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성벽 위를 거닐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카셀이 안절부절못하며 제안했다.
“그… 아이린 양?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바람이 너무 매서워 자칫 잘못하면 심한 감기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카셀.”
“예?”
“제 따분한 인생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
“전 태어나서 줄곧 수도에만 머물렀어요. 집, 가끔 가는 수도의 저잣거리. 그것이 제가 본 세계의 전부였어요.”
카셀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저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난데없는 인생 이야기라니?
허나 아이린은 개의치 않아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 그렇게 딱히 나쁜 삶은 아니었어요. 가끔 시비 걸러 오는 도르문트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건도 사고도 없는 그런 삶이었으니깐요.”
“…….”
“그런데 최근 들어 느끼고 있어요. 그런 무의미한 삶을 산 게 과연 옳았을까.”
아이린이 양팔을 벌렸다.
그 순간 우연인지 운명인지 몰라도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생기 넘치게 휘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에 카셀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동시에 아이린이 웃음을 터트리며 북부 설원을 가리켰다.
“세상은 제 생각보다 넓었어요. 그리고 아름다웠어요. 북쪽에는 눈이 있고 남쪽에는 엄청난 밀림이 있다죠? 그런 세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본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
아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차린 카셀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카셀을 향해 아이린이 샐쭉 웃어 보였다.
“그러니 제 일탈을 눈 좀 감아주면 안 되나요? 캡. 틴. 카. 셀.”
카셀이 눈을 끔뻑이다, 한 박자 늦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가씨군.’
그래서 더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다.
생각과 함께 카셀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저도 모릅니다?”
“제 몸 정도는 제가 알아서 챙길 수 있어요.”
“…그럼 바깥에 계실 때까지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아이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카셀이 다시 한번 시선을 뺴앗긴 그 때, 그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던 엘린이 중얼거렸다.
“눈꼴 시려워 죽어버리겠네요.”
이 말에 옆에 있던 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찢어놓고 싶네요.”
엘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성주님.”
“…그런데 똑같은 처지는 아니네요.”
지니가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끝이 났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잖아요.”
“…제게 기회가 있다고요?”
지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귀를 쫑긋거렸다.
그 모습에 엘린이 속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얄미운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일지 모르겠네.'
하지만 괜히 심술을 부릴 생각은 없다.
지니라는 이 엘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때 저 멀리서 레버쿠젠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 가주님! 급히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외침에 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일이라도 터졌나요?”
“그…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누가요?”
병사가 살짝 망설이며 대답했다.
“아더 바이에른. 그분께서 긴급 회의를 여셨습니다. 성내에 있는 모든 분들을 불러 모으라는 명령입니다.”
* * *
아더 바이에른의 주관하에 열리는 회의.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하트에 모인 주요 요직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바이에른 병력을 이끌고 온 아이린 바이에른.
하트의 새로운 성주인 엘린 레버쿠젠.
아케인에서 물자와 용병을 이끌고 온 윌렛 크레스톨.
3대 세력의 수장 또 한 회의에 참석했다.
그 속에서 엘린 레버쿠젠이 아이린 바이에른과 윌렛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하트를 위해 먼길을 달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린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가 있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아이린의 인사에 엘린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오빠하고는 분위기가 여러모로 다르네.'
아더 바이에른이 규격 외 인간이라면 아이린 바이에른은 규격 내 인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짜여진 규격 내 인간.
귀족가의 영애의 표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아이린의 인자한 미소를 잠시 지켜본 엘린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윌렛 크레스톨.
아케인의 전설적인 용병, 그리고 브로커이자 지금은 시장직을 맡고있는 사내였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름이 자글자글 진 얼굴이지만 그의 날 선 분위기나 표정은 엘린의 입에서 감탄을 터져 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체 아더는 저런 사람하고 어떻게 연이 있는 거지?’
문득 든 궁금증에 잠시 고민한 엘린이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알아야 할 딱히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건 아더가 왜 우리를 불러모았냐는 거야.’
생각과 함께 엘린이 회의실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오. 다들 모여계셨군요.”
아더 바이에른.
현재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일들을 불러모은 사내였다.
그의 등장에 여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윌렛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명령인데 당연히 와야지.”
어깨를 으쓱인 아더가 자연스레 단상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던 엘린이 뒤늦게 아더의 뒤에 선 사내를 발견했다.
‘레온 마드리드 황자?’
엘린이 숨을 참았다.
현재 하트를 위협하는 제국의 황실.
그 황실의 핏줄이 아더 바이에른의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그가 여기 있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 불안하네.’
대체 왜 황실의 황자가 아더 바이에른을 돕는 걸까?
둘 사이에 친구 사이라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단상에 오른 아더가 특유의 목소리 톤으로 입을 열었다.
“바쁘신 여러분들을 불러 모아서 죄송해요. 그런데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이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해야 할 이야기요 오라버니?”
“응 아이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말을 흐린 아더가 씩 웃었다.
“지금부터 저는 제국의 수도로 향할 생각입니다.”
“……?”
“인원은 최소한으로 축소할 예정이에요. 적게는 두 명. 많아 봐야 다섯 명. 이 인원을 데리고 제국의 수도로 가서 황실로 잠입할 예정이에요.”
아더의 말에 모두가 눈을 끔뻑였다.
그중 가장 당황한 윌렛이 말을 더듬으며 질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니깐 지금….”
말을 흐린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궁으로 몰래 잠입해 제국 황제를 암살할 거라고?”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윌릿 어르신이네요. 네 맞아요. 저는 칸 마드리드… 그리고 제게는 아버지 되는 사람을 암살할 생각이에요.”
“……!”
충격적인 선언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 속에서 윌렛이 일갈했다.
“그건 아케인 대표로서 용납할 수 없군.”
그 단호한 어조에 모두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더가 살며시 웃으며 질문했다.
“이유가 있을까요, 어르신?”
“자넨 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야. 그런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적의 수장을 암살하러 가겠다고?”
윌렛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안 될 말이야. 자네가 죽으면 이 전쟁은 의미가 없어. 더군다나 지금 자네가 가려는 곳은 황궁이네.”
윌렛이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저택.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 그런 곳에 제 발로 들어가겠단 말인가? 아니, 절대로 허락 못 하네.”
이 말과 함께 윌렛이 팔짱을 꼈다.
동시에 회의장에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모두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 처음 봤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깐깐해 보이는 저 노인의 말이 옳다고.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암살한다는 게 말이 돼?'
'절대 불가능해. 그곳은 뚫리지 않은 철통의 요새야.'
'차라리 이곳에 남아 같이 항전하는 게 맞아.'
긴 제국의 역사상 역대 황제들은 모두 암살의 위협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성공 하지 못했다.
황자와 그 가족들은 암살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제국의 황제들은 반드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죽는 경우는 단 두 가지 뿐이었다.
자살과 자연사.
그랬기에 모두가 아더의 의견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황제를 살아남게 한 황궁의 경비를 대체 어떻게 뚫는다 말인가?
그때 침묵하던 아더가 입을 열었다.
“흠… 다들 이번 일에 동의를 안 하시는 모양이죠?”
아이린이 살짝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 오라버니?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암살은 이 상황에서 좋은 대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린도 한 박자 늦게 그 의견에 동조했다.
“나도 똑같이 생각해. 이런 시기에 소드마스터 급 되는 기사를 적진에 홀로 보낼 수 없어.”
그녀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의 생각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다들 이거 하나는 동의 하시죠?”
“……?”
“제가 황제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는 게 이번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작전이라는 거?”
이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
몇몇 이들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입을 여는 이들은 없었다.
그 분위기를 살피던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좋아요. 일단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나머지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번 계획에 찬성할지 안 할지는 선택해주세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손짓했다.
그 순간 뒤편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레온… 마드리드?”
현재 이 연합군의 적이자 그 수장의 직계 혈통.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지닌 사내였다.
그가 아더 대신 단상으로 걸어나와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아실 분들은 이미 아실 테고 모르실 분들을 위해 간략히 제 소개를 좀 하겠습니다.”
레온이 한 차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전 이 나라 황실의 후손. 레온 마드리드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상대해야 할 황제의 남동생쯤 되는 사람이죠.”
이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치켜 떠졌다.
설마 레온의 입에서 스스로 황제의 남동생쯤 되는 사람이라는 소개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합군에 합류해서 의심을 받고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자기소개를 한다고?’
‘스스로를 감추기 위한 연막인가?’
생각과 함께 사람들이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 집중된 이목 속에서 레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자면 제국에서 저보다 황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
“제 손에 아무도 모르는 황궁으로 이어지는 지하통로가 적힌 지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치켜떠졌다.
그 반응 속에서 레온이 설명을 이었다.
“안전에 대한 보장은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이 지하통로는 그 황실의 로얄 나이츠들조차 모르는 길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황궁으로 들어가는 외부의 통로가 제 손에 있단 말이죠.”
이 말에 아이린이 당황해 대답했다.
“저, 정말인가요 황자님? 그 말이 사실이면….”
“예. 황제를 암살하는 일. 영 터무니없는 일은 아닙니다.”
“……!”
“어쩌면 현 시점에서 이번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아이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 엘린이 시선을 좁히며 질문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드려 죄송하지만 황자님께서는 그 지도를 어떻게 들고 계신 겁니까?”
“제가 만든 지하통로니깐요.”
“……?”
“저는 제국의 황실의 혈통이자 황궁에 아무런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권위를 이용해 믿을 수 있는 몇몇 사람과 함께 몇 년 전부터 만든 지하통로입니다.”
엘린의 눈이 치켜떠졌다.
“그… 런 통로를 만드신 이유가 뭔가요?”
레온이 살짝 웃었다.
“음… 솔직히 좋은 의도라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답이 되었을까요? 레버쿠젠의 성주?”
엘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회의장에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 말이 사실이라고?”
“아무도 모르는 지하통로?”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암살이 영 말이 안 되지 않나?”
조금 전과는 명백히 달라진 분위기에 아더는 생각했다.
‘오… 레온. 이 사실을 이렇게 가볍게 밝힐 줄은 몰랐네?’
어딘가 꼬인 성격의 그라면 조금 더 빙빙 돌려 말할 줄 알았는데.
그 탓에 아더가 흥미진진한 눈길로 회의실에 선 레온과 그 분위기를 지켜볼 때였다.
여태 침묵하던 윌렛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황자.”
이 말에 레온의 얼굴이 살며시 굳어졌다.
예민한 눈초리로 레온을 살피던 아더는 눈빛을 반짝였다.
‘윌렛 어르신에게 약간 겁을 먹은 거 같은데?’
단상에 올라선 뒤, 줄곧 여유를 잃지 않던 레온이 처음으로 그 자신감을 잃었다.
허나 곧 침착히 표정을 갈무리한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케인 시장님.”
“그럼 사양하지 않고 질문드리겠습니다.”
윌렛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서 질문했다.
“…죽이려는 의도가 뭡니까?”
아더의 눈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레온의 어깨가 한 차례 거칠게 떨렸다.
“황제… 그러니깐 당신에게 형님 되는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가 뭡니까?”
레온이 입을 다물었다.
“…….”
그 침묵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랬기에 모두가 의아함을 느끼고 레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허나 그럼에도 레온은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반응에 윌렛이 눈길을 좁히며 재차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누군가 회의실로 들이닥쳤다.
“아더-!”
카셀.
바이에른의 기사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더가 놀라 질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카셀?”
“이걸 보게나!”
이 말과 함께 카셀이 마력 전송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옅은 잔상이 마력 전송구에서 떠올랐다.
동시에 익숙한 비명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끼에에엑!
하트의 장군들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이 울음소리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 속에서 윌렛이 놀라 중얼거렸다.
“악마?”
그 사이 표정을 굳힌 아더가 카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설마….”
“그래 맞아.”
카셀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쏟아져나왔다.
“제국의 수도. 그곳에 악마가 등장했어. 그것도 한 두마리가 아닌 수 천, 수만마리가. 그 미친 황제가 기어코 금기를 어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