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191화 (191/265)

제191화

새하얀 설원 위.

그 곳에 찬란한 달빛이 터졌다.

[끼에에에엑-!]

눈이 멀 것만 같은 그 달빛에 악마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고성인지 귓청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었다.

허나 악마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게 한 달빛은 사그라들 생각이 없었다.

화악-!

오히려 그 범위를 넓혀 기어코 하늘까지 물들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던 엘린이 중얼거렸다.

“검… 강?”

선택받은 칼잡이만이 이룰 수 있는 지고한 경지.

그 경지에 도달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달빛을 두른 검.

검강(劍罡).

그 절기가 놀랍게도 새하얀 평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도 7년만에 마주한 사내의 검에서.

그 사실에 엘린이 경악을 감추지 못한 그 때, 피분수가 솟구쳤다.

“…!”

조금 전 아더에게 달려들었던 악마들의 피였다.

목이 잘려진 악마들의 얼굴이 눈송이마냥 후두둑 떨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엘린이 또 한 번 입을 벌린 그 때, 바이에른 기사들이 소리쳤다.

“가주님께서 드디어 진심으로 싸움에 임하셨다-!”

“바이에른 기사들은 가주님을 보좌해라!”

“절대로 가주님의 등뒤로 저 괴물의 접근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 외침과 함께 멈추었던 진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

피의 말을 탄 30명의 기사와 그 선두에 선 검강을 두른 소드마스터.

수적으로만 보면 보잘 것없는 그 군세가 수백의 악마들을 손쉽게 압도했다.

그 탓에 악마들이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지만, 그 후퇴를 지켜볼 아더가 아니었다.

콰콰콰쾅-!

왼손에 들린 비스트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한 번의 사격으로 수 십 마리의 악마들이 단번에 죽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악마들은 아더의 검강에 의해 사지가 이등분되었다.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악마들은 바이에른 기사와 카셀.

그리고 지니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버쿠젠 병사와 기사들은 뒤늦게 경악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저, 저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떻게 저토록 젊은 사내가 가주님과 같은 달빛을….”

“설마 제국에서 보내온 지원군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레버쿠젠 병사와 기사들이 당황할 때였다.

정신을 차린 엘린이 소리쳤다.

“성문을 열고 나간다!”

“……!”

“앞뒤로 저 악마들을 공격한다! 모든 병사와 기사는 집결해 내 뒤로 서라!”

그녀의 명령에 기사와 병사들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그도 그럴 게 이 말도 안 되는 습격이 시작된 이후, 성문 밖의 전투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없었다.

지금 내린 그녀의 판단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의 명령이다! 모두 한곳으로 집결해라-!”

갑작스레 등장한 소드마스터와 저 무리로 인해, 전황이 완벽히 뒤집혔다.

지금 성문 밖으로 나가 양면술을 펼친다면 저 악마들을 궤멸을 시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 탓에 기세를 올린 레버쿠젠 병사와 기사들이 집결하고 엘린이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단 한놈도 놓치지 마라! 레버쿠젠의 자식들이여!”

이 외침과 함께 레버쿠젠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악마들에게로 달려나갔다.

[……!]

깜짝 놀란 악마들이 앞뒤로 치고들어오는 두 군세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은 엘린과 아더에게 있어 충분한 시간이었다.

[꾸에에엑-!]

악마들이 양쪽에서 치고들어오는 군마에 의해 짓밟히고 목이 잘렸다.

동시에 터져나오는 피분수가 새하얀 평원을 붉게 물들였고 두 군세는 쉴 새 없이 악마들을 베어넘겼다.

그 결과 수 백이 넘던 악마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어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았다.

결국 겁에 질린 악마들이 길게 소리쳤다.

[끼에에엑!]

그 울음소리에 맞추어 살아남은 악마들이 설원 너머에 위치한 숲으로 달려 나갔다.

당연하지만 아더는 그 도주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피의 말의 엉덩이를 발로 후려찬 아더가 명령했다.

“도망치는 적을 살리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죠.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이게 뒤쫓아 가죠 피의 말씨.”

피의 말이 아더의 명령에 대답했다.

휘이잉-!

긴 울음소리와 함께 피의 말이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비스트를 재장전한 아더가 조준도 하지 않은 채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타타타탕-!

폭음이 터져 나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던 악마 무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악마들은 진실이에 둘린 검강에 목이 베였다.

그렇게 악착같은 추격 전 속에서 살아남은 악마들은 고작 열 몇 마리.

하지만 아더는 그 열 몇 마리조차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남은 악마들조차 베어 죽일 생각으로 숲으로 따라 들어가려는 순간 낯선 손길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돌리니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엘린이 보였다.

“…아더.”

그녀의 말에 아더가 잠시 눈을 끔뻑이다 방긋 웃었다.

“엘린.”

“…정말 아더 맞아?”

“네. 아더 맞아요. 그런데 엘린도 엘린 맞아요?”

아더가 몰라보게 달라진 엘린의 모습에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옛날… 모습이 하나도 안 남아있네요?”

앳되었던 얼굴은 성숙해져 있었고 갑옷 사이로 숨겨져 있지만 그 몸은 그간의 단련의 흔적을 알 수 있듯 몰라보게 단단해져 있었다.

그때 자신이 알던 예쁘장한 소녀가 아닌 한명의 기사이자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난 그녀였다.

그사이 엘린도 아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아더 너는… 하나도 안 변했네.”

“저야 뭘 늘 한결같죠.”

“……”

“아! 그런데 엘린, 저 놈들 따라가서 죽여야 하는 데 비켜주실래요? 잔당을 남겨봐야 좋을 게 없어서요.”

아더의 말에 엘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추격은 해서는 안 돼. 아더.”

아더의 눈이 커졌다.

“왜죠? 이유가 있어요?”

“저 숲에 들어가면 영영 못 빠져나올 거야.”

“…못 빠져나오다니요?”

엘린이 피곤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설명하려던 그 때였다.

거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이겼다고!”

“저 악마 놈들을 드디어 죽여보는구나!”

처음으로 맞이한 압도적인 승리.

그 승리에 열광한 레버쿠젠의 병사와 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그 눈물에 찬 함성에 엘린이 잠시 넋을 잃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성에가서 해 줄게. 일단… 들어가자.”

아더가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죠. 감동의 회포를 시체밭에서 풀기에는 그러니깐.”

사방에서 악마들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아더에게 있어서도 그 피 냄새는 상당히 역한 것이었다.

* * *

레버쿠젠 영지의 성, 하트는 거대했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바이에른의 영지, 에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단순히 크기만 놓고 보자면 제국의 수도와 비견 될 정도로 거대했는데, 그 장엄함에 아더는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대단하네… 이런 설원 한복판에 이토록 거대한 성을 짓다니.’

인간의 위대함일까.

아니면 레버쿠젠 가문의 위대함일까.

고민하던 아더는 둘 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성은 레버쿠젠 것이고, 이 성을 지은 것은 인간일 테니깐.

그 사이 엘린이 성의 마을을 지나 내성으로 아더를 안내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시선이 아더와 바이에른 기사들에게 꽂혔다.

하트의 영지민들.

그리고 조금 전 같이 싸운 레버쿠젠 가문의 병사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외부인을 처음 본 것 마냥 아더와 바이에른 기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바이에른 기사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흠… 꼭 저잣거리의 광대라도 된 기분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왜들 저렇게 빤히 바라보지?”

“설마 조금 전 치렀던 전투의 활약 때문인가?”

그 의문을 느낀 것일까.

앞장서 걷던 엘린이 입을 열어 설명했다.

“여섯 달만에 찾아온 외부인이라 그래.”

뒤따르던 아더가 질문했다.

“여섯 달만에 찾아온 외부인이요?”

“응 그동안 성이 단절되어 있었거든.”

아더의 눈이 커졌다.

“단절되어 있었다고요? 그런데 저희는 찾아왔는걸요?”

엘린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의문이야.”

“…….”

“7년만에 나타난 네가 하필 성이 단절되어 있을 때 찾아오다니? 사실 지금도 잘 안 믿겨.”

엘린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러니 우리는 대화를 나눠야 해. 경우에 따라서는 심문이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말과 함께 엘린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아더가 빤히 지켜보던 때, 옆에 있던 카셀이 중얼거렸다.

“살벌한 여자로군?”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저렇지 않아요.”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카셀이 옛날 엘린을 몰라서 그래요. 얼마나 귀엽고 깜찍했는데요.”

아더의 말에 카셀과 지니가 동시에 어깨를 떨며 중얼거렸다.

“구, 귀엽고 깜찍… 했다고?”

저토록 강인해 보이는 여인이?

그것보다 아더의 입에서 지금 누군가의 성격을 칭찬하는 말이 나온건가?

여러모로 놀랄 만한 사실에 카셀과 지니가 입을 벌린 사이, 아더가 엘린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섰다.

“나머지 분들은 여기서 대기해주십시오.”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나머지 인원들은 제지시켰다.

그 사실에 바이에른 기사들이 불만을 품고서 항의했다.

“바이에른 기사들은 항상 가주의 곁을 지켜야 하오!”

하지만 레버쿠젠 기사들은 철저히 묵살했다.

분노한 바이에른 기사들의 손이 칼잡이로 향한 그 때, 방문 너머로 고개를 쏙 내민 아더가 소리쳤다.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계세요 다들!”

“…….”

“우리는 손님이니깐 집주인의 말에 따라야 해요. 무슨 뜻인지 다들 알겠죠?”

아더의 경고에 바이에른 기사들이 붙잡으려던 칼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아더는 다시 몸을 돌려 엘린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옛날에 방문했던 엘린의 저택과는 꽤나 거리가 먼 지저분한 방안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서류와 책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핏자국도 드문드문 보였다.

‘흠… 변한 건 엘린의 외모뿐만이 아닌 것 같네.’

그 사이 엘린이 한 장의 양피지와 펜을 가지고 와 아더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깐 채 질문했다.

“먼저 인사는 해둘게. 우리를 도와줘서 고마워 아더.”

아더가 방긋 웃었다.

“당연히 도와야죠.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린 가문이 있는 곳인데.”

“…그래. 나도 네가 진짜 아더면 참 반가울 것 같네.”

“그게 무슨 소리죠?’

엘린이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진짜 아더 바이에른 맞아?”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아더 바이에른 맞는데요?”

“7년 전에 사라진 네가,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다고?”

아더가 이번에는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라기에는 꽤 됐어요. 저주에 갇혀 돌아온 지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니깐.”

엘린의 움직이던 펜이 멈추었다.

“저주에 갇혀있다… 돌아왔다고?”

“네. 설명해드릴까요?”

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더는 평소처럼 자신이 사라진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엘린의 표정이 점차 모호해졌다.

“…흰 수염? 그 전설로 전해지는 흑마법사의 저주에 네가 갇혀있었다고?”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지금은 같은 편이 됐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흰 수염 씨가 아티펙트가 됐거든요. 한번 보실래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가슴팍에서 비스트를 꺼내들어 툭툭 건드렸다.

“저기요 흰 수염 씨? 깨어있어요?”

아더의 부름에 비스트가 옅게 진동했다.

그 순간 놀랍게도 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이렇게 막 굴러도 되는 건가 아더 바이에른?]

그 광경에 엘린이 놀라 입을 벌린 사이, 아더가 설명했다.

“아 그게 아니고 제 지인이 흰 수염 씨의 저주에 갇혔다는 걸 못 믿어서요. 대신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이 꼴로 설명한다 해서 믿겠나? 그냥 내버려 두게. 어차피 믿을 놈이면 알아서 믿을 거야.]

이 말과 함께 비스트의 진동이 멈췄다.

아더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흠… 최근에 너무 부려 먹어서 화났나 봐요. 어쨌든 충분한 증거는 됐죠, 엘린?”

넋을 놓고 있던 엘린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바, 방금 전 목소리가… 진짜 흰 수염의 목소리였다고?”

“네. 사정이 있어서 비스트에 녹아들어 계세요.”

“…….”

“그럼 이제 취조는 끝난 건가요?”

엘린이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끝날 리가. 대체 정체가 뭐야 너?”

아더가 방긋 웃었다.

“아더 바이에른인데요?”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놓고, 아더 바이에른이라 믿으라고?”

“그렇죠? 믿으라고 한 소리니깐요.”

엘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나랑 말장난…!”

그 때 아더가 예고도 없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움찔 놀란 엘린이 뒤로 물러섰지만 반대로 아더가 그만큼 다가갔다.

그렇게 코가 닿을 거리만큼 다가 선 아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갑자기 궁금하네요.”

“…?”

“왜 그렇게 왜 절 밀어내요 엘린?”

아더의 말에 엘린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무, 뭘 밀어내?”

“지금 밀어내고 있잖아요?”

“그런 적 없어!”

“아니, 지금 그러고 있는데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웃었다.

“지금 이 취조도 억지로 하는 것 같고… 엘린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모른 척 해주고 싶은데, 가슴이 좀 아프네요. 7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이런 대우를 받으니깐.”

엘린의 목울대가 다시 한번 출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가 쉼 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아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거 다 답변해 드릴 테니, 저도 질문하나 할게요, 엘린.”

엘린이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기며 대답했다.

“…말해.”

그 허락에 아더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제 편지, 잘 받으셨나요?”

엘린의 눈이 커졌다.

그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은 아더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제 편지 어땠어요?”

엘린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닫아졌다.

그 망설임을 엿본 아더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그녀의 두 귀가 문득 시선에 들어왔다.

‘오….'

그녀의 귀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선명한 감정의 변화에 아더가 웃음을 터트렸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엘린.”

그 순간 엘린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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