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단상에 오르기 직전.
아더는 콩닥콩닥 뛰고 있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흠… 긴장되네?”
긴장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지만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흥분된 정신과 몸은, 오히려 눈앞의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 확장된 세계 속에서 아더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긴장하는 걸 보니… 내가 가주가 되긴 하는구나.”
과거와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의 자신은 벙어리 아더 바이에른이었고, 공작가의 망령이자 미친놈이라 불리던 복수에 미친 귀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과거를 뛰어넘어 바이에른 공작가의 주인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아더는 뒤늦게 끓어오르는 환희와 기쁨.
그리고 기대감에 눈빛을 반짝였다.
‘과연 가주가 된 나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도르문트와의 싸움?
복수의 끝?
마침내 얻은 평화?
곰곰이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도 예측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어떤 나라도, 과거의 나와는 다르겠지.’
미쳐있던 정신이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처럼.
이번에도 과거의 자신과는 여러모로 또다시 달라질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남아있는 긴장을 옅은 한숨과 함께 몰아냈다.
그와 동시에 헤이치가 소리쳤다.
“바이에른의 적통한 핏줄-! 천 년을 이어온 가문을 이어받을 새로운 주인이 등장합니다!”
그 외침이 울려 퍼진 순간, 아더는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계단을 하나씩 타고 올라가 단상 위에 우뚝 섰다.
자연스레 이번 취임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더는 그 집중된 이목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더 바이에른입니다.”
공작가의 후계자 아더 바이에른이 아닌, 아더 바이에른 공작으로서 건네는 첫인사였다.
* * *
아더의 등장에 귀빈들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저 분이 아더 바이에른 공자라고?”
그간 줄곧 베일에 싸여있던 바이에른의 적통한 후계자.
아더 바이에른.
그의 모습이 생각보다 훤칠했기 때문이었다.
바이에른의 상징을 하는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그 어떤 사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건장한 체격.
날카로운 턱선과 낮게 가라앉은 눈은 형형하다 못해 빛이 났다.
그런 아더 바이에른에게는 벙어리라 불리던 시절의 모습은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탓에 바이에른 고성을 방문한 모든 귀빈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나올 때였다.
바이에른의 방계.
그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3가문의 가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케인 물이 좋긴 한가 봅니다? 벙어리라 불리던 분을 저렇게 만들어 놓다니.”
“하지만 눈빛이 영 불길한 게… 예감이 좋지 않군요.”
“보통 저런 눈빛을 가진 자들이 사고를 거하게 치던데 허허….”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지니가 코웃음을 쳤다.
‘트집을 잡을 게 없어서, 고작 눈빛 타령?’
유치해도 너무 유치했다.
그 탓에 화가 나가 보다는 오히려 궁금해졌다.
‘왜 저렇게 바이에른을 못 까내려서 안 달이지?’
예로부터 방계 출신들이 본가를 싫어하는 건 전통이긴 하지만, 저들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그때 옆에 있던 안나가 중얼거렸다.
“공자님 외모가 완벽하긴 한가 봐요. 고작 흠을 잡은 게 눈빛이라니.”
제 생각과 똑같은 안나의 말에 지니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바이에른 고성의 1급 관리사.
헤이치가 소리쳤다.
“새로운 가주가 되실 아더 바이에른 공자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좌중은 모두 침묵해주십시요!”
그 외침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서, 다시 아더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더도 마찬가지였다.
“…….”
자신을 바라보는 바이에른 가신들을 한동안 지켜보던 아더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아더 바이에른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 소리가 멎을 때까지, 뜸을 들이던 아더가 다음 말을 이었다.
“먼저 이 자리에 오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바쁜 몸이신데, 수고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긴장을 한 채 아더의 연설을 듣고 있던 요넬과 아이린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나쁘지 않아!’
‘좌중에 대한 배려! 첫 시작은 너무 좋았어!’
두 모녀의 소리 없는 외침과 함께 아더가 술술 연설을 이어나갔다.
공작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직도 얼떨떨하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
앞으로 여러 가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이야기.
평범하면서도 격식을 차린 연설에 바이에른의 가신들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난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군.’
‘말하는 것에 힘이 있다. 모름지기,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의 말에 힘이 있어야하는 법.’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합격점을 줄만하군.’
떨지 않고 연설을 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갔다라는 평가.
그 탓에 새로운 가주에 대한 불안감이 기대로 바뀔 때였다.
아더가 방긋 웃으며 선언했다.
“…그래서 전쟁을 할 생각입니다.”
“…?”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로 바이에른의 모든 힘을 결집해 이곳에 모으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가 눈을 끔뻑였다.
저게 무슨 소리지? 전쟁이라니?
그때 아더가 다시 한 번 강한 의지를 담아 선언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협조를 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주가 되면 할 전쟁은, 모두가 힘을 모으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전쟁이니깐요.”
그 순간 귀빈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새로운 바이에른의 공작.
그가 밝힌 포부는 놀랍게도 전쟁이었다.
* * *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 침묵 속에서 아더가 방긋 웃었다.
“다들 도와주실 거죠?”
“…….”
“당연히 도와주실 거라 믿습니다. 저희 바이에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꼭 승리해야 하니깐요.”
정신을 차린 귀빈들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취임식 때 전쟁을 할 거라 선언한다고?”
‘도대체 누구랑 전쟁을 한단 말인가?’
그들은 아더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우왕좌왕 헤맸다.
그건 바이에른의 모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입을 벌린 채,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왜 하필 지금 전쟁 선언이야-!’
‘아, 아더? 이건 너무 급하지 않니?’
도르문트와 전쟁을 할 것이란 건 일찍이 아더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지를 지금 이 순간에 밝힐 줄은 전혀 꿈에도 몰랐던 그녀들이었다.
그 탓에 안절부절못한 채,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볼 때였다.
누군가 손을 들고서 거칠게 소리쳤다.
“…전쟁이라니! 절대로 안 됩니다, 아더 바이에른 공자-!”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이에른 방계.
그들을 대표하는 3가문의 가주가 당당히 걸어나와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전쟁이라니요! 이제야 막, 평화가 찾아온 시점! 가문을 다스려도 모자랄 판에 제정신이신 겁니까!?”
그 3가문 중, 가장 웃어른 격이라 평가받는 제이 가문의 알렉스 제이가 소리쳤다.
그 외침에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질문했다.
“평화가 찾아왔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네. 대체 어딜 봐서 평화가 찾아왔다는 거죠?”
“…허! 가주가 되실 분이 저렇게 정세를 읽는 눈이 흐려서야!”
혀를 찬 알렉스 제이가 거칠게 소리쳤다.
“지금 바이에른 가문은 외부의 일보다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고요?”
“예! 행방불명 되었던 공자는 물론이고, 요넬 바이에른 각하께서도 돌아….”
제이 알렉스가 아더를 상대로 일장 연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연설을 조용히 엿듣던 귀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이 쎄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갑자기 전쟁이라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알렉스 공의 말대로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다.’
바이에른은 그간 몇십 년간 급격히 흔들렸었다.
바이에른 가주의 부재.
사라진 후계자.
내부 외부 가릴 거 없이 흔들어대는 여러 세력들.
그런 와중에 새로운 가주가 탄생했다.
그 가주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흔들리는 바이에른을 강하게 휘어잡는 것.
그런데 그 새로운 가주가 갑자기 전쟁을 선언하다니?
그 탓에 모두가 아더의 발언을 실언이라 보았고, 그 분위기를 읽은 제이가 신이나 소리쳤다.
“…그러니, 절대로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하시고, 모두에게 사과를 하시지요. 공자의 실언은 곧 바이에른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이니.”
그와 동시에 알렉스 제이가, 옆에 있는 다른 두 방계 가문의 가주들한테 눈짓했다.
그 시선에 두 방계 가문의 가주도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철회에 주십시오-!”
“전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공자!”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린 요넬이 버럭 화를 냈다.
“저자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로운 가주의 첫 연설을 철회해달라니!”
첫 연설을 번복한 순간 새 가주의 위엄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기류를 느낀 것인지, 자리에 모인 귀빈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그 탓에 요넬이 자리에 나서려 할 때 침묵하던 아더가 입을 열었다.
“흠… 당신 이름이 뭐죠?”
아더의 질문에 알렉스 제이가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
“바이에른의 방계, 제이 가문의 알렉스입니다, 공자!”
“아, 방계 가문의 알렉스 제이시군요. 그래서 바이에른의 충성심이 그렇게 뛰어났군요.”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방계는 직계를 도와 가문을 흥하게 해야 하는 법! 제 뜻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아더가 방긋 웃었다.
“당신은 도르문트 편이세요, 바이에른 편이세요?”
알렉스 제이가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공자?”
“말 그대로입니다. 도르문트 편이세요, 바이에른 편이세요?”
알렉스 제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이런 맥락 없는 질문을 던지다니?
제 지적이 너무 정확해 실성이라도 한 건가?
알렉스 제이가 당당히 소리쳤다.
“당연히 바이에른의 편이지 않겠습니까!?”
그 외침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대답 잘 들었습니다.”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를 꺼내들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에 알렉스 제이가 눈을 끔뻑였다.
뭐지? 왜 총성이 울려 퍼진 거지?
그보다 왜 내 시야에 피가 흘러 내리는…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알렉스 제이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눈을 끔뻑거렸다.
“…?”
뭐지? 무슨 일어난 거지?
갑자기 왜 총성이 울려 퍼지고, 알렉스 제이 공이 쓰러졌단 말인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모두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때, 아더가 혀를 찼다.
“설교는 좋았는데, 진심이 담기지 못했네요.”
“…”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이에른이 아닌 도르문트를 위한 것이었다니….”
아더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귀빈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 걸음에 귀빈들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다.
허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탓에 그들의 눈이 커진 순간, 아더가 중얼거렸다.
“전 항상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과 함께 아더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바이에른이 힘들 때, 그 많던 바이에른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바이에른이 건재할 때는 그 단물을 쏙쏙 빨아먹던 자들이 왜 힘들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을까. 그 의문을 말이죠.”
고개를 든 아더가 굳어진 바이에른 귀빈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니 묻고 싶네요. 당신들은 바이에른이 그토록 힘들 때 뭘 했죠?”
“…!”
“우리가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당신들은 왜 그 제안을 거절하고 침묵으로 일관했을까요?”
아더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무도 대답 못 하시네요.”
“…….”
“뭐… 이해는 합니다. 누가 낡은 동아줄을 잡고 싶겠어요? 튼튼한 새 동아줄을 잡고 싶겠지.”
아더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를 각오는 다들 되어 있겠죠?”
“…!”
“그런 의미에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제가 첫 번째 할 일은 간단명료해졌네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를 꺼내들어 바이에른의 방계들을 향해 겨누었다.
“지금부터 숙청에 들어가겠습니다. 배신자와 배신자가 아닌 자. 배신자인 분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모두 죽습니다.”
아더가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질문 할게요. 여러분은 도르문트 편이세요 바이에른 편이세요?”
바이에른 귀빈.
정확히는 방계들의 입이 경악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