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새까만 깃털이 휘날렸다.
동시에 허공을 비행하던 까마귀 무리들이 평야에 내려앉았다.
까악-!
거친 울음을 내뱉은 까마귀 무리들이 피로 물든 평야를 잠시 훑었다.
피로 범벅이 된 평야의 광경은 좋은 말로도 썩 좋지 못했다.
허나 까마귀 무리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또 한번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까악-!
피와 살점을 뜯어먹어 삶을 연명하는 까마귀들로서는 지금의 이 평야는 최고의 장소였다.
어딜 보아도 즐비한 시체는 그들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까마귀 무리들이 시체를 향해 달려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등장한 외팔이 노인이 그런 까마귀 무리를 하나뿐인 손으로 내쫓았다.
까악-!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내뱉은 까마귀 무리가 다시 허공으로 비상했다.
대신 피와 살점으로 가득한 평야로 들어선 노인이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버쿠젠의 문양을 단 채 죽어간 병사 한 명의 눈을 감겨주었다.
“…미안하구나. 편히 잠들어라.”
짧은 고해를 성사를 마친 노인, 홀란이 몸을 일으켰다.
3일간 밤낮없이 싸운 전장이 자연스레 보였다.
분명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영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은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 탓에 홀란은 자연스레 그간의 전쟁을 복기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승리했다. 그것도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갑작스레 등장한 라 하르칸과 악마무리.
그들은 레버쿠젠의 병사와 기사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자랑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비교하자면 5:1일 정도.
그리고 5:1이란 병력의 차이는 전쟁에서 패배를 의미했다.
‘단순한 숫자나 전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길 수 없는 격차가 바로 지금 우리와 저 악마들 사이의 간격이다.’
하지만 레버쿠젠 병사들의 놀라운 투지는 기적을 일궈냈다.
그 엄청난 병력 차이 속에서 악마들을 상대로 놀라운 분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홀란은 그 전장에 줄곧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단연 눈부신 활약을 펼친 건, 나와 함꼐 검은 숲에 들어갔던 기사들이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수치심에 자결을 하려 했던 스무명의 기사들.
그들은 그 일을 만회하기라도 몸을 던져가며 전쟁을 주도했다.
만약 그들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은 일찍이 레버쿠젠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 있을까?’
생각과 함께 홀란이 고개를 들었다.
시체로 가득한 평야가 보였다.
평야를 가득 매운 시체의 절반 이상은 분명 악마들의 것이지만, 그 한쪽은 분명 레버쿠젠 병사들의 것이었다.
병력의 숫자 차를 생각하면,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다.
‘많아 봐야 세 번. 그것도 지금과 같은 분전이 있을 경우에서다.’
만약 한 번이라도 승기를 놓친다면, 전멸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탓에 홀란은 자연스레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승부수를 던질 시점이 온 건가.’
이쪽이 패배하건, 승리하건.
이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할 전투를 치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승패를 결정짓는 건 나와 라 하르칸.’
어느쪽의 목이 먼저 떨어지냐에 따라 이번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홀란이 눈빛을 번뜩였다.
‘다음 전쟁에서… 반드시 그 괴물을 잡아야 한단 소리군.’
하나 뿐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홀란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허공에서 지켜보던 까마귀들이 울음을 내뱉었다.
까악-!
기다렸다는 듯 내려온 까마귀들이 홀란이 떠나간 자리를 틈 타 시체의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 청소는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 * *
지니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짧게 숨을 들이쉰 지니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손을 움직여 총과 칼을 찾아았다.
“….”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지니가 뒤늦게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요란을 떤 것치고 주변의 풍경은 아주 평화로웠다.
작은 침대와 난로하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야전 막사의 풍경이었다.
‘잠들었구나… 그런데 언제 잠든 거지?’
신기하게도 잠들기 전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정신없이 악마들과 싸우던 떄의 기억 뿐이었다.
잠시 고민한 지니가 옆에 있던 냉수를 들이켰다.
그 순간 혼란스러운 정신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주변을 풍경을 둘러보던 지니는 걸음을 옮겨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가 보였다.
3일간의 쉴 틈 없는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잠들었는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살피던 지니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찾아오는 지 어둠이 조금씩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때,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바이에른을 상징하는 사자 문양이 보였다.
지니가 고개를 까닥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니의 인사에 바이에른의 기사가 옅게 웃었다.
“레이디 지니. 잘 자셨습니까?”
“네. 정말 정신없이 잤네요. 그쪽은 눈 좀 붙이셨어요?”
“저도 방금 막 일어난 참입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니, 살 것 같군요.”
기사의 말에 지니가 눈을 굴렸다.
잠을 잔 사람치고, 그의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밤을 샌 건가?’
걱정이 되었지만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기사정도 되는 사람이 제 상태를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진 지니였다.
“전황은 좀 어때요? 괴물들이 다시 몰려오는 중인가요?”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저녁에 모두 물러난 이후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한마리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니가 눈길을 좁혔다.
“그거 이상하네요… 갑자기 이유없는 퇴각이라니.”
“그래서 다들 의아하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딱히 걸맞는 이유는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사의 설명에 지니가 입을 다물었다.
‘흠….’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할 말이 떨어져버렸다.
‘내가 이 사람들하고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지?’
그 탓에 지니가 자신도 모르게 눈치를 보던 그 때였다.
기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레이디 지니. 혹시 제 이름 아십니까?”
“……?”
“제법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한 번도 제 이름을 안불러주시더군요. 혹시 제 이름 아십니까?”
지니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어… 그게….”
기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흠…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너무 하시군요. 그래도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인데 이름 조차 모르다니?”
지니가 민망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사과했다.
“그… 죄송해요. 제가 머리가 안 좋아서, 기억력이 살짝….”
“용서드리겠습니다. 대신 이제부터라도 기억해주세요.”
“…이름이 뭐죠?”
“아르반 하루입니다.”
“아르반… 하루… 좋은 이름이네요.”
기사가 흡족히 웃었다.
“제 이름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래서 꽤나 자부심이 있습니다.”
지니도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자부심이 넘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정도로 좋은 이름이지 않습니까?”
“음… 인정해요. 좋은 이름이긴 하네요.”
지니의 인정에 기사 아르반이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시시껄렁한 잡담이었는데, 제법 말솜씨가 있는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 아르반과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던 때, 그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안색이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어젯밤까지 하더라도 지니 양께서는 거의 시체 몰골이나 다름 없었거든요.”
지니의 눈이 약간 커졌다.
“제가 그랬나요?”
“네. 다름 사람들도 뭐 다를 바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람이라 그런지 더욱 눈에 띄더군요.”
“…….”
“부끄러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데, 안색이 좋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미친놈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표정이 안 좋긴 마련입니다.”
지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 주인분은 사람을 썰고도 웃으시던데요….’
하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더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 기사에게 이야기 해줘봐야 어차피 제 멋대로 좋은 식으로 해석 할 테깐.
그 속에서 지니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배려 고마워요. 기사님과의 대화 덕에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졌네요.”
기사 아르반이 멋쩍에 웃었다.
“티났습니까?”
“눈치채지 말았어야 했나요?”
“……음. 그건 그것대로 굴욕이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 부인에게도 맨날 눈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지니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웃겨서 터트린 웃음이었다.
그 사이 아르반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마십시오 레이디 지니. 모든 게 다 잘풀릴 겁니다. 특히 가주님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게 해결 될거에요.”
그 목소리에는 강한 믿음을 넘어 신앙이 깃들어 있었다.
“그분이 돌아온 뒤 바이에른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번 전쟁도 가주님꼐서 돌아오시면 해결 될 겁니다.”
지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믿고 있어요.”
이 말과 함꼐 아침이 밝아옸다.
전쟁을 맞이한지 4일째 되는 날이 된 것이다.
그 속에서.
“…하트가 습격받았습니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 *
홀란은 미간을 매만졌다.
그 속에서 레버쿠젠의 막사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령들의 전보에 의하면 하트의 성문 앞에 수 백마리의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드라칸과 악마 거신병의 모습도 엿보인다는 급보입니다!”
“현재 하트의 성벽을 지키는 병력은 500명! 성벽을 지키기에도 벅찬 숫자입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급보.
그 어지러운 상황에서 홀란은 상황을 정리했다.
‘설마 병력을 나누어서 하트를 공격할 줄이야.’
당혹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라 하르칸.
드래곤을 잡아먹는 그 괴물의 목표는 하트의 수호석이라 불리는 최초의 드래곤 하트다.
그 심장을 빼앗기 위해 모든 병력을 이쪽에 집중시킬 줄 알았는데, 설마 하트를 공격 할 줄은 꿈에도 예상 못한 홀란이었다.
‘이쪽의 병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의도… 로 보이는 군.’
만약 하트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쪼개면 저쪽의 본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다.
허나 하트를 버리자니, 이번 전쟁의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이 전장에 나선 병사와 기사들이 싸우는 이유는 하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였으니.
그 탓에 홀란의 미간이 깊게 파인 그 때, 한 부관이 소리쳤다.
“병력을 돌려야 합니다!”
상당히 흥분한 그는 전 병력의 회군을 주장했다.
“하트를 버리는 건 보급로는 물론이고, 저희의 모든 걸 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 가주! 지금이라도 병력을 돌려 하트를 수성해야 합니다!”
그의 주장에 막사가 술렁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대부분 부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타깝지만 맞는 말이다.”
“뒤를 잡히더라도 일단 하트를 수성해야 해.”
“그곳을 포기한다는 건 전쟁의 패배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 상황을 홀란이 잠시 관망 할 때였다.
누군가 불쑥 손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개를 돌리니, 뾰족한 귀가 눈에 띄는 미인이 굳은 표정으로 발언권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니였나?”
홀란의 질문에 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가주님.”
“자네가 바이에른 기사들의 대리인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어보이는 데, 말하게.”
이 말에 지니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전선을 절대로 물리면 안됩니다.”
지니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막사가 또 한번 술렁거렸다.
오로지 홀란만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공자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
홀란의 눈이 커지고, 레버쿠젠 부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속에서 지니가 설명을 이었다.
“저희가 전선을 물리면 검은 숲으로 들어간 공자님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면 안됩니다.”
그녀의 주장에 레버쿠젠의 부관이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고작 두 명을 구하자고 레버쿠젠 심장인 하트를 버리자는 이야기인가!”
지니가 싸늘한 시선으로 되받아쳤다.
“고작 그 두명이 며칠 전 위험에 빠진 하트를 구했내죠.”
“…!”
“그리고 지금도 하트를 구하고자 위험을 감수하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 두사람을 버리자는 이야기입니까?”
흥분한 부관들이 아우성쳤다.
하트의 중요성과 두 사람의 임무 실패.
더 나아가 외부인이 어딜 함부로 발언을 하냐는 이야기까지 오고갔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야기들이지만, 하트가 위험에 빠지자 이성이 나간 부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니가 참지 못하고 되받아치려던 순간이었다.
무겁고 낮은 기운이 갑작스레 뿜어져 나와 막사를 짓눌렀다.
“…!”
깜짝 놀란 지니와 부관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하나 뿐인 팔로 검을 뽑아든 홀란이 보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킨 그 때, 홀란이 입을 열었다.
“레버쿠젠의 군인들이여. 자네들의 의견은 잘 알았네.”
“….”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싸워주는 동맹군을 외부인취급하는 건 선을 넘었군. 아닌가?”
홀란의 질문에 레버쿠젠의 부관들이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주.”
“나한테 사과 할 게 아니네.”
“…죄송합니다 바이에른의 대리인이여. 저희의 실언을 용서하소서.”
그들의 사과에 지니가 힐끔 시선을 돌렸다.
엄중한 표정이 된 홀란이 보였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지니는 결국 한숨을 내어쉬며 고개를 숙였다.
“사과 받아들일게요.”
“….”
이 말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가 이루어졌다.
지니와 레버쿠젠 부관들 모두가 침묵한 채 서로를 눈치를 보았다.
그 불편한 상황 속에서 의미없는 시간이 흘러가려 할 때였다.
침묵하던 홀란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수 같군.”
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홀란이 레버쿠젠의 군인과 지니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양수겸장(兩手兼將)…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순간이 온 것 같군.”
홀란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