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어두운 밤하늘 아래.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한 칼잡이의 검이 번뜩인다.
“드래곤을… 죽여야 한다.”
그 검에 서린 빛은 먹구름에 가려진 달빛과 비슷했다.
그 탓에 지니는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
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전설의 칼잡이.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달빛을 눈앞의 칼잡이가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너… 카셀 브리드잖아?”
용병 시절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본 적 있는 인연.
이제는 이 고성의 주인이 된 아더도 그와 몇 번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말한 수준 높은 용병인 카셀 브리드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니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때, 카셀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드래곤을… 죽인다.”
눈을 치켜뜬 지니가 혼절한 아이린을 안은 채로 바닥을 굴렀다.
쾅-!
폭음과 함께 먼지 바람이 휘날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니가 흠칫 몸을 떨었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맹수의 발톱이라도 할퀴어진 것마냥 파헤쳐져 있었다.
‘맞았으면… 죽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지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안면이 있는 용병이 소드마스터가 된 것도 모자라 바이에른 고성에 들이닥치다니?
그 수많은 경비병은 여태 뭘 했으며 저 용병이 왜 갑자기 이곳에서 드래곤을 찾는지도 의문이었다.
허나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드래곤을… 죽인다.”
소드마스터의 검이 다시 한번 들어올려졌다.
지니는 그 일격을 몇 번이고 피해낼 자신이 없었다.
실프를 불러낸 지니가 거칠게 소리쳤다.
“모두 비상-!! 침입자가 나타났다!”
잠들어 있던 바이에른 고성이 깨어난다.
* * *
달빛을 꺼내든 아더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일자로 바뀌고, 모든 기척이 제 오감을 통해 느껴졌다.
그 신비로운 감각 속에서 아더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가 중얼거렸다.
[…거참. 내 아들이지만, 이렇게 보니 참 괴물 같군.]
달빛을 꺼내든 아더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그 기세가 달라져 있었다.
칼을 쥔 칼잡이가 아니라, 한 자루의 칼이라도 된 것마냥 날카로운 예기가 전신에서 솟구쳤다.
그 모습은 검의 정점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 탓에 레오는 고민했다.
‘검으로는 승산이 없다.’
검으로 소드 마스터를 이길 수 있는 건 소드마스터 뿐.
그 탓에 레오는 변수를 주기 위해 혈통을 일으켰다.
젊은 시절, 눈이 3개인 뱀을 잡고서 얻은 능력인데 시선을 마주친 상대방의 몸을 굳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소드마스터가 괴물이긴 해도 무적은 아니다. 결국은 사람. 혈통의 능력이 통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
생각과 함께 레오가 눈빛을 번뜩였다.
능력이 통했는지, 아더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레오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너무 좋은 능력을 가졌다 해서 방심했구나, 아들아!!!]
외침과 함께 레오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내려찍어졌다.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세계가 일렁거렸다.
[…어라?]
탄성을 내지른 레오가 시선을 돌렸다.
달빛에 의해 잘려 나간 검기과 운철검을 바라보았다.
언제 잘렸는지 눈치채지도 못할 깔끔한 일격이었다.
그 사이 아더의 검이 레오의 목 끝에 닿았다.
“끝난 것 같네요, 아버지.”
아더의 말에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구나… 운석에 검기를 더한 것인데 이렇게 쉽게 잘려 나가다니.]
“소드마스터의 검강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죠.”
[…하긴, 소드마스터는 오로지 소드마스터로 상대할 수 있으니깐.]
“아버지는 아직 소드마스터는 아니시죠?”
아더의 질문에 레오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닿았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 경지는 아니란다.]
“그럼 제 승리군요.”
이 말과 함께 이번에는 아더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지켜보던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더.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뒤로부터 새하얀 두 날개가 솟아올랐다.
그 이변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천사?”
놀랍게도 레오의 등 뒤로 솟아오른 날개는 동화책에서 나오는 천사의 날개와 닮아있었다.
‘순백색의 깃털… 허. 그럼 아버지는 죽어서 천사가 되신 건가?’
그때 레오의 손에서 무언가 치솟아 올랐다.
조금 전 잘린 운철검이었다.
그런데 그 운철검에 둘린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말을 흐렸다.
“어… 라?”
또 하나의 달빛이 운철검에 천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 이변에 아더가 경악을 감추지 못할 때, 레오가 중얼거렸다.
[바이에른의 혈통은 상대방의 혈통을 빼앗아 오는 것….]
이 말과 함께 아더와 똑같은 달빛을 두른 레오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허나 그 힘을 극한까지 다루면 혈통을 넘어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가져올 수 있지.]
휘리릭, 운철검을 제 손에 돌린 레오가 눈빛을 번뜩였다.
[시험은 이제 시작이다, 아들아. 다시 검을 들어라.]
소드마스터의 힘을 빼앗은 레오의 검에서 달빛이 뿌려졌다.
* * *
아더는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헤이치에게 이야기를 들어 바이에른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다.
그는 바이에른의 진짜 힘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말했고, 아더는 그 범주를 지극히 상식적인 부분에서만 생각했다.
‘상대방의 마력이나 마나… 그런 것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눈앞의 아버지는 제 검강을 훔쳤다.
그 사실은 아더에게 있어 큰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해도 검강까지 빼앗다니?’
검강이 무엇인가?
모든 칼잡이들이 바라 마지않은 궁극의 절기.
이 절기를 손에 넣기 위해 수천 명의 칼잡이들이 끝없이 수련에 매진하지만 결국 이 달빛을 쥐는 건 선택받은 천재들 뿐이다.
그 선택받은 천재들조차 뼈를 깎는 노력과 하늘이 준 기회를 잡아야만 닿는 것이 바로 이 검강이다.
‘실제로 나도, 흰 수염 씨의 저주에서 50년 가까이 검을 휘둘렀고.’
그런데 그 노력의 결정체를 눈앞의 레오 바이에른은 단 한 번에 훔쳐가 버리고 만 것이다.
아더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흠… 검강을 빼앗기다니. 이건 당황스럽기보다는 기분이 나쁘네요, 아버지.”
아더의 말에 레오가 웃었다.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하지. 네 것을 빼앗겼으니 말이야.]
이 말과 함께 레오가 달빛을 휘둘렀다.
그 일격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방심하면 끝난다!’
그와 동시에 아더의 검이 움직여 레오의 달빛과 마주했다.
…쾅-!
한 박자 늦게 터진 폭음과 함께 두 칼잡이가 검을 교환했다.
그으으으윽-!
달빛이 흩뿌려지며 세상이 뒤흔들린다.
그 속에서 레오가 중얼거렸다.
[소드마스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대단한 힘이군.]
입꼬리를 올린 레오가 눈빛을 번뜩였다.
[그래서 궁금하구나, 아들아. 다른 네 혈통들은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이 말과 함께 레오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
그 순간 아더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아더가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테이큰 씨의 혈통?’
천년 전에 생존했다던 괴물.
트롤의 피를 이어받은 북부야만전사의 혈통.
놀랍게도 그 혈통의 힘을 레오가 쓰고 있었다.
‘저건 내 혈통인데?’
그 탓에 아더가 당황하는 그때, 레오가 트롤의 혈통으로 아더를 검째로 날려버렸다.
“큭!”
신음을 내뱉은 아더가 뒤늦게 똑같이 트롤의 혈통을 일으켰다.
허나 레오는 이미 또 다른 제 혈통을 훔쳐 쓰고 있었다.
[오호… 벼락이라. 이것도 흥미로운 힘이로구나.]
이 말과 함께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사라진 레오가 아더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흠칫 몸을 떤 아더가 기형적인 자세로 몸을 비틀어 레오의 일격을 막아냈다.
콰직-!
터져나오는 정전기와 함께 레오의 몸에서 벼락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쥴리의 혈통… 도대체 뭐지?’
아무리 바이에른 혈통의 진짜 힘이 상대방의 힘을 빼앗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아무런 제약 없이 훔쳐 올 수 있다니?
‘더군다나 아버지는 내 피도 안 먹었잖아?’
허나 길게 고민할 수 없었다.
테이큰의 혈통에 이어, 쥴리의 혈통까지 훔쳐 간 레오의 칼질이 더욱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쾅쾅쾅-!
한 번 한 번의 칼질이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위에서 내려찍어오는 느낌이었다.
아더는 그 칼질을 겨우 막아내다, 뱀파이어 로드 혈통을 일으켰다.
솨악-!
그 순간 아더의 몸에서 생겨난 피가 보호막처럼 둘러졌다.
레오가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뱀파이어 로드의 혈통… 드래곤 블러드와 거의 동급의 혈통으로 취급 받는 귀한 피지.]
이 말과 함께 레오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붉게 물든 레오의 눈동자와 함께 붉은 안개가 사방을 감쌌다.
“……!”
눈을 치켜뜬 아더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코앞에 있던 레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가셨지? 설마 이것도 혈통 능력인가?’
그 순간 피의 안개에서 운철검이 튀어나와 아더의 목덜미를 노렸다.
“……!”
깜짝 놀란 아더가 몸을 비틀었다.
허나 사라졌던 운철검이 이번에는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기형적인 자세로 그 일격을 피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지금 눈앞을 뒤덮은 짙은 안개.
이 안개가 아버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탓에 아더가 놀라 중얼거렸다.
“뱀파이어 로드 혈통에 이런 힘이 있다니… 흠. 의도치 않게 하나 배워가네.”
이 말과 함께 훌쩍 뛰어오른 아더가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 어느사이엔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레오가 그 벌어진 거리 만큼 추격해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이쯤 되니 어이가 없기 보다는 슬슬 궁금해지네.’
검강에 혈통까지.
천사의 날개를 단 레오 바이에른은 제 힘을 빼앗아 똑같이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오 바이에른은 어디까지 바이에른의 힘을 써서 상대방의 힘을 뺴앗을 수 있을까?
‘만약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면, 물건도 가능할까?’
고민하던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비스트가 옅은 진동을 보내왔다.
눈빛을 빛낸 아더가 비스트를 재장전했다.
철컥-!
그 이변에 달려오던 레오가 눈을 치켜떴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아더는 레오가 물러서려는 만큼 다가와 그의 미간에 총을 겨누었다.
“아버지 이마에다 총알을 박아넣을 줄은 몰랐네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울려퍼지는 총성과 함께 레오의 신체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제가 든 권총까지는 빼앗을 수는 없는 모양이죠?”
아더의 질문에 레오가 운철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조금 전 쏘아 보냈던 비스트의 탄알이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떨어졌다.
[흠… 확실히 그렇지. 이 힘도 만능이 아니니깐.]
“좋네요. 만능이 아니라는 건 파훼법이 있단 소리니깐.”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냐 아들아?]
“당연하죠. 아버지를 보니깐 점점 더 바이에른의 힘을 손에 넣고 싶어졌거든요.”
아더가 눈빛을 번뜩였다.
“그 힘이 있으면 가문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요. 그러니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어요.”
결의에 찬 아더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날 이기고, 이 힘을 빼앗아 가거라.]
이 말과 함께 레오가 다시 운철검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생각했다.
‘내 힘을 빼앗아간 시점에서, 아버지는 자기 혈통을 못 쓰고 있어.’
그 혈통의 힘마저 썼다면, 솔직히 말해 이 대련에서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레오는 그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아더는 이 점이 바이에른 혈통의 약점이라 판단했다.
‘무언가를 내준 만큼, 무언가를 쓸 수 없다… 대충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건가?’
아더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맞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버지가 흉내낼 수 없는 것. 그걸 사용해서 이겨야 해.’
아더의 시선이 손에 들린 비스트로 향했다.
그 순간 검은색 묵빛 권총이 살짝 진동했다.
아더가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비스트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럼 그렇게 생각하지.]
“오. 역시 제 권총답네요. 비스트의 생각도… 으잉?”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비스트가… 말을 했어?”
아더의 말에 비스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권총이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아더 바이에른?]
이 말에 아더의 입이 벌어졌다.
조금 전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어라? 흰 수염 씨가 왜 거기 계세요?”
아더의 질문에 천 년을 산 사상 최악의 흑마법사.
흰 수염이 가래 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잡담 말고 눈앞의 전투나 집중하게. 자네 상대는 무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