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레온이 꺼내든 것은 지도였다.
그 탓에 아더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질문했다.
“…이 지도가 뭐길래 제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단 거예요?”
레온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
“황궁의 하나뿐인 지하통로.”
“…?”
“그 지하통로의 입구와 자격. 그걸 증명하는 지도라네.”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황궁의 지하통로?’
제국의 황실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아더였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고 있었다.
제국 황실은 세상 그 어느 장소보다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을.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황실을 두고 철창 없는 감옥이라 부를 정도였으니.
‘…그런 곳에 지하통로가 있다고?’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은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눈에 벗어나는 다른 길, 혹은 출구는 없다는 소리.
그런데 지금 레온은 그 규칙을 어기고 황궁에 지하통로가 있다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말을 흐린 아더의 눈이 커졌다.
‘레온의 말대로… 전쟁을 하지 않고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겠는데?’
그때 레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승패를 가리는 게 아니야.”
“…….”
“자네에게는 아버지. 나에게는 형님 되는 그 사내를 죽이느냐 못하느냐. 그게 이번 전쟁을 판가름하는 요소지.”
레온이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하통로의 존재는 아주 커다란 변수야. 황궁으로 직선으로 뚫려 있는 아무도 모르는 길이니깐.”
아더가 나직한 감탄을 터트렸다.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레온.”
“후후… 괜히 지난 몇 년간 마마님들 사이에서 몸을 구른 게 아니라고.”
“…….”
“뭐, 이 이야기는 차차 해주는 걸로 하고… 어때? 지금 상황에서 이게 최선으로 보이지 않나?”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고민했다.
‘흠….’
레온의 말대로, 만약 저 지하통로에 적힌 길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변수였다.
‘전쟁을 하지 않고… 아버지를 죽일 수 있으니깐.’
하지만 그만큼의 리스크도 있었다.
아더는 고민을 끝내고 질문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네요.”
“무슨 문제?”
“과연 이곳이 무사할까요?”
“……?”
“제가 빠진 사이 적의 본대가 이곳에 쳐들어오면… 과연 이 성은 무사할까요?”
레온이 침묵하다 대답했다.
“…그건 나도 장담 못 하겠네.”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아케인의 깃발, 바이에른의 깃발.
그리고 하트의 깃발이 성벽 위에서 펄럭였다.
그 깃발을 쳐다보며 레온이 중얼거렸다.
“분명 많이 죽고 다칠 거야. 그게 전쟁이란 거니깐. 하지만 아더.”
레온이 단호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과연 그 전쟁에 자네가 있다고 한들 모두를 지킬 수 있을까?”
“…….”
“난 아니라고 보네. 자네가 이곳에 있건 없건, 결국엔 누군가 다치고 죽을 거야.”
아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온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레온이 다시 입을 열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 지하통로를 이용하면 적어도 기회는 잡을 수 있어.”
“…기회요?”
“더 많은 사람을 구할 기회.”
“…….”
“물론 그 기회가 옳은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네. 나라고 해서 미래까지 아는 건 아니니깐.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말을 흐린 레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조금이라도 가능성 높은 수에 매달리는 게 낫다고 보네.”
“…….”
“여기까지가 내 생각이야. 나머지는 자네 생각에 달렸어.”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레온.”
“뭐를. 여태 해준 게 없었는데, 이런 거라고 해야지.”
아더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답을 줄게요.”
레온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다시 고민에 잠겼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기회… 과연 그 기회를 잡는 게 맞을까?’
던져진 질문에 아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마음속의 고민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 *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은하수의 장관을 잠시 지켜보던 때, 가슴팍에서 갑작스러운 진동이 느껴졌다.
들었던 고개를 숙인 아더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꾸러기 흰수염 씨. 이제 일어나셨어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품속에 넣어놓은 비스트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새까만 묵색 권총에서 놀랍게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늙은 것도 아니고 죽어 자빠진 노인네보고 잠꾸러기라니. 자네도 참 악질이군.]
“어라?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요?”
[됐어. 자네가 예의를 모르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이 흰 수염이 노곤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왜 이 달밤에 혼자 궁상을 떨고 있는 겐가? 뭐 고민이라도 생겼나?]
이 말에 아더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오… 역시 연륜은 어디 안 가네요. 맞아요. 고민이 생겼어요.”
[그 고민이 뭔데?]
“음… 설명하자면 긴데….”
[죽어버린 노인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지. 말 해보게.]
아더가 씩 미소 지었다.
“그럼 사양 말고 설명할게요.”
잠시 심호흡 한 아더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흰 수염이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그렇군. 드디어 마지막에 도달한 겐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크큭. 자네 운명도 참 기구해. 하필 이 모든 걸 계획한 게 자네 아버지라니.]
“사람 인생이라는 게 뭐 그렇죠.”
[…그래서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고민이다, 이 말 아닌가?]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감이 조금 그렇긴 한데… 예. 맞아요. 그게 고민이에요.”
흰 수염이 단언했다.
[자네 갑자기 좀 물렁해졌군?]
“네?”
[이 쉬운 걸 왜 선택을 못하나?]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흰 수염이 낮은 목소리로 조언을 시작했다.
[자네 아버지를 빨리 죽여.]
“…?“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죽일 남자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도 막고 싶고.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흰 수염이 기분 나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지하통로라는 걸 이용해 자네 아버지를 빨리 죽여.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되니깐.]
아더가 침묵했다.
그 속에서 흰 수염이 갑작스레 찾아온 즐거움 속에서 중얼거렸다.
‘미친놈이라도 아버지를 죽이는 데 망설여지는 모양이지?’
그래서 궁금해진다.
자신이 아는 세상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는 이 남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때 아더가 입을 열었다.
“오.”
[…?]
“맞아요. 이게 답이었어요. 아버지를 빨리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어요.”
흰 수염이 잠시 침묵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자네가 내린 답인가?]
“네. 이게 정답이었어요. 이러면 모든 게 해결돼요.”
아더의 목소리에 옅은 열기가 깃들었다.
“레온이 건네준 지하통로를 통해서 아버지를 빨리 죽이고 전쟁을 종식시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어요. 이 쉬운 걸 이제 깨닫다니… 저도 참 많이 물렁해졌네요.”
흰 수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보기엔 조금 전이랑 별다를 게 없는데?]
“아니죠.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죠.”
[어디가?]
아더가 씩 미소 지었다.
“조금 전의 저는 실패를 가정하고 있었어요.”
[실패를?]
“네.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어쩌나… 죽인다 한들 시간이 늦어지면 어쩌나…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요.”
흰 수염의 목소리에 흥미가 깃들었다.
[흠… 그렇단 말은 지금은 그 실패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
“네. 흰 수염 씨 조언 덕에 깨달았어요. 실패를 가정하고 일에 뛰어드는 인간이 어떻게 목표를 달성하겠어요.”
[그건 맞지.]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에요.”
[…?]
흰 수염이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아더가 씩 미소 지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아버지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제가 망설 이유가 있을까요?”
아더의 눈빛에 총기가 살아났다.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한 열정이 비스트로 느껴졌다.
“반드시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에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죠. 그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흰 수염이 침묵을 깨고 탄식을 터트렸다.
[…역시 자넨 참 대단해.]
“칭찬 고마워요, 흰 수염 씨.”
[칭찬이 아니야. 후우… 그것보다 자네 아버지는 참 좋겠군. 이런 아들을 둬서.]
이 말에 아더가 문득 궁금해져 질문했다.
“흰 수염 씨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나요?”
[…이 미친 친구야. 그럼 나는 뭐 저 뱁새가 물어다 준 알에서 태어났을 것 같나?]
혀를 찬 흰 수염이 잠시 옛 추억을 회상했다.
기근과 가뭄으로 돌아간 부모란 존재들.
그 속에서 등장한 한 명의 사내.
‘사실 나에게 있어 진짜 부모는 그 사내겠지.’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진짜 스승.
그를 잠시 떠올린 흰 수염이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를 더 떠올렸다.
‘…흠.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내가 만약 그 악마를 만나지 않고 스승님의 유지를 따랐다면 지금의 결과가 달라졌으려나?’
죽음이 두려워 공포에 떨어 살던 나날.
그런 자신에게 찾아온 악마를 닮은 사내.
그 사내를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흰 수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
이미 죽어버린 그였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서웠다.
결국 악마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흰 수염, 자신은 흑마법사가 되었을 것이다.
* * *
새로운 황제의 탄생.
그의 즉위식은 출정식과 함께 진행되었다.
“세상에… 즉위식을 출정식과 함께 하는 황제라니.”
“이런 경우는 전례를 뒤져보아도 흔치 않지 않나?”
“그만큼 제국의 반기를 든… 아더 바이에른이 대역죄인이란 소리 아니겠어?”
제국의 시민들은 역사에 한 번 있는 그 전례 없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제국 황실의 앞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즉위식과 함께 하는 출정식이니 분명 성대하겠지?”
“성대하고 말고! 행사에 하는 쇼만 봐도 눈호강 할걸?”
“가서 마차 장사나 좀 해볼까? 술만 몇 잔 팔아도 돈을 짭짤하게 벌 것 같은데?”
그 수만 해도 수천.
외부에서 온 손님들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엄청난 인원을 감당하기에는 제국 황실의 앞마당도 부족할 정도였지만 기적적으로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출정식을 위해 모여든 수천의 군인들.
그들 모두가 같은 복장 같은 자세를 취한 채 엄격한 질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터져 나왔는데, 진짜 행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번 행사의 주인.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 칸 마드리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암막으로 가려져 있잖아?”
“…아니, 아무리 황제 폐하의 용안이라 해도 즉위식인데 얼굴을 가리는 건 너무하지 않나?”
“나중에 드러내겠지? 그렇지?”
수군거림 속에서 제국에서 가장 연륜이 쌓인 그리고 노련하기로 소문이 난 장군이 소리쳤다.
“전군 전열-!”
“……!”
“제국의 53대 주인! 칸 마드리드 황제 폐하를 향해 경례-!”
장군의 외침에 도열해있던 수천의 군인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충성-!”
병사들의 단합된 외침.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건 장군이 몸을 돌려 단상을 바라보았다.
“충성-!”
장군의 인사에 암막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던 황제가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옅은 실루엣으로 확인한 장군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지금부터 제국의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우리 용사들을 위한 황제 폐하의 훈시를 진행하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장군이 무릎을 꿇었고 병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건 행사를 지켜보러 온 시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새로운 황제의 연설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집중된 이목 속에서 마침내 황제의 입이 열렸다.
“…인간은 너무 많아.”
이 말에 모두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응?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뭐지?
새로운 황제가 된 사람의 첫 마디가 인간이 너무 많다라고?
그 사이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딜 봐도 인간. 저길 봐도 인간… 솔직히 말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왜 신은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번식한 인간을 방관하는지 몰라.”
황제의 연설이 계속 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높으신 분들의 언어유희가 유별나다는 것은 유명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너무 심했다.
‘새로운 황제의 첫마디가 인간이 너무 많다니….’
그렇다면 황제의 권위로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인간들의 숫자를 줄이기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암막도 사라졌다.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난 제국의 53대 황제.
칸 마드리드가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수를 조금 줄여보자고. 이렇게나 많은 데 조금쯤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잖아?”
그 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
파악.
피비린내가 진하게 나는 그런 어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