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할리버 크리스티안.
그는 약 500년 전의 사람이었다.
500년 전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냐 물으면, 그도 자세히 몰랐다.
그가 인간의 천명을 어기고 이토록 오래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보다 두 배는 많은 삶을 산 인간.
흰 수염의 도움 덕이었으니깐.
‘마법사는 마법에 기대어 천명을 어기고 칼잡이들은 같은 칼잡이들의 피에 취해 천명을 어길 수 있지.’
그는 자신이 하늘섬의 소속이 되는 조건으로 영원한 삶을 약속했다.
‘소드마스터를 죽이고 그들의 마나를 흡수하게. 그러면 자네는 영원히 죽지 않은 최고의 칼잡이가 될 걸세.’
솔직히 말해 흰수염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최고의 흑마법사라 해도, 영원한 삶을 약속할 수 있다니?
하지만 할리버는 흰수염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소드마스터.
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전설의 칼잡이.
그들을 사냥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검으로 날 상대 할 자들이 없다. 하물며 소드마스터도. 하지만 소드마스터가 아니면 검을 맞댈 수조차 없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다.
타고난 걸 넘어 하늘이 점지해준 최고의 칼잡이였다.
검을 쥔 뒤로 그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세계 제일의 기사단장도.
은거기인으로 소문난 전설의 칼잡이도.
심지어 소드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검으로 세상을 베는 것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
그가 바로 할리버 크리스타인었다.
그랬기에 항상 고독했다.
그 누구도 자신과 동등한 대련을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검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소드마스터지만, 그 소드마스터조차 검을 나누기만 할 뿐.
제 검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할리버는 항상 갈증을 느꼈고 그런 와중에 흰 수염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드마스터를 찾아내 제 앞으로 대령해준다는 이 매력적인 제안을, 과연 어떻게 거부한다 말인가?
그렇게 할리버는 하늘섬의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천명을 어기고 500년을 살았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손에 죽은 소드마스터만 열을 훌쩍 넘어갔다.
모두가 이름이 난 칼잡이들이었지만 할리버의 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감각 속에서 할리버는 좌절과 기쁨을 느꼈다.
500년 동안 이름난 칼잡이들도 나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500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사투를 해보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상반되는 감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허비할 때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흰 수염 씨가 죽었어?’
할리버의 눈동자에 놀람이 깃들었다.
흰 수염이 누구인가?
이 하늘섬을 만든 조직의 수장이며 세계 최고의 흑마법사다.
그런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한 나라, 아니 제국의 군대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이며 자신조차 그와의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돌연사해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할리버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흰 수염 씨를 죽였던 말인가?’
그때 또 다른 이변이 찾아왔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흰 수염의 마력 통신구로 연락 한 통이 날아 들어온 것이다.
[때가 왔다. 하늘섬의 아이들아. 제국의 수도로 오너라.]
할리버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흰수염이건 아니건.
오랜만에 흥미를 느끼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으니.
* * *
어두운 방안.
레오 바이에른은 제 앞에 선 인간,엘프, 그리고 시체를 바라보며 만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제때 와주었구나.”
이 말에 할리버의 시선이 힐끔 움직였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엘프였다.
어둠에 가려진 그녀의 피부는 엘프답지 않게 새까만 색이었다.
할리버는 잠시 기억을 뒤져, 그녀의 정체를 떠올렸다.
‘다크엘프… 요루 살루한이었던가?’
듣기로 700년 전 엘프들의 왕이었던 여자라 했던 것 같았다.
‘엘프들의 왕이라… 그런 고귀한 존재가 왜 하늘섬에 있었던 거지?’
턱을 쓰다듬으며 할리버는 고민했지만 적당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섬은 조직이지만 조직답지 않은 곳이었다.
세상 최악의 범죄자들답게 사교성이 없었던 탓도 있었고 모두가 흰 수염과의 개인적인 연락만 취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문을 적당히 넘긴 할리버가 이번에는 해골을 바라보았다.
‘흠… 저놈은 시체였지 아마?’
듣기로 네크로맨서였던 것 같았다.
정확한 정체는 할리버도 몰랐다.
100년에 한 번 열리는 하늘섬의 회의에서조차 저 시체가 참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때 레오가 입을 열어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딱 필요한 사람들만 왔군? 몇 명 더 왔으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이 말에 할리버가 질문했다.
“다른 놈들은 연락을 받지 않은 건가?”
“그런 모양이야. 아무래도 서로 싸우다 죽은 모양이지.”
“…?”
“흰 수염이란 억제 장치가 없으니 영역 다툼을 한 것 같은데… 아쉽게 됐어. 꽤 쓸모있는 놈들도 거기에 섞여 있었는데.”
할리버가 놀라 중얼거렸다.
‘……묘하게 설득력 있군?’
저 남자의 말대로 흰 수염은 하늘섬의 수장이자 억제 장치였다.
그가 있기에 하늘섬의 조직원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했다.
하지만 그 억제 장치가 없는 지금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이유가 사라졌다.
개인적인 원한 이득 목표.
그런 것들로 서로를 죽일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 사이 다크 엘프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슬슬 설명을 좀 해주시죠.”
“무슨 설명?”
“당신이 왜 흰 수염 씨의 마력 통신구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이 말에 레오가 방긋 웃었다.
“흠… 그게 제일 궁금한가?”
“그게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답이죠.”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흠… 간단히 설명하자면 흰 수염이 내 작품이네.”
“…?”
“흰 수염이란 인간을 만든 게 내 작품이야. 하늘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깐 내가 그의 마력 통신구로 연락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다크엘프의 눈이 커졌다.
여태 침묵하던 시체도 뼈뿐인 턱을 덜그럭거렸다.
[흰 수염이… 네 놈 작품이라고?]
“그래. 천 년 전 마법에 눈을 뜬 아이. 그 아이를 길러다 내가 흑마법사로 성장시켰지.”
시체가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 소리… 그 흰 수염이 누구 작품일 리가 없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자네.”
[……?]
“마법을 쓰면 그 뼈뿐인 시체를 분해해 내 드래곤의 먹이로 줘버릴 걸세. 이곳은 내가 꽤나 아끼는 방이거든.”
레오의 경고에 시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꽤나 놀란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이 고개를 돌린 레오가 다시 설명했다.
“하늘섬은 선택받은 인간들이 모인 곳이야. 저 하늘에 도전할만한 인간들… 그 인간을 천 년 동안 모은 곳이 바로 하늘섬이지. 그리고 자네들은….”
말을 흐린 레오가 방긋 웃었다.
“하늘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들이지. 축하하네. 자네들은 선택받은 인간이야.”
이 말에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다크 엘프도, 할리버도.
심지어 시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레오를 빤히 바라보며,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늘섬.
이 정체불명의 조직에 그런 거창한 뜻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말을 믿어야 하나?’
할리버는 문득 든 의문에 손가락을 툭툭 두들겼다.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 해서 거짓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정확한 이유는 본인도 몰랐다.
그저 저 사내의 말에 힘이 있다.
딱 이 정도의 느낌이 저 말을 사실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다른 두 명의 하늘섬 조직원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 속에서 레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난관이 남아 있어. 이 세상에 있을 마지막 전쟁… 그 전쟁에서 손에 넣어야 할 보물이 있거든.”
할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 전쟁? 보물?
그게 뭐지?
그때 레오의 입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더 바이에른. 내 아들을 저 간악한 인간들 사이에서 구해와야 하네. 그게 자네들의 임무야.”
할리버의 눈이 커졌다.
‘아더 바이에른?”
제국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
그 명문가의 적통한 후계자이자 한 때 아케인에서 던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용병.
그리고 자신의 자금줄이었던 지하경매장을 박살 내놓은 건방진 애송이.
‘…그 놈이, 저 사내의 아들이었다고?’
생각과 함께 할리버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함부르크 에디슨을 죽이고, 경매품이었던 엘프를 납치해 달아나던 아더 바이에른.
하늘섬의 사자를 죽이고 건방지게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던 애송이.
‘…그리고 목이 잘리고도 죽지 않던 기이한 녀석.’
그 기억들을 떠올리던 할리버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일이군.”
“그렇지? 꽤 재밌는 일이야. 특히 자네에게는 더.”
“…그게 무슨 소리지?”
레오가 방긋 웃었다.
“내 아들은 현재 소드마스터네.”
이 말에 할리버의 눈이 커졌다.
그 속에서 레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적진에는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룬 칼잡이가 한 명더 있어. 자네의 유흥에 이보다 더 좋은 수… 없지 않나?”
할리버가 침묵했다.
“…….”
그 침묵 속에서 잠시 고민한 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좋군…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어.”
소드마스터를 사냥하는 소드마스터.
세계 최고의 검성(劍聖)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새하얀 햇살이 창문 밖에서 비쳐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햇살의 온도를 즐긴 아더가 이부자리를 곱게 정리했다.
그 후 방안을 나섰다.
“……!”
방문이 닫혀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더는 그 소음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연무장에 도달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소음이 연무장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아더가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검을 뽑아 들었다.
치잉…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요함을 갈라냈다.
검을 치켜든 아더가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화악-!
허공이 베였다.
아더는 그 감각에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쁘지 않네.”
왠지 모르겠지만 검을 다루는 실력이 올라갔다.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어떻게 또 다시 벽을 넘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케인 도르문트… 그자와의 싸움이 도움이 됐어.’
생각과 함께 아더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잔상이 피어올랐다.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칼이 가진 사내의 잔상이었다.
‘아들아.’
그의 부름에 아더가 대답하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화악-!
그 순간 검은 머리칼의 사내의 목이 데구르르 떨어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제법 익숙해졌어.”
이 말과 함께 다시 검을 집어넣은 아더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흔치 않은 적발을 가진 사내가 벽면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더가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이 말에 아더를 훔쳐보던 레온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수 십일을 달려 여기까지 온 친구한테 할 말인가?”
레온이 걸음을 옮겨 아더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벼운 포옹을 하며 중얼거렸다.
“수고 많았네. 아더 바이에른.”
그의 말에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뭔가 이상하네요 황자님.”
레온 마드리드.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옛 친구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