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윌렛이 시가를 꺼내들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결국 시가의 끝에다 불을 붙였다.
진한 연기가 퍼져나가며 윌렛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그 기묘한 감각에 윌렛이 짜릿한 전율을 느낄 때 엘린이 황급히 뛰어왔다.
“없어요! 어디에도 없어요!”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윌렛이 시가를 입에서 땠다.
“없을 수 밖에. 이미 출발했을 테니깐.”
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출발이요? 대체 어딜 출발하는데요?”
“어디긴… 당연히 수도로 향했겠지.”
엘린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 진짜 수도로 향했다고요? 적이 코앞에 있는데?”
윌렛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더 급하게 출발한 건지도 모르겠군.”
“…네?”
“적이 코앞에 있으니 1분이라도 더빨리 적의 수장의 목을 따야 하지 않겠소?”
엘린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제국의 수도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런 판단을 한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깐깐한 노인이 그 상식을 모를리가 없었다.
허나 윌렛은 웬지 모르게 조금 전보다 편안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엘린이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순간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시선을 돌리니 눈을 끔뻑이고 있는 카셀 브리드.
바이에른 기사단의 캡틴이 보였다.
“어… 나중에 찾아올까요?”
카셀의 질문에 윌렛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급한 일 때문에 온 거 아닌가?”
카셀이 당황해 대답을 망설였다.
급한 일 때문에 온 건 맞지만 화가 단단히 난 엘린의 표정을 보니 선뜻 용무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때 윌렛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더 바이에른 때문에 온 건가?”
“……?”
“그 친구가 아무리 무대뽀라도 경위 없이 떠나지는 않았을 거고… 뭔가 준비를 해놓았겠지. 그리고 그 준비를 자네가 들고 있는 거 아닌가?”
카셀의 눈이 커졌다.
“그,그렇습니다. 아더가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 말에 엘린의 눈이 커지고 윌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럼 그 준비라는 걸 좀 보여줄 수 있나?”
카셀이 대답하는 대신 무언가를 내밀었다.
한 장의 양피지였다.
그 양피지를 받아든 윌렛이 안에 적힌 내용을 아주 느긋이 읽어내려갔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엘린이 다급히 외쳐 물었다.
“뭐라 적혀 있어요? 언질을 남긴 건 맞죠?”
윌렛이 침묵하다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언질을 남기긴 했군?”
이 말과 함께 손에 들린 윌렛이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그 후 시선을 돌려 카셀을 바라보았다.
“자네 소드마스터인가?”
윌렛의 질문에 눈치를 보던 카셀이 황급히 대답했다.
“예,옙 그렇습니다.”
“그렇군. 만나서 반갑네. 나는 윌렛 크레스톨. 미천한 신분으로 아케인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늙은이라네.”
“어… 알고 있습니다.”
“날 알고 있다고?”
“저도 한때 아케인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지라…….”
윌렛이 반색하며 카셀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이런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럼 이야기가 훨씬 수월하게 통하겠군.”
윌렛이 카셀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이제부터 자네가 총사령관이네.”
“……?”
“모든 명령의 우선순위는 이제부터 나도 아니고 저 레버쿠젠의 성주님도 아니야. 카셀 브리드. 자네의 명령권이 제1순위네. 일단 이것부터 기억하고 나머지는…….”
카셀이 눈을 끔뻑이다 경악해 소리쳤다.
“네, 네!? 제가 총사령관이란 말입니까?”
윌렛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뭐가 이상한가?”
“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 제가….”
“흠… 그 이유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어.”
윌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번 전쟁은 카셀 브리드. 이 친구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라고. 이게 아더 바이에른이 남긴 유일한 전언이네.”
* * *
아더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말을 탄 두 사람이 복잡한 표정으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한 명은 레온 마드리드.
제국 아니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혈통을 지닌 사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지니 데이븐.
엘프라는 특이한 혈통을 이은 귀쟁이였다.
그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뭔가 옛날 생각나네.’
이안 도르문트.
그를 죽일 때도 이 두 사람과 함께 북쪽을 달렸었다.
그 멀면서도 가까운 추억을 회상하던 그때 레온이 투덜거렸다.
“자네 때문에 잠도 안 깼는데 새벽바람을 맞아야 하는군.”
이 말에 아더가 레온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건 황자님 아니었어요?”
“이 사람아. 서둘러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 해서 이렇게 경위 없이 떠나나?”
“이래갔다 저래갔다… 역시 황자님 답네요.”
레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지니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고, 공자님?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라? 지니. 그것도 모르고 따라온 거예요?”
“…예? 말씀을 안 해주셨잖아요.”
“전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죠.”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요?”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의 수도요.”
“…!”
“그곳으로 가서 제 아버지를 암살 할 거예요. 그러니 지니도 단단히 마음먹어요.”
지니의 입이 벌어졌다.
‘…새벽부터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래?’
오랜만에 단잠을 자다 일어나 끌려왔더니 갑자기 제국의 수도라니?
그것도 단 세 명에서 그곳으로 가 제국의 황제를 암살한다는 이야기에 지니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레온이 하품을 하며 설명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지니 양. 제국의 수도가 멀긴 하지만 제가 미리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해놓았습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요?”
“네. 예전에 사라진 고대의 마법이죠. 그 마법을 발동시키면 순식간에 제국의 수도에 도착 할 수 있을 겁니다.”
설명을 끝마친 레온이 씩 웃었다.
그 느끼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바라보며 지니가 생각했다.
‘…아니.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는 게 문제가 아닌데?’
황제를 암살하러 간다는 게 진짜 근본적인 문제 아닌가?
그 탓에 지니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그때, 레온이 아더를 향해 질문했다.
“그보다 자네. 이렇게 말없이 나와도 되는 건가?”
아더가 전방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뭘 말없이 나와요?”
“성안에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자네에게 기대고 있지 않나. 그런 와중에 말없이 사라져 버리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아더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믿을 만한 사람한테 충분히 이야기를 해뒀거든요.”
“오? 그래? 그 사람이 누군데?”
“카셀이요.”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카셀? 그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친구?”
“말 조심해요, 황자님. 카셀이 왜 멍청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흠. 그래도 뭔가 좀 둔한 건 맞지 않나?”
“둔한 건 맞죠.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최고의 인재예요.”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고의 인재? 레버쿠젠의 성주나 그 아케인 시장이 아니고?”
아더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쯤 자신을 대신해 하트 연합군의 전권을 위임받은 카셀을 떠올렸다.
‘카셀이 조금 어벙하긴 해도 지금 날 대신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야.’
아케인의 윌렛 크레스톨.
레버쿠젠의 엘린.
두 사람 다 유능한 인재들이지만 아더, 자신을 대신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쟁은 전략이나 전술. 이런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전쟁이 아니야.’
압도적인 화력.
그리고 힘.
이것들이 전장을 지배할 것이다.
특히 드래곤을 잡아먹는 괴물.
라 하르칸이 하트를 공격하게 되면 더욱 높을 확률로 그리 될 것이다.
‘그런 괴물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이쪽도 상식을 파괴하는 힘을 지녀야 해.’
그 상식을 파괴하는 힘이란 소드마스터.
인간의 몸으로 달성할 수 있는 초월자의 경지에 이른 힘이다.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카셀. 그러니 날 대신해 충분히 전쟁을 지휘할 수 있을 거야.’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상념을 지웠다.
이제 저쪽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남은 건 자신을 위해 도우러 와준 그들을 믿는 것.
‘그리고 그들을 위해 누구보다 빨리 아버지를 죽이는 것.’
눈빛을 빛낸 아더가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설원 너머.
흐릿한 인영이 일렁거렸다.
옆에 있던 레온이 다가와 속삭였다.
“마시알 더스트란 이름 기억나나?”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나죠. 그 때 황자님을 죽일 뻔했는데.”
“꼭 기억해도 그런 식으로 기억하는군.”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니깐요?”
레온도 웃음을 터트렸다.
“뭐… 부정할 수 없군. 돌이켜보니 나도 그 일이 가장 기억에 남으니깐. 어찌 되었건 저 친구가 제국의 수도로 들어가는 텔레포트를 가동시킬 거야.”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흐릿한 인영이었던 마시알 더스트가 모습을 드러내며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황자님.”
“그래. 준비는 끝났어?”
“예. 들어가시면 곧바로 진이 발동될 겁니다.”
이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눈으로 덮인 작은 동굴.
그 동굴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더는 본능적으로 그 빛이 텔레포트 마법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신기하네. 레온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준비한 거지?’
알면 알수록 레온이란 사람은 대단하면서도 뭔가 숨기는 게 많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지니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여러분.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이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네. 한마디 하세요 지니.”
아더의 허락에 지니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다 이해를 했거든요. 그런데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아더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게 뭐죠?”
“저를… 왜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
“아, 아니! 그렇잖아요! 황자님은 텔레포트라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유능하니깐 그렇지만 저는 아니잖아요!”
지니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이 많을 텐데… 왜 하필 저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이 말에 아더가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지니가 왜 유능하지 않아요. 제가 본 어떤 사람보다 유능한 사람인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거기다 지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
“제가 또 이상하게 되어버리면 그 때도 와서 저를 말려줘야죠. 그건 지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아더의 말에 지니가 입을 벌렸다.
‘고,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중요한 일에 날 데리고 간다고!?’
말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에른 기사단을 끌고 가는 게 나을 텐데?
그 탓에 지니가 다시 한 번 당황을 숨기지 못한 그때, 레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꼴 시려워서 못 보겠군. 그만 사랑싸움하고 이제 슬 출발하자고.”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랑싸움 아닌데요?”
“말이 그렇단 거야. 자, 동굴로 들어가자고.”
이 말에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화악-!
설원에 덮인 작은 굴에서 오묘한 빛이 여전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을 잠시 지켜보던 아더가 망설임 없이 굴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지니가 눈을 치켜떴다.
굴 안으로 들어간 아더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레온이 마시알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수고했네. 다시 만날 땐 모든 게 끝나있거나 실패했거나… 둘 중 하나겠군.”
마시알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행운의 여신이 당신에게 깃들기를.”
이 말에 레온이 웃었다.
“고마워 내 집사. 그럼 나중에 보자고.”
몸을 돌린 레온이 아더를 따라 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아더와 마찬가지로 그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지니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지, 진짜 모르겠네. 이거 맞아?’
그때 조용히 다가온 마시알이 속삭였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
“안전하긴 하지만 시간이 늦어지면 텔레포트 마법진에 오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의 세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 눈을 치켜뜬 지니가 황급히 걸음을 옮겨 굴 안으로 진입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마시알이 반쯤 감긴 실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 놀랍게도 굴이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쾅-!
허나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남은 흔적까지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 작업까지 마친 마시알이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아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어 입에 문 뒤 나직이 중얼거렸다.
“복수를 위해 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면… 어떘을까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황자님.”
이 말과 함께 마시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게 안 됐겠죠. 인간이란 미련을 못 버리는 짐승.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겁니다.”
모든 게 끝날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