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195화 (195/265)

제195화

아더는 홀란의 달라진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사람다운 눈빛이네.’

조금 전까지의 홀란은 어딘가 죽은 사람 같았다.

축 늘어진 어깨 하며 다크서클이 진 눈 밑.

그 몰골만 보면 반송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 탓에 아더는 홀란을 도발해 대련에 임했다.

걱정과 고민은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 걱정과 고민을 털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정신없이 싸우며 땀 좀 흘리면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법이지.’

다행히 이런 제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진 듯했다.

대련이 끝난 후 반송장 같던 홀란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그 형형한 눈빛은 이제야 레버쿠젠 가문의 수장이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칼잡이다운 모습이었다.

그때 홀란이 중얼거렸다.

“…레오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네가 이렇게 훌쩍 커버린 모습을.”

이 말에 아더가 씩 웃었다.

“걱정마세요 대부님. 이미 아버지는 보셨으니깐.”

홀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 위에서 말이지?”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런 셈이죠?”

“그래. 네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인간이지. 가족 하나 만큼은 끔찍히 아꼈던 녀석이니깐.”

이 말과 함께 홀란이 잠시 아더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질문했다.

“정말로 그 괴물과 맞설 셈이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설 거에요.”

단출한 대답.

하지만 홀란은 조금 전과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아더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것이 네 의지라면 내게 막을 권리는 없겠지.”

“감사해요 대부님.”

“허나 이제 너는 바이에른의 가주다. 우리를 도와주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음… 솔직히 말하면 맞아요. 레버쿠젠 가문에게 원하는 게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저희와 동맹을 맺어주세요. 그리고 도르문트와 같이 싸워주세요.”

“…!”

아더의 말에 홀란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 그래서 아더가 이곳으로 온 것인가.’

바이에른과 도르문트의 관계.

머나먼 북부에 있는 홀란이지만,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제국 최고의 가문이었던 바이에른.

제국 최고의 가문으로 올라선 도르문트.

이 둘의 대립과 소리없는 전쟁.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았던 바이에른의 혈족들.

그 모든 사실은 이 북부에서도 아주 유명한 일화였으니.

‘그 피의 복수를 아더가 마침내 하기로 결심한 모양이구나.’

생각과 함께 홀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여기서 동맹을 수락하면 북부를 지키던 레버쿠젠 가문이 병사들이 대륙으로 나아가 도르문트와 전쟁을 해야 하기 떄문이다.

그것은 레버쿠젠 가문에게 주어지는 업을 어기는 것이오, 어쩌면 제국에 반기가 드는 행동이었다.

그 탓에 홀란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그 때 아더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짐작이지만, 하트를 괴롭히는 그 괴물, 도르문트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대부님.”

“…!”

홀란의 입이 벌어졌다.

“…뭐? 도르문트와 그 괴물이 연관이 있다고?”

“네. 제 지인 중에 그 괴물과 맞섰던 자가 있어요. 허나 패배했고 웬 연구소에 갇혀 끔찍한 실험을 당했는데 그곳이 도르문트의 실험실이었어요.”

홀란이 숨을 참았다.

도르문트가 지금 하트를 공격하는 괴물들하고 연관이 있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불리는 그들이 괴물들하고 연관이 있다니?

‘하지만 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실로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자부하던 그들이 악마와 손을 잡은 꼴 아닌가?’

표정을 굳힌 홀란이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면, 이건 단순히 북부만의 문제가 아니군.”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저희는 더더욱 손을 잡아야 해요, 대부님.”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공동의 적을 둔 지금, 저희는 서로 힘을 합쳐야 해요. 그래야만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어요.”

아더의 말에 홀란이 다시 아더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대부라 부르는 건장한 사내가 보였다.

‘허나 정작 도움을 받는 건 저 아이라 대부인 나로군.’

그 사실에 홀란은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느꼈다.

‘어쩌면 레오가 저 아이의 대부를 내게 맡긴 건, 날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어.’

이 말과 함께 홀란이 눈빛을 번뜩였다.

사실을 안 이상 이 동맹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음을 먹은 홀란이 대답했다.

“네 제안. 받아들이겠다.”

“…!”

“지금 현 시각부터 레버쿠젠은 바이에른이 나서는 그 어떤 시련에도 같이 맞서 싸우겠다.

원하던 대답에 아더가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됐다!’

당초 계획이었던 레버쿠젠 가문과의 동맹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뿐이다.

‘그 라 하르칸이란 괴물을 죽이는 것.’

눈빛을 빛낸 아더가 혀를 날름거렸다.

아더를 대견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홀란이 그 행동에 움찔 놀라 질문했다.

“…아더? 갑자기 혀는 왜 날름거리는 거냐?”

“아,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이 말과 함께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래곤의 피 맛은… 과연 어떤 맛일지 말이에요.”

홀란이 눈을 끔뻑였다.

“드래곤의 피맛이… 어떤 피맛일지 궁금하다고?”

“네. 짐작이지만….”

말을 흐린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최고의 피라 불리는 데 분명 맛있는 피겠죠?”

* * *

카셀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바이에른 기사들이 보였다.

“…….”

다행히 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카셀은 의아해져 중얼거렸다.

‘저놈들이 갑자기 왜 저렇게 바라보지?’

바이에른 기사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예전에는 적대감만 가득했다면, 이제는 약간의 호기심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이 시선에 묻어나 있었다.

호기심이야 그렇다 치고, 기대감은 당최 왜 느껴지는 도통 의문이었다.

그 탓에 괜시리 불안해진 카셀이 자리를 피하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한 기사가 불쑥 입을 열어 질문했다.

“검을 어디서 배웠소?”

“…?”

카셀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입을 연 기사가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기사가 다시 질문했다.

“전쟁터에서 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던데 검을 어디서 배웠소?”

카셀이 당황했지만, 그 티를 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 거요?”

“궁금할 수밖에. 당신 칼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니깐.”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에 카셀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상 보면 칭찬 같기는 한데.’

문제는 여태 자신을 배척하던 저 기사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였다.

잠시 고민한 카셀이 곧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저쪽에서 대화를 걸어왔는데 굳이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드래곤에게 배웠소.”

“…?”

“뭐 배웠다기 보다는 칼을 쥐는 법, 휘두르는 법 정도만 배웠소. 나머지는 다 독학했소.”

말을 건 기사가 눈을 끔뻑였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후 뒤늦은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거 재미없는 농담이로군.”

“차라리 알려주기 싫다라고 하지, 드래곤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요?”

“그럼 자네는 뭐 드래곤의 기사라도 되는 건가?”

기사들의 말에 카셀이 당황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인데?’

허나 굳이 입을 열어 반박하지 않았다.

그 사이 자신에게 맨 처음 질문한 기사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 아시오?”

“…아니.”

“아진테요. 앞으로 같이 함께 할 것 같으니 미리 소개해두겠소.”

카셀이 잠시 고민하다 손을 맞잡았다.

“…카셀이요.”

“카셀. 좋은 이름이군. 어디 출신이오?”

“제국 남부 출신.”

“오. 제국 남부가 그렇게 살기가 좋다는 데 사실이오?”

“내 기억 속에는 밀림밖에 없었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른 바이에른 기사들도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키테요.”

“아슬란이오.”

“파투란이오.”

그 손을 일일이 맞잡는 사이 열거되는 이름에 카셀이 당황했다.

“…미안하지만 내 기억력이 좋지 않소. 지금 이렇게 소개한다고 해서, 다 기억을 하지 못하오.”

이 말에 바이에른 기사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기억 못해도, 어느 순간 기억하게 될 거요.”

“…어느 순간 기억하게 된다고?”

“만약 우리가 죽어갈 때도 기억 못할까?”

“…!"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놀라운 부분이 있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될 거요. 그러니 지금 기억 못하더라도 들어나 두시오.”

카셀이 놀란 눈치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죽을 때 제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부탁일까?

아니면 여태 배척하던 자신을 이제야 무리로 받아들인다는 신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문제는 어떤 부분에서 저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냐는 것이다.

카셀이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지. 최대한 당신들 이름을 기억해보겠소.”

무엇이 저들의 마음을 변화했는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부터 저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그 사이 바이에른 기사들이 만족해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소 기사 카셀.”

* * *

악마들의 침공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 탓에 오랜만에 하트에 생기가 돌았다.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구만….”

“그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안 들리니 밤잠이 잘 오더라고요.”

“이제 곧 있으면 봄인데 농사… 지을 수 있을까?”

하트의 시민들은 그 사실에 감격하며 오랜만의 찾아온 평화를 즐겼다.

그리고 그건 하트를 지키는 병사와 기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휴식이라고 없던 전투의 나날.

그들은 처음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품에 돌아가, 생존의 기쁨을 누렸다.

덕분에 하트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넘쳐났고 레버쿠젠 가문의 사람들은 그 틈을 이용해 성벽을 수리하고 보완했다.

지금이 평화롭다 하여, 악마들의 침공이 끊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자를 비축하고 무기들을 재점검하는 한편 식량도 다시 재편성했다.

그 속에서 엘린도 오랜만에 맞는 평화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

얼마 만에 이런 잠을 잔 것인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날밤을 새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오, 잠깐이라도 눈을 불일 새도 없었다.

틈만 나면 악마들이 기습이며 야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탓일까.

머릿속이 개운하고, 육체가 나른했다.

그 감각을 떠나보내기 싫었던 엘린이 침대에서 빈둥거리다 뒤늦게 어깨를 떨었다.

“…아더 바이에른이 돌아왔어.”

이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엘린이 어수선한 제 방을 지나 그만한 정리를 해둔 서랍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서랍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보석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편지들.

동시에 가장 아끼던 보석들과 그 외 자신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담긴 상자.

그 상자를 잠시 지켜보던 엘린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더가 보내온 편지였다.

[사랑하는 엘린 레버쿠젠에게.]

정갈한 필체로 적힌 서귀를 잠시 지켜보던 엘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가 보면 연애 편지라도 보낸줄 알겠네.”

자극적인 제목치고, 편지의 내용은 극히 정상적이었다.

잘 지내냐, 방학 동안 뭘 할 거냐, 언젠가 북부로 놀러가겠다.

‘이럴 거면 사랑하는 이라는 말은 왜 붙였는지 몰라.’

투덜거린 엘린이었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 지극히 평범한 편지 덕에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설렜지… 그리고 기대에 차 있었지.’

그 오랜만에 되새기는 추억을 잠시 곱씹을 때였다.

낮은 숨결이 제 뒤편에서 느껴졌다.

“편지. 잘 보관하고 있었네요?”

“…!”

깜짝 놀란 엘린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한 엘린이 소리쳤다.

“너, 너-!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야!”

“…엘린 어딨냐고 물으니깐 이쪽으로 가라던데요?”

“이, 이쪽으로 가라 했다고?”

“네. 노크를 할까 했는데 바깥의 기사가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해서 들어왔어요.”

아더의 설명에 엘린의 표정이 구겨졌다.

‘젠장! 이 빌어먹을 레버쿠젠의 근육덩어리들!’

악마들의 침공 때문에 일이 한창 바빠 노크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는 명령을 했었는데, 하필 지금도 그 명령을 철저히 지켰던 모양이다.

그 명령을 철저히 지킨 레버쿠젠 기사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은 엘린이 재빨리 제상태를 점검했다.

자다 일어난 탓에 피부며 얼굴이며 머리며 모두 엉망이었다.

그 끔찍한 몰골에 엘린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그 때, 아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엘린.”

움찔 놀란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엘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왜, 왜!”

“약속 지키셔야죠.”

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약속?”

“어라? 이제 와서 모른 척 하기에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손에 들린 엘린의 편지를 툭 두들겼다.

“북부로 오면 저에게 재미난 것들을 보여주신다 했잖아요. 설마 이 말을 어기실 건 아니죠?”

엘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지, 지금 상황에서 재미난 것들을 보여달라고?”

“네.”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죠?”

엘린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입을 열려는 그 때였다.

아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엘린이 뒷걸음질 쳤지만, 그만큼 아더가 다가왔다.

결국 벽에 몰린 엘린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자신도 꽤나 작지 않은 체구지만, 아더의 체구에 비할 바가 아닌 탓에 완전히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그 상태에서 고개를 숙인 아더가 낮은 중점으로 물었다.

“전 세상에서 약속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엘린.”

엘린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 속에서 아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북부의 자랑 레버쿠젠 영지인 하트. 저에게 소개시켜 줄 거죠?”

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폭발할 것 같은 심장 박동을 느끼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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