌으니깐.
그래서 손을 뻗은 카셀이 아이린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예상치 못한 손길에 깜짝 놀란 아이린이 굳어졌을 때, 카셀이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아이린.”
“……!”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저는 사랑이란 감정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겠지요.”
카셀이 웃었다.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울지 말고 웃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아이린.”
이 말과 함께 카셀의 손길이 점차 멀어졌다.
굳어져있던 아이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카셀?”
“….”
“카… 셀?”
대답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린은 깨달았다.
어느 사이엔가 제 무릎에 누워있는 남자의 숨결이 멎어있단 것을.
“…….”
아이린이 고개를 숙였다.
웃고 있는 카셀이 보였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은 도저히 죽음을 맞이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온기가 그가 마침내 삶을 달리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순간 아이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전쟁의 패배를 막은 영웅.
바이에른의 기사단의 캡틴 카셀.
그가 치열한 전투 끝, 마지막 삶을 달리한 순간이었다.
* * *
라 하르칸이 쓰러졌다.
[크와와왁-!]
비명을 내지른 괴물이 자신을 신으로 떠받드는 악마들을 깔아뭉개며 발버둥 쳤다.
그 모습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켜보던 엘린이 소리쳤다.
“레버쿠젠 기사단-!”
그 외침에 악마 진영을 헤집던 레버쿠젠 기사단이 반응했다.
“모두 내 뒤에서라-! 지금부터 괴물을 사냥한다!”
“…!”
눈을 치켜뜬 레버쿠젠 기사단이 말머리를 돌렸다.
휘잉-!
길게 울부짖은 군마들이 한 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린이 근처에서 주인을 잃고서 방황하던 말의 안장 위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네 주인의 복수를 해줄게. 그러니 날 위해 달려줄 수 있어?”
엘린을 태운 말이 길게 울부짖었다.
휘이잉-!
빙그레 미소 지은 엘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제 뒤에 도열한 레버쿠젠 기사단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 중 가장 연로한 기사가 나와 머리를 숙였다.
“가주. 명령을 내리십시오.”
엘린이 단번에 입을 열었다.
“제가 저 괴물의 목을 칠 수 있게 길을 터주세요.”
레버쿠젠 기사단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당신의 뜻대로 길을 터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레버쿠젠 기사단이 엘린을 제치고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엘린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뒤따랐다.
그 질주를 근처 평야에 내려앉아 지켜보던 붉은 빛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인간은 참으로 놀라워.]
옆에 있던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대답했다.
[동감일세. 천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저들은 도대체 왜 꺾이지 않은지 의문이군.]
또 다른 드래곤이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우리들은 이렇게 꺾여버렸는데 말이지.]
[…이 전쟁에서 꺾여버린 건 아무래도 우리만인 것 같군.]
이 말과 함께 드래곤들이 고개를 돌렸다.
지상으로 내려왔지만 아직 건재한 라 하르칸이 보였다.
놈을 따르는 악마들도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허나 그에 못지않게 인간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라 하르칸을 향해 달려가는 레버쿠젠의 기사단.
그 기사단을 뒷받침하는 레버쿠젠 군인들.
그들 모두 전쟁이 시작되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며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붉은 빛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전쟁은 우리가 없었어도 이렇게 되었을지 모르겠군.]
옆에 있던 드래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우리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방법은 찾아냈을 거야.]
붉은 빛 드래곤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쉴 수는 없지.]
이 말과 함께 붉은 빛 드래곤이 심장을 울렸다.
쿠웅-!
그 울림과 함께 붉은 빛 드래곤의 마지막 남은 마력이 기적으로 뒤바뀐다.
그리고 그 기적은 곧 레버쿠젠 기사단에게 전해졌다.
“…!”
눈을 치켜뜬 레버쿠젠 기사단이 제 몸을 뒤덮은 신비로운 힘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상처투성이인 붉은 빛 드래곤이 있었다.
[…앞을 향해 달려가게. 그리고 자네들의 주인에게 우리를 대신해 길을 터주게.]
거리가 있었지만 레버쿠젠 기사단은 드래곤의 부탁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레버쿠젠 기사단이 고개를 돌렸다.
[크와와왁-!]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
그리고 악마 거신병.
드래곤이 되지 못한 괴물인 드라칸이 보였다.
눈빛을 번뜩인 레버쿠젠 기사단이 칼을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싸움이다… 레버쿠젠 기사단.”
이 말과 함께 레버쿠젠의 성위로부터 드래곤이 새겨진 깃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 싸움을 우리 손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번 전쟁은 우리 레버쿠젠이 승리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