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카셀은 오랜만에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다.
[내 아이야. 이리로 오너라.]
파라하 드 카셀.
자신에게 카셀 브리드란 이름을 지어주고 인생을 준 드래곤.
카셀은 그 부모와도 같은 드래곤의 목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때 파라하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아이야. 너는 기사다. 세상을 지켜줄 구원자를 지키는 기사. 그러니 지금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카셀이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사?
세상 그 누구보다 기사에 어울리지 않은 자신이 구원자의 기사란 말인가?
허나 그 의문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탓에 입술만 달싹이던 그 때, 어둠으로 가득찬 통로 너머.
한 줄기의 빛이 갑자기 내리쬈다.
눈을 치켜뜬 카셀이 그 빛을 향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
파라하 드 카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붉은 비늘의 드래곤이 시야에 담겼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카셀은 속으로 소리쳤다.
‘존재시여-!’
그 소리없는 외침을 듣기라도 한걸까.
파라하가 낮은 하울링을 토해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구나.]
이 말과 함께 파라하가 고개를 숙였다.
[카셀. 너의 운명은 기구하단다. 어쩌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기구할지 몰라.]
파라하의 커다란 두 눈이 우수에 젖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셀의 눈이 커졌다.
수 십년간 저 드래곤과 같이 살면서, 저런 눈빛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파라하가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말지는… 네 선택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는 것은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다.]
이 말과 함께 찬란한 빛이 터져나왔다.
‘…!’
깜짝 놀란 카셀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 사이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가 코앞에 내려앉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카셀이 그 무언가를 조심스레 집었다.
그 순간 카셀은 자연스레 빛을 내뿜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심장.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영약.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보물.
하지만 카셀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끔찍한 물건.
어깨를 떤 카셀이 그 빛을 내팽개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존재시여!’
화를 낸 카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은 파라하를 향해 소리없는 외침을 부르짖었다.
‘지금 드래곤에게 길러진 저에게 드래곤의 심장을 먹으라는 뜻입니까!’
이 말에 내팽개쳐진 빛이 속삭였다.
[그런 뜻이 아니다 카셀.]
‘그런 뜻이 아니면 대체 뭡니까 이건!’
[그 하트는 널 지켜줄 방패란다.]
파라하셀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앞으로 네가 싸워야 할 적들은 세상 그 자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너무나도 불안정하지.]
파라하의 말에 카셀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카셀은 그간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영혼이 찢겨진 자신은 과연 카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더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랬지만, 나는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그 의문들이 쌓이고 쌓여 고름처럼 마음의 병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제 부모와도 같은 파라하의 말에 그 상처가 터져버렸다.
카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열했다.
‘존재께서는 제가 카셀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어리광이라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카셀이 아니에요. 영혼이 찢겨진 놈이 어떻게 인간이라 불리겠습니까?’
이 말과 함께 카셀이 고개를 떨구었을 때였다.
조금 전 내팽개 쳤던 빛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순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따뜻한 온기가 카셀의 전신을 감쌌다.
[미안하구나. 내 조급함이 너의 상처를 건드렸구나.]
“….”
[의심하지마라 아이야. 너는 카셀이다. 내가 기르고 내가 이름을 지어준 내 하나 뿐인 아이. 영혼이 찢겨져도 그 육신이 사라져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카셀이 흘리는 눈물을 숨기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은유적으로 표현은 할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 내가 굳이 왜 그러겠느냐?]
카셀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파라하가 속삭였다.
[그리고 설령 괴물이라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
[네가 어떤 모습이건, 나는 널 사랑한다. 너는 내 아이니깐.]
카셀의 입이 벌어졌다.
‘…이런 제가 여전히 당신의 아이란 겁니까?’
[물론.]
파라하의 단호한 대답에 카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건 거짓일지도 모르겠군요.’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이 품는 건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구나.’
‘…존재께서는 참으로 영악하십니다.’
[몰랐느냐? 모든 드래곤은 잔머리가 아주 비상하단다.]
카셀과 파라하가 침묵했다.
그 후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카셀의 눈앞에 있는 빛이 더욱 커졌다.
그 이변에 카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존재와의 만남이 끝나가는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던 카셀은 곧 답을 찾아내고서 질문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지혜로운 현자인 존재시여. 제가 지켜야 할 세상의 구원자가 누구입니까?’
카셀의 말에 파라하가 대답했다.
[그건 네 선택이다.]
‘…네?’
[세상을 구할 구원자를 선택하는 건, 네 몫이다.]
이 말에 카셀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파라하가 점차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카셀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너는 세상을 구할 구원자를 지키는 기사임과 동시에 구원자를 선택하는 선지자(先知者).]
그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카셀의 눈앞에 있는 드래곤 하트가 폭발했다.
[그러니 카셀. 눈앞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너의 선택이 곧 세상을 지킬 것이다.]
&
카셀은 오른손을 빙빙 돌렸다.
우드득.
뼈가 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온몸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그 감각에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카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생을 쫓아온 원수가 상당히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건방진 놈.]
이 말과 함께 괴물의 세 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영혼이 찢어지고, 사지 전부가 없어진 시체누더기 같은 놈이 감히 내 식사를 망쳐?]
괴물, 라 하르칸의 말에 카셀이 대답했다.
“…물러서라 라 하르칸.”
[…?]
“내 주군에게 너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다.”
카셀이 등허리에 맨 대검을 뽑아들었다.
파라하 드 카셀.
제 부모의 비늘로 만들어진 드래곤 소드였다.
그 검을 사선으로 빗겨든 카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세개의 눈동자를 모두 파내주마. 자신 있으면 움직여라.”
라 하르칸이 눈을 끔뻑였다.
[…]
괴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그 상태로 낮은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라 하르칸이 중얼거렸다.
[네가 내 눈동자를 파내? 시체 누더기가?]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그 웃음소리에 대기가 들썩였다.
허나 카셀은 당황하지 않고서, 제 검과 라 하르칸의 간격을 재는 데 집중했다.
그 사이 고개를 숙인 라 하르칸이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질문했다.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나에게 덤벼들어 영혼이 분해되고, 사지가 날라간 네가?]
라 하르칸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래…결국, 네 놈의 그 시체 누더기의 육신마저 집어삼켜야 분수를 깨달을 모양이구나. 카셀 브리드.]
이 말과 함꼐 라 하르칸이 주둥이를 벌렸다.
화아아아악-!
대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변에 카셀은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드래곤 브레스.’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다 알려진 화염.
그리고 저 화염에 의해 지난 날의 카셀 브리드는 패배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과 함께 카셀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떄와 다르다.’
내놓은 대답과 함께 카셀이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라 하르칸이 소리쳤다.
[내 브레스에 재가 되어 사라지거라! 영혼을 잃은 시체야!]
그 외침과 함께 거대한 불꽃.
아니 태양이 세상을 향해 작렬했다.
그와 동시에 카셀의 검도 움직였다.
‘파라하 드 카셀. 저를 부디 지켜봐주소서.’
낮게 읆조린 주문과 함께 카셀이 기합을 토해냈다.
그 순간 그의 대검에 붉은 빛 검기가 치솟아올랐다.
화악-!
세상 그 무엇도 벨 수 있다 알려진 칼잡이들의 절기.
하지만 라 하르칸이 내뱉은 드래곤 브레스는 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들의 브레스는 세상의 이치에 벗어난 마법.
그랬기에 붉은 빛 검기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허나 카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온 정신을 검에 집중한 채 제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 속에서 카셀의 붉은 검기가 번뜩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화악-!
타오르는 절기가 맑은 달빛으로 뒤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파라하 드 카셀.
그가 남겨준 또 다른 심장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 거친 박동을 느낀 카셀이 입꼬리를 올린 채 중얼거렸다.
‘당신이 남겨준 심장. 그 심장으로 싸우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카셀이 브레스를 향해 내달렸다.
깜짝 놀란 라 하르칸이 소리쳤다.
[뭐!? 달빛이라고!?]
그 외침과 함께 카셀의 붉은 대검에서 달빛이 폭발했다.
그 순간 하나의 선이 된 달빛이 라 하르칸의 드래곤 브레스와 충돌했다.
솨악-!
기이한 소리와 함꼐 드래곤 브레스가 갈라졌다.
라 하르칸이 경악을 토해내며, 주둥이를 벌렸다.
[이,인간이!! 내 브레스를 베어냈다고!?]
“한 눈 팔 시간 있나?”
[…!]
라 하르칸이 뒤늦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허나 이미 거리를 좁힌 카셀은 그 물러섬을 봐주지 않았다.
달빛을 두른 대검으로 놈의 가슴팍을 베어냈다.
[끼에에엑-!]
괴성을 지른 라 하르칸이 꼬리를 움직였다.
채찍과도 같이 쏘아진 꼬리가 카셀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가뿐하게 고개를 비트는 것으로 그 일격을 피해낸 카셀이 다시 한 번 검을 내질렀다.
[건방진 녀석!! 달빛을 둘렀다 하여, 끝인 줄 알았더냐!]
라 하르칸이 용언을 발동시켰다.
그 순간 거대한 화염이 솟구치며 사방에서 카셀을 노렸다.
허나 카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 화염을 뚫고 라 하르칸에게 다가갔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놀라 눈을 치켜뜬 순간, 카셀이 중얼거렸다.
“파라하 드 카셀. 그 분의 비늘로 만들어진 이 검 앞에서는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카셀의 설명에 라 하르칸의 주둥이가 벌어졌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건 말이…!]
라 하르칸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그와 동시에 카셀의 달빛이 괴물의 날개를 베어냈다.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 라 하르칸이 몸을 돌렸다.
허나 카셀의 대검은 자비가 없었다.
이번에는 몸을 돌린 라 하르칸의 등을 베어냈다.
그 순간 검은 피가 폭포수마냥 허공으로 치솟아올랐다.
그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카셀이 이번에는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이번에는 괴물의 두 다리를 잘라내려 할 때였다.
콰아아앙-!
라 하르칸의 주둥이 속에서 다시 한 번 드래곤 브레스가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용언까지 발동시킨 라 하르칸이었다.
화아아아악-!
드래곤 브레스와 용언이 합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카셀을 노리고 날아들어왔다.
입술을 깨문 카셀이 중얼거렸다.
‘역시 쉽지 않다. 괴물은 괴물이라 이건가.’
달빛을 두르고 모든 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 드래곤 소드까지 지녔다.
하지만 눈앞에 다가온 저 에너지를 베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을 라 하르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소드마스터라 해도 결국은 인간!]
라 하르칸이 비웃음이 가득담긴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인간은 결코 드래곤을 이길 수 없다! 저 북부를 지키는 드래곤들의 기사처럼!]
그 속에서 라 하르칸의 에너지 덩어리가 카셀의 머리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잘 가라 카셀 브리드. 내 브레스와 함께 네 놈의 부모 곁으로 가거라!]
라 하르칸의 말에 카셀의 눈길이 좁혀졌다.
“…….”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에너지 덩어리를 바라보다, 뛰쳐올랐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의 눈이 치켜떠진 순간, 카셀이 중얼거렸다.
‘저 일격을 지금의 나로서는 베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놈을 죽이고 같이 공멸하는 것이 최선의 수.
결심과 함께 카셀이 몸을 비틀려 할 떄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탄력감이 두 다리에서 느껴졌다.
“…!”
눈을 치켜뜬 카셀이 그 탄력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맡겼다.
그 순간 허공에 떠오른 몸이 총알마냥 솟구쳐 드래곤 브레스를 돌파했다.
그 광경에 라 하르칸도 놀래고, 카셀도 같이 놀랬다.
그 기적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카셀의 머릿속에 조금 전 뒤집어 쓴 검은 피가 떠올랐다.
‘용의 피는 드래곤 하트 다음가는 최고의 영약.’
그 피를 뒤집어 쓴 자들은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며, 인간의 육신을 초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괴물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강한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 사실을 떠올린 카셀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 하르칸. 네 놈의 힘이 네 놈을 죽일 수 있게 도와주는구나.”
그 웃음과 함께 카셀의 달빛이 번뜩였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라 하르칸이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안 된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입 다물어라.”
[……!]
이 말과 함께 카셀이 달빛을 높게 쳐들어올렸다.
“내 인생을 건 복수다. 지금의 나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 말과 함께 카셀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세상이 갈라졌다.
[…….]
무거운 침묵과 함께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 기묘한 상황 속에서 라 하르칸의 거구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쿵.
묵직한 소음과 함께 괴물의 머리가 한 박자 늦게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셀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구나.”
평생을 받쳐 쫓아온 원수가 마침내 죽었다.
그 순간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