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레오 바이에른.
어릴 적 사별한 아버지를 다시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어른 같지 않다는 거였다.
‘우리 아버지지만 진짜 나이를 헛으로 먹으셨네.’
가벼운 성격에 가벼운 입담.
장난기 가득한 눈꼬리에 애교살이 가득한 얼굴은 여러모로 그의 나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런 아버지가 오히려 마음에 든 아더였다.
‘나하고는 달라. 아버지는… 분명 여러 사람들한테 사랑받았을 거야.’
그의 여유 넘치는 태도.
항상 긍정적인 모습.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는 분명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사람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더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분명 좋은 부자지간이 되었을 거기 때문이다.
‘아버지랑 목욕도 같이 하고 술도 같이 마시고… 많은 것들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기에 레오가 곧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너무 기뻤다.
빈말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말이다.
이미 죽어버린 그가 자신을 어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기적이 일어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가 진짜로 살아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와준다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더는 그 고민 속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레오를 대신해 가문으로 이끌어나간 일.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둥바둥 발버둥 쳤던 일.
그 모든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레오에게 해줄 말도 같이 떠올랐다.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과 가문을 지키는 일.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니 절 칭찬해주시겠어요?
생각과 함께 아더가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랬기에 아더는 마음 한구석에 작은 소망을 빌었다.
‘아버지. 꼭 절 다시 만나러 와주세요.’
그리고 지금.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나는 칸 마드리드.”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레오 바이에른이기도 하단다, 아들아.”
이 말에 아더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손에 쥔 칼에 새겨진 글귀가 번뜩였다.
[진실을 목도한 순간, 흔들리지 마라.]
진실을 목도했다.
허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진실이 눈앞에 있었다.
* * *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낄. 낄. 낄.
일정한 박자를 갖춘 채 울려 퍼지는 그 기괴한 웃음소리에 모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유일하게 어깨를 떨지 않은 아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광대.’
제 아버지와 똑닮은 생김새를 가진 저 사내의 표정, 몸짓, 웃음소리.
모든 게 광대 같다고.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더는 그렇게 느꼈다.
그 사이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제 미간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아… 아들아. 아무리 내가 반가워도 어찌 미간에다 총알을 박을 수 있느냐?”
이 말에 아더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런 꼴로 나타나니 총알을 박죠, 아버지.”
레오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꼴? 이런 꼴이 무슨 말이냐? 이게 나의 본질이거늘.”
아더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게 아버지의 본질일 리가 없어요. 분명 사탄마귀가 쓰인 걸 거예요.”
레오의 눈이 커졌다.
“사탄마귀? 내가 악마에 들렸다는 거냐?”
“네. 그 사탄마귀의 이름은 칸 마드리드. 아주 나쁜 사탄마귀죠.”
“흐음…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아들아.”
레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칸 마드리드보다 더 나쁜 사람이 레오 바이에른이다.”
아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비스트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레오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생각했다.
‘뭐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비스트의 탄환을 피했어?’
정확히 조준을 한 채 쐈다.
그랬기에 탄알이 빗나갈 리가 없었다.
허나 레오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탄알을 피해냈다.
그 기이한 광경에 아더의 시선이 좁혀질 때였다.
턱을 쓰다듬던 레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흠… 어떻게 해야 레오 바이에른이 나쁜 사람인 걸 전달 할 수 있을까?”
이 말과 함께 레오 바이에른이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이번에는 진실이를 휘둘렀다.
검강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매섭게 뻗어나간 검이 레오의 목을 노렸다.
허나 이번에도 레오는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 일격을 피해냈다.
이에 아더가 눈을 치켜떠진 순간 원을 그리던 레오 바이에른의 손끝에서 무언가 피어올랐다.
흐릿한 연기로 이루어진 잔상이었다.
“레오 바이에른은 죽지 않았다. 죽은 척한 거였지.”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아더도 등뒤에 달린 두 날개를 퍼덕여 그런 레오를 뒤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레오가 설명했다.
“그는… 나는… 아주 영악한 놈이었지. 세상의 진리를 밝히고 저 하늘 위에 있는 무언가에 닿고 싶어 했어.”
레오가 다시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 순간 그의 손끝으로 피어나던 잔상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레오의 뒤를 쫓으며 지켜보던 아더는 눈을 치켜떴다.
‘아버지?’
비가 내리는 하늘.
검은 관.
그 앞에 선 검은 머리칼의 사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레오가 잔상 속에서 웃고 있었다.
[죽은 척하는 것도 쉽지 않군… 하지만 뭐, 덕분에 자유로워졌다.]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사라졌다.
그 속에서 익숙한 사내가 등장했다.
[주인님. 종이 왔습니다.]
케인 도르문트.
조금 전 제 손에 죽은 철천치 원수였다.
그가 살며시 레오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레오가 명령했다.
[슬슬 때가 왔다, 케인.]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웃었다.
[내가 사라진 바이에른은 흔들릴 것이다. 그 틈을 파고 틀어 내 핏줄들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거라.]
레오의 말에 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레오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케인은 굳이 입을 열어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레오의 종복.
그리고 종복은 주인의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케인이 대답했다.
[예. 계획대로 아더 바이에른을 벙어리로 만들고 바이에른의 재정을 압박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닌 바이에른과 관계된 모든 이들을 은밀히 제거하겠습니다.]
케인의 말에 레오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내 충실한 종복이로구나. 내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
이 말과 함께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레오가 어두컴컴한 연구실에 서 있었다.
그런 그가 실험관에 가득한 수많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혈통 복제는 아직인가?]
그의 질문에 도르문트의 흑마법사.
그리고 레오에게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12귀 중 한 명인 뱀이 천천히 대답했다.
[혈통 인자를 녹여내는 데 성공은 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눈을 뜬다 하더라도 미쳐버릴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레오가 입맛을 쩝 다셨다.
[킁… 이 갓난애들을 구하느라 제법 애를 먹었는데 다 버리게 생겼군.]
잠시 고민한 레오가 제안했다.
[이 애들을 악마로 만드는 거 어떤가?]
뱀이 놀라 질문했다.
[이, 이 아이들을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이대로 버리기도 아깝고 악마로 만들어서 라 하르칸에게 줘버려. 놈을 지킬 가디언들도 필요하니깐.]
레오의 명령에 뱀의 표정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흑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 알려진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이 레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흠… 그래. 인간도 재활용할 수 있으면 좋지. 뭐든 버리기엔 아까우니깐.]
만족스레 웃은 레오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조금 전보다 더 나이를 먹은 레오가 실험관에 갇힌 회색 머리칼의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놈이 라 하르칸을 노렸다고?]
레오의 질문에 뱀이 대답했다.
[예. 듣기로 라 하르칸이 잡아먹은 드래곤의 복수를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레오의 표정에 놀람이 깃들었다.
[허허… 그거 신기하군. 드래곤을 따르는 칼잡이는 저 북부에 있는 레버쿠젠 가문만인줄 알았거늘….]
말을 흐린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버리기엔 아깝군 그렇지?]
뱀이 조심스레 전언했다.
[혈통인자를 주입해 볼까요?]
[아니. 그 불안정한 실험을 하기엔 너무 아까워. 성공확률이 너무 낮으니깐.]
뱀이 입맛을 다셨다.
그 사이 골똘히 고민하던 레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복제를 한 번 해볼까?]
뱀이 눈을 끔뻑였다.
[복제… 말씀이십니까?]
[그래. 보니깐 평범한 칼잡이도 아니고 검기도 다룰 줄 알고… 재능이 꽤 괜찮아 보이는데 복제를 한 번 해보지.]
뱀이 당황해 질문했다.
[그, 그… 인간을 복제할 수가 있습니까?]
[왜 못하나?]
[…?]
[영혼을 일단 쪼개봐. 그 다음에 육체도 정성스레 잘라서 배양 좀 시켜놓고. 육체와 영혼만 있으면 그게 인간 아닌가? 아주 쉬운 일이지.]
뱀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속에서 드러난 그의 당황에 레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쿠. 내가 너무 인간 같지 않게 말했나?]
[어, 어… 아닙니다. 황자님.]
[이해하게. 내가 원래 실리주의적인 사람이라서 말이야.]
뱀의 어깨를 두들긴 레오가 몸을 돌렸다.
[그럼 수고 좀 해주게. 조언을 해주자면 실험을 할 때 귀를 막게. 영혼이 찢어지면서 나오는 비명에 고막이 나갈 수 있으니깐.]
그와 동시에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방안.
그곳에 레오와 케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천둥번개가 치는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미묘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주인님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레오가 느긋이 차를 들이켜며 대답했다.
[뭐가 궁금한가?]
케인이 망설이며 질문했다.
[주인님께서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레오가 눈을 끔뻑였다.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최근 제 세상이 약간 바뀌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라?]
[예. 좀 더 정확히는….]
케인이 자신 없다는 듯 말을 흐렸다.
[모든 게 제 아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제 상태가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오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오호… 그러니깐 이안. 그 아이가 자네의 중심이 되었다는 거군?]
케인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레오가 턱을 쓰다듬었다.
[흠… 이해하기 어렵군. 나한테는 그런 감정이 없어서 말이야. 나한테 있어 가족은….]
말을 흐린 레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 피를 이은 혈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군. 그래서 자네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없어.]
레오의 대답에 케인이 당황했다.
철혈 같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속에서 레오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 가족이 의미가 있긴 하군!]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웃었다.
[언젠가 날 하늘로 올려보내 줄 가장 소중한 도구.]
레오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있어 가족은 그런 의미인 것 같군. 뭐, 이것도 나름 소중하다는 의미….]
레오의 말이 끊겼다.
정확히는 잔상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쾅-!
손에 들린 검에 검강을 두른 아더가 잔상을 베어낸 것이다.
하늘을 비행하며 아더에게서 도망치던 레오가 그 모습에 전율에 떨었다.
“아아… 아들아. 지금 표정… 너무 아름답구나.”
이 말과 함께 레오가 두 손을 꽉 끌어모았다.
“분노로 점칠된 네 표정… 흡사 인간들에게 화가 난 신들의 표정 같구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냐.”
아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을 휘둘러 레오의 목을 노렸다.
이번에도 가볍게 피해낸 레오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쿠크-!
허공이 갈라지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검은색 점액질로 된 손이었다.
하지만 아더는 그 손을 보지도 않고 검강으로 베어냈다.
그리고 쥴리의 혈통을 일으켜 레오를 노리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거대한 날개가 쥴리의 벼락에게서 레오를 보호했다.
[칸 마드리드… 아니. 레오 바이에른.]
드래곤을 잡아먹는 드래곤.
라 하르칸이었다.
방긋 웃은 레오가 라 하르칸의 머리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심장을 되찾았구나 내 드래곤아.”
라 하르칸이 대답했다.
[맞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지?”
[드래곤 로드들이 깨어났다. 내 심장 속에서 숨어있던 모양이더군.]
레오의 표정에 놀람이 깃들었다.
“허허… 천 년을 찾아 헤맨 그 드래곤들의 수장이 네 심장에 숨어있었어?”
[당장에라도 그놈들을 죽이고 싶은데 다시 하트로 향할 건가?]
“음… 아니. 지금은 일단 물러나지. 북부에서의 볼일은 모두 끝났으니깐.”
이 말과 함께 레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케인의 신체가 레오의 곁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비스트를 재장전하며 라 하르칸과 레오를 동시에 노리려 할 때였다.
레오가 해맑게 웃었다.
“아들아.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의 주둥이가 벌어졌다.
흠칫 놀란 아더가 생각했다.
‘드래곤 브레스.’
그 일격에 대비하기 위해 검강을 치켜세울 때였다.
라 하르칸의 주둥이가 돌연 레버쿠젠 군대로 향했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황급히 몸을 돌려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레오가 방긋 웃었다.
“그곳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마.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이 많구나.”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의 주둥이에서 쏘아진 드래곤 브레스가 설원을 뒤덮었다.
…쾅-!
터져나온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 광경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던 레오가 눈빛을 빛냈다.
“자 가자꾸나, 내 드래곤아.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대관식(戴冠式)을 올려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