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구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버쿠젠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괴물….”
저 끔찍한 괴수에게 얼마나 많은 아군이 죽었던가.
저 괴물에게 얼마나 많은 아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가.
머릿속에 새겨진 끔찍한 기억에 레버쿠젠 병사들이 고통에 몸부림 칠 때였다.
갑작스레 터져나온 환한 달빛이 전장을 지배했다.
“…!”
그 순간 전장을 내려앉았던 두려움이 놀랍게도 사라졌다.
그 기이한 현상 속에서 달빛을 두른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모두들 자중하라.”
“…!”
“적의 수장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을 먹는 건 레버쿠젠의 병사가 아니다.”
이 말에 놀랍게도 레버쿠젠 병사들을 괴롭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 기이한 현상에 병사들의 입이 벌어진 사이, 홀란이 시선을 돌렸다.
하늘의 태양을 집어삼킨 구렁이가 고고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 하르칸… 네놈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이 말에 라 하르칸의 주둥이가 벌어졌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어서 말이야… 슬슬 하트를 되찾아야하거든.]
홀란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지 못할 것이다.”
[…?]
“오늘이야 말로 네 놈을 죽이고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겠다.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이고 네 놈의 죗값을 치러라.”
라 하르칸이 잠시 침묵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석구나 드래곤을 지키는 기사야. 운명은 내가 아니라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라 하르칸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때 검은 숲에서 죽었어야 할 네 놈의 운명이 아직 널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홀란이 검을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운명은 극복하라 있는 것….”
말을 흐린 홀란이 눈빛을 빛냈다.
“그러니 누구의 운명이 정답인지, 이 자리에서 시험해보자꾸나.”
라 하르칸이 코웃음을 쳤다.
[드래곤은 운명을 지배하는 존재….]
그걸 신호로, 멈추었던 악마와 드라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날 상대로 네 운명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드래곤을 지키는 기사야.]
* * *
악마들이 괴성을 질렀다.
[끼에에엑-!]
그 고성과 함께 악마들이 다시 돌격을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버쿠젠 병사들도 거칠게 소리쳤다.
“가문의 영광을-!”
“홀란 레버쿠젠! 제국 최고의 기사를 지원해라!”
“저 분의 싸움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단 한 발자국도 모두 물러서지마라!”
그 외침과 함께 악마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돌격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똑같이 달려 나간 두 군대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거칠게 충돌했다.
쾅-!
터져나오는 폭음과 함께 피분수가 곳곳에서 솟구쳤다.
“크아아악-!”
[끼에에엑!]
괴성과 비명이 울려퍼지며 여기저기서 죽음이 피어올랐다.
그 전장 속에서 레버쿠젠 기사단이 깃발을 쳐 올렸다.
“드라칸은 우리가 막는다!”
“저 놈의 비늘에 검기가 막히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배밑을 노려라! 그곳을 찌르면 저 괴물들도 죽는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 순간 질주를 멈추었던 레버쿠젠 기사단이 다시 앞을 향해 돌격했다.
[크와와왁-!]
그 광경을 지켜보던 드라칸들이 날개를 펄럭였다.
드래곤이 되지 못한 구렁이들이 낮게 비행하며 질주하는 기사단의 목을 노렸다.
그 순간 레버쿠젠 기사단의 검기가 번쩍였다.
쾅-!
그 무엇도 뚫을 수 있는 창과, 그 무엇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거칠게 맞부딪쳤다.
그 속에서 홀란의 시선이 라 하르칸에게 향했다.
“….”
하늘을 지배하는 거대한 구렁이가 세 개의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홀란은 억지로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이다, 홀란 레버쿠젠.’
라 하르칸.
저 괴물에게 제 오른 팔이 잘린 날이었다.
‘네가 아끼는 부하들에게 배신당하고, 네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네 영혼은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악랄한 저주와 함께 수 백 마리의 악마와 수십 마리의 드라칸이 두려움을 잊은 채 돌격해 들어왔다.
그 일격에 맞서 홀란은 수십 번, 수백 번 검을 휘둘렀다.
허나 달려오는 괴물들의 숫자는 전혀 줄지 않았고, 결국 한계에 달한 체력은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다.
콰직.
한 순간 보인 빈틈에 숨죽여 빈틈을 노리던 라 하르칸에게 오른 팔을 내어준 것이다.
그 기억을 되새기던 홀란이 중얼거렸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공포에 절여 있었다….’
홀로 괴물에게 맞서 싸우던 고독한 시간.
그 속에서 내색하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공포에 짓눌러 가문의 사명이라는 핑계에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이 사라졌던가.’
레버쿠젠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
시민들.
기사들.
그들 모두가 제 실수로 인해 소중한 목숨을 잃어버렸다.
‘그 무엇으로도 매꿀 수 없는 실수… 였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 죗값을 치러야했다.
홀란은 심신을 안정시킨 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왼팔로 검을 들어올렸다.
파앗-!
반짝이는 달빛이 그 검에 둘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 하르칸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강…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무기… 그래서 그 무기만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주둥이를 벌렸다.
그 순간 거친 화염이 라 하르칸의 주둥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니 그 무기만 내게 닿지 않으면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기사야.]
드래곤 브레스.
드래곤만이 사용 할 수 있는 최악의 마법이 발동된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홀란이 자리에서 뛰쳐올라 검을 크게 휘둘렀다.
자연스레 검에 둘린 달빛이 그 일격에 따라 반원을 그렸다.
동시에 검에 머물러 있던 달빛이 뿜어져 나와 라 하르칸의 뿜어낸 화염과 거칠게 충돌했다.
쾅-!
엄청난 후폭풍이 드래곤 브레스와 달빛이 만난 지점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 속에서 자리에 뛰쳐오른 홀란이 라 하르칸의 심장을 노렸다.
허나 그 일격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라 하르칸이 발동시킨 용언으로 가볍게 막아냈다.
와차차창-!
단 한번의 일격으로 수십개의 보호 마법이 사라졌지만, 그 뒤에는 수 십개의 보호마법이 더 남아 있었다.
그 광경에 홀란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괴물이라 해도 역시 드래곤이라 이건가.’
그 어떤 주문도 영창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 숫자의 보호마법이라니.
하지만 깊이 감탄 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사이엔가 허리를 숙인 라 하르칸이 꼬리를 휘둘렀다.
대기를 가르며 쇄도하는 그 일격을 홀란이 비정상적인 몸놀림과 더불어 검강으로 막아냈다.
챙-!
분명 꼬리와 쇠가 맞부딪쳤는데, 기이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귓가를 찢는 듯한 그 괴성 속에서 다시 한 번 도약한 홀란이 검을 내질렀다.
‘단 한번! 단한번만 이 검이 놈의 심장에 닿으면 된다!’
그 생각과 함께 달빛이 라 하르칸의 가슴을 쇄도 할 떄였다.
뒷통수로부터 거친 바람이 느껴졌다.
눈을 치켜뜬 홀란이 내지르려던 검을 황급히 수습해 뒤를 막았다.
쾅-
울려퍼진 폭음과 함께 홀란의 신체가 허공을 비행했다.
동시에 목을 타고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 하르칸이 폭소를 터트렸다.
[멍청하구나 기사야! 내가 너와 정정당당히 싸워 줄 줄 알았느냐!]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의 뒷편으로부터 다섯명의 악마 거신병이 등장했다.
[너의 무기는 나를 유일하게 죽일 수 있는 무기다! 그런 무기에 왜 내가 굳이 정정당당히 싸워주겠느냐!]
그 도발과 함께 악마 거신병이 홀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크기만 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는 일격에 홀란이 피하는 대신 자리에 서서 검강을 휘둘렀다.
쾅-!
악마 거신병의 주먹과 홀란의 검강이 맞부딪쳤다.
두 개의 주먹이 그 반동으로 부서졌지만, 아직 세개의 주먹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세개의 주먹 중 하나가 홀란의 복부를 두들겼다.
끔찍한 고통이 머리를 두들겼다.
‘갈비뼈 두 개가 나갔다. 내장도 파열됐어.’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다르게 보면 경미한 부상이기도 했다.
만약 온몸에 두른 마나 실드가 아니었다면 하반신이 통쨰로 날라갔을지도 몰랐다.
그 속에서 악마 거신병들이 또 다시 덤벼들었다.
홀란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검을 휘둘렀다.
쾅-!
흩뿌린 달빛이 악마 거신병의 주먹을 부쉈다.
허나 옆에서 치고들어온 주먹은 피해내지 못했다.
그 순간 마나 실드가 깨지며 홀란의 오른쪽 귀가 사라졌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폭소를 터트렸다.
[처음엔 오른 팔! 이번에는 오른 쪽귀! 다음엔 어디냐!]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드래곤 브레스를 쏘아냈다.
눈을 치켜뜬 홀란이 제뒤에서 싸우고 있는 레버쿠젠 병사들을 떠올렸다.
‘내가 피하면 저들이 죽는다.’
그 생각과 함께 홀란이 높이 뛰쳐올랐다.
동시에 휘둘러진 달빛이 드래곤 브레스를 반으로 쪼갰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 알려진 마법을 부숴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치고들어오는 악마 거신병의 주먹은 피해낼 수 없었다.
콰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꼐 홀란의 신체가 힘없이 추락했다.
‘허리? 골반? 아니면… 둘 다인가?’
생각과 함꼐 자리에서 일어난 홀란이 피를 왈칵 토했다.
뒤늦게 홀란의 상태를 확인한 레버쿠젠 기사단이 놀라 소리쳤다.
“가주님!”
“가주님을 지켜라!”
“모두 말머리를 돌려!”
이 말과 함께 레버쿠젠 기사단이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홀란이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며 일갈했다.
“모두 눈앞에 적에 집중해라!”
“…!”
“여기서 균형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는다! 절대로 내게 오지 말고 눈앞에 적에 집중해라!”
레버쿠젠 기사단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 하지만… 가주님.”
말을 흐린 레버쿠젠 기사단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지원을 거부한 홀란의 상태가 끔찍하다 못해 처참했기 때문이다.
새하얀 흰수염과 머리는 이리저리 찢겨져 볼품이 없었고, 그의 강인한 육체는 어느사이엔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잘려나간 오른쪽 귀와 터져버린 오른쪽 팔의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만약 그가 홀란 레버쿠젠이 아니었다면, 반시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꼴이었다.
허나 레버쿠젠 기사단은 말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홀란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자리를 이탈하면 이 전쟁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리고 균형의 무너짐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했다.
입술을 악문 레버쿠젠 기사단이 검을 치켜들었다.
“최대한 빨리 이 놈들을 정리하고 가주님을 지원한다!”
“모두 속도를 내!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가주님이 우리를 위해 벌어준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레버쿠젠 기사단이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홀란이 가벼운 한숨을 내어쉬었다.
‘…한계다.’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과 악마를 닮은 거인이라 해도, 이 정도로 무기력하게 일격을 허용 한 것에 수치심보다는 놀라움을 느꼈다.
‘나이… 세월… 이것들이 날 좀먹는 것인가.’
아니면 잘려나간 오른 팔의 후유증 탓일까.
어느쪽이건 지금의 자신은 전성기에서 자신에게서 많이 멀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홀란의 눈앞에 한계가 아른거렸다.
육체가 실력이 아닌, 삶의 끝자락이 눈앞에 피어오른 것이었다.
그 사실에 홀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 최고의 기사… 소드마스터… 그 사실이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군.’
그 떄 라 하르칸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인간은 나약하다.]
이 말과 함께 세 개의 눈동자를 번뜩인 라 하르칸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검강이라는 무기를 지녔어도, 그 육체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하지. 결국 너는 인간이다. 드래곤을 지키는 기사야.]
그 웃음과 함께 다섯명의 악마 거신병이 다시 움직였다.
그 광경을 흐릿한 시야로 지켜보던 홀란이 검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에 라 하르칸이 다시 한 번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인간이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발악해라 기사야.]
이 말과 함께 악마 거신병들이 주먹을 내질렀다.
세상을 가르며 날아오는 그 거대한 돌덩이를 지켜보던 홀란이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화악-!
흩뿌려진 달빛과 함께 갈라진 세상이 또 한번 갈라졌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눈을 치켜뜨고, 다섯 마리의 악마 거신병 중 두 마리의 악마 거신병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뭐? 내 거인들의 목이 이렇게 쉽게 잘린다고?]
라 하르칸의 경악과 함꼐 홀란이 찢어진 군복을 집어던졌다.
그 순간 그의 가슴팍에서 새파란 빛이 터져나왔다.
그 기이한 이변에 라 하르칸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떤 그 때, 홀란이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 인간은 나약하다.”
이 말과 함께 검을 움켜잡은 홀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을 마주친 라 하르칸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눈이… 타오르고 있어?’
놀랍게도 지금의 홀란 레버쿠젠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것도 새파란 불꽃이.
그 사실에 라 하르칸이 묘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이, 홀란이 손에 들린 검을 사선으로 빗겨세웠다.
“그것도 삶을 끝자락에 선 노인이지… 하지만 괴물아.”
이 말과 함께 홀란이 포효했다.
“인간이기에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다!”
그 포효와 함께 그의 몸 전신에서 새파란 불꽃이 터져나왔다.
“인간이기에 지금 껏 싸워올 수 있었고, 인간이기에 검을 들 수 있었다!”
달빛마저도 잡아먹는 그 거친 불꽃이 전장을 불태웠다.
그 순간 홀란은 전혀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여놓으며 선언했다.
“그러니 잘 봐라. 이게 나, 홀란 레버쿠젠의 마지막 검(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