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두근.
그 박동과 함께 아더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운 감각.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지금과 달리 검강도 그렇다 해서 별다른 혈통도 없던 시절.
자신을 지켜주고 때로는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던 혈통.
‘테이큰. 미친 광전사의 핏줄… 인 트롤.’
그 무지막지했던 괴력이 다시금 온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아더가 짜릿한 전율을 느꼈을 때였다.
마드리드의 마법에 소멸되어 사라져 가던 추방자들의 영혼이 하나둘 속삭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설마 바이에른인가?]
[아니. 바이에른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그럼 어째서 저 인간에게서 우리의 친구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아더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재가 되어 가는 수많은 시체들이 보였다.
‘아니. 저들은 시체가 아니야.’
트롤의 혈통을 다시 흡수해서일까.
분명 시체여야 할 그들의 모습이 아더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외형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려있는 영혼도 있었고, 또 다른 영혼은 고블린과 비슷하게 생긴 갈색 난쟁이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닌 아더의 상상력으로는 전혀 그릴 수 없는 수많은 종족이 재로 되어가는 시체들 사이에서 엿보였다.
‘옛날에는 진짜 수많은 종족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 종족들과 함께 이 대륙에서 살아갔구나.
새로이 깨달은 사실에 아더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흐를 때였다.
재로 변하던 시체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트롤의 기운이 저 인간에게서 느껴진다.]
[어째서 사라져 버린 트롤의 기운이 저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거지?]
[설마 트롤이 저 인간에게 흡수당한 건가?]
그 수군거림을 조용히 엿듣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흡수한 게 아니에요.”
[…?]
“트롤 씨는 저에게 힘을 빌려주기로 했어요. 대신 저는 트롤 씨를 다시 세상 바깥으로 데려다주기로 약속했고요.”
이 말에 시체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뭐? 우리를 다시 바깥 세상으로 돌려준다고?]
[추방자인 우리를?]
[하지만 일개 인간이 네가 어떻게 우리를 바깥 세상으로 돌려준단 말이냐?]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일개 인간이 아니에요.”
[…?]
“제 등뒤에 달린 날개 보이시죠? 저는 인간이지만 바이에른의 핏줄을 이어받았어요.”
추방자들이 숨을 참았다.
바이에른의 핏줄?
그렇다면 저 인간이 그 옛날,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천사 바이에른과 똑같은 피가 흐른단 말인가?
천년 만에 마주한 놀라운 사실에 추방자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 속에서 아더가 손을 뻗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힘을 빌려주세요.”
[….]
“이대로 있으면 여러분은 천사, 마드리드의 마법에 의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릴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 힘을 빌려주시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 복수도 할 수 있어요.”
추방자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복수? 우리의 원한을… 네가 갚아준다고?]
아더가 방긋 웃었다.
“네. 저도 원한이 있거든요.”
[……]
“어때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래지 않아요? 힘을 빌려주고 복수를 대신해준다. 같은 적을 둔 지금 손을 잡을 명분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추방자들이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빤히 아더를 바라보았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한 사내가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한 점의 두려움도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은 누군가가 추방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날 믿고 조금만 자두라고 친구들.’
이 말과 함께 그 누군가가 씩 미소 짓는다.
‘언젠가 나와 자네들이 한 약속을 지켜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야. 그러니 그때를 참고 조금만 기다려. 그때가 되면 자네들은….’
말을 흐린 누군가가 눈빛을 반짝였다.
‘다시 자유가 될 거야. 그리고 살아갈 수 있을 거네. 그 찬란한 미래를 위해… 지금은 조금만 물러나도록 하지.’
상념을 끝마친 추방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갑작스러운 웃음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제가 한 말에 웃긴 부분이 있었나요?”
추방자들이 대답했다.
[좋다. 아더 바이에른.]
“……!”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우리의 영혼을 가져가라.]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 거친 돌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그 이변에 깜짝 놀란 아더가 물러섰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재로 변하기 시작한 추방자들의 신체가 빛의 알갱이가 되어 아더를 향해 날아왔다.
그 놀라운 변화 속에서 추방자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반드시 약속하거라. 우리를 바깥으로 되돌려 주겠다고… 그것이 천 년간 이 순간을 기다려온 인내의 대가다.]
이 말과 함께 빛의 폭풍이 위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어둠에 휩싸여 있던 비스트 안의 세계가 천천히 확장되었다.
칠흑 같던 어둠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밤하늘이었다.
무수히 많은 별이 박힌 아름다운 밤하늘.
그 광경을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와… 원래 이런 곳이었다고?”
그러는 한 편 의문도 들었다.
대체 비스트 안의 이 세계는 뭐하는 곳일까?
자연스레 아더가 상념에 잠기려는 순간이었다.
거친 고동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눈을 끔뻑인 아더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조금 전 들렸던 고동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
끔뻑이던 눈을 치켜뜬 아더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
심장이 울린다.
그런데 그 심장의 울림이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이 될지 모르는 울림이 제 심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더는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바이에른의 혈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사실을 깨달은 아더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거였군요. 바이에른 혈통의 의미라는 게.”
모든 비밀이 풀렸다.
동시에 해야 할 일도 명확해졌다.
이제 남은 건 결단을 내리는 것뿐이다.
* * *
마드리드가 폭소를 터트렸다.
“너희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순간 기적이 발현되었다.
그 어떤 말로나 설명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기적.
그 찬란한 빛이 터져나오자 마드리드의 앞을 가로막던 수많은 시체들이 별이 되어 사라졌다.
“천 년 전 내 손에 죽은 놈들이 또다시 시체가 되어 내 손에 죽는 구나! 이토록 기구한 운명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마드리드는 기적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시체들을 향해 자신의 마법이자 기적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허나 추방자들도 곱게 물러서지 않았다.
[또 한번 죽는다 한들 네 놈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이번에는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천 년전하지 못한 과업을 이번에는 반드시 완수 할 것이다!]
추방자들은 벽이 되어 마드리드의 앞을 막았다.
그 벽이 마드리드의 기적에 허물어지면 또 다른 벽이 그 앞을 또 가로막았다.
그 모습에 마드리드가 조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번 참에 모든 고리를 끊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기 전.
이곳에 남아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모든 것은 순리.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변함이 없다.’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눈앞에 있는 모든 추방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
눈빛을 번뜩인 마드리드가 양손을 맞대었다.
그 순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잉-!
옅게 울려퍼진 종소리가 세상으로 뻗어나갔다.
그 기이한 소리에 마드리드의 앞을 가로막던 추방자들이 눈을 치켜떴다.
[…이건?]
[그 소리다….]
[우리의 육체를 빼앗고,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그 소리다!]
웅성거림과 함께 추방자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때….”
말을 흐린 천사가 해맑게 웃는다.
“비로서 세상은 다시 아름다워지는 법이지. 이제 그만 잠들거라 과거의 망령들아.”
이 말과 함께 울려퍼진 종소리가 추방자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화악-!
그 순간 추방자들이 재가 되었다.
벽이 되었던 추방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마드리드의 손바닥에서 퍼져나간 종소리는 이 공간에 있는 모두를 집어삼켰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추방자들이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순간에 모두를 지워버린 마드리드가 고개를 숙였다.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거라. 그것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길이다.”
이 말과 함께 마드리드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 사이엔가 밤하늘이 되어 있는 이차원의 세상이 보였다.
시선을 좁힌 마드리드가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빠져 나가야 되겠군….”
이곳에서는 마법, 정확히는 발현할 수 있는 기적에 제약이 너무 많다.
방금 전 발현한 기적도 제 심력을 깎아내어 만들어낸 기적이었으니.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아직 정화하지 못한 세상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 과업을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돌아가야 했다.
생각을 끝마친 마드리드가 제 앞을 가로막는 이 이차원의 세상을 부수려던 순간이었다.
눈부신 빛이 제 앞에서 터져 나왔다.
“…!”
깜짝 놀란 마드리드가 물러섰다.
그 사이 솟구친 빛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이내 한 인영이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드리드가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천사?”
이 말에 빛이 된 인영이 대답했다.
“천사가 아니라 아더 바이에른인데요?”
마드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놀라워하며 제 앞에선 아더를 바라보았다.
화악-!
순백색으로 뒤덮인 아더 바이에른의 날개가 가장 먼저 눈에 뛰었다.
지금 제 등 뒤에 달린 날개보다 훨씬 크고 장엄한 빛을 두른 날개였다.
그랬기에 말이 되지 않았다.
천사의 날개가 두른 빛에 따라 그 존엄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더 바이에른이 나보다 더 뛰어난 천사라고?’
생각과 함께 마드리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과거의 망령들을 만나다 보니 헛것을 보는 모양이구나.”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헛것이 아닌데요?”
“아니… 너는 헛것이 맞다.”
이 말과 함께 마드리드가 두 손을 모았다.
“그러니… 바이에른의 잔재인 너도 그만 사라지거라. 이제 지겹다. 이곳에서 모든 걸 지워버릴 것이다.”
그 순간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대앵-!
옅게 퍼져나간 종소리가 아더 바이에른을 감쌌다.
그 모습에 마드리드는 아더 바이에른이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발현 할수 있는 기적.
그 기적의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이 종소리였으니.
모든 것을 정화하는 마법이자 기적에 저 만들어진 천사도 이제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빛이 터져나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
마드리드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그 속에서 아더의 등 뒤에 돋아난 날개에서 장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악-!
그 빛이 아더 바이에른의 몸을 감싼 걸 넘어 제 기적을 무력화시켰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마드리드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냐!”
그의 말에 아더가 천천히 진실이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뭐긴 뭐에요. 이제 끝이 다가온 거죠.”
그 순간 찬란한 달빛이 아더의 검 끝에서 피어올랐다.
밤하늘.
그리고 밤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자리.
그 한 폭의 그림의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빛나는 찬란한 달빛이었다.
그 속에서 아더가 담담히 선언했다.
“이제 진짜 끝을 내죠, 마드리드 씨. 당신의 목을 베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