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그도 그럴 게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자신과 똑닮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흰 수염의 저주에 갇혔을 때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제 아버지가 환히 웃고 있었다.
아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아버지가 왜 여기서 나와요?”
[이 놈의 자식이. 그게 처음 만난 아버지한테 할 소리냐?]
“…처음 만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우리 처음 만난 거 아니냐?]
“전에 만났잖아요. 흰 수염의 저주에 갇혀 있을 때.”
레오 바이에른의 눈이 커졌다.
[오호? 저주에 갇혔을 때,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네. 기억 안 나세요?”
[흠…아무래도 네 핏줄 속에 각인 된 내 기억이 살아난 모양이구나. 지금의 나하고는 무관한 또 다른 나하고.]
“…?”
[뭐, 그건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넘기자꾸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말을 흐린 레오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부자지간의 눈물겨운 포옹 아니겠느냐?]
“…….”
[이리와서 내게 안기거라 아들아. 너무 보고 싶었다.]
레오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이번 아버지는 어딘가 조금 이상한데?’
전에 보았던 아버지는 침착했는데 이번 아버지는 매우 방정맞았다.‘보통 나이가 들면 더 침착해지지 않나?’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였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성격의 아버지건 지금 눈앞에 있는 레오 바이에른은 진짜다.
아더가 폴짝 뛰어올라 레오의 품 안에 안겼다.
[어이쿠. 다 큰 사내놈을 안으려니, 쑥스럽기 그지없구만.]
아더가 입술을 삐쭉였다.
“아버지가 안기라 해놓고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원래 아버지는 아들과 사이가 어색해야 해. 내 주변 놈들은 다 그랬거든.]
“흠… 그럼 저희가 특별한 거네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뭐… 나쁘지 않구나. 항상 나는 나를 똑 닮은 아들놈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했거든.]
레오 바이에른이 씩 웃었다.
아더 바이에른도 씩 웃었다.
비슷한 미소를 지은 두 부자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때, 갑자기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끼에에에엑-!!! 이게 뭐야! 왜 바이에른의 문이 열려 있는 거야!’
바이에른 성의 1급 관시라.
동시에 고성을 지켜온 골렘, 헤이치였다.
그의 비명에 레오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헤이치가 우리 부자의 만남을 눈치챈 모양이구나.]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채면 안 되는 건가요?”
[원래 자격이 안 되면 이곳에 못 들어오거든. 네가 공작이 되어야지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단다.]
“어? 하지만 저는 들어왔잖아요?”
[내가 꼼수 좀 부렸어. 우리 아들 얼굴 보고 싶어서.]
“…….”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레오도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때, 헤이치의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망할 바이에른 핏줄들! 적당히 사고를 쳐야지, 제 선조가 걸어놓은 규율을 어기는 미친놈이 어디있어!’
헤이치의 말에 레오와 아더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저 양반. 많이 화가 났구만.]
“헤이치 씨. 평소에도 화내지 않나요?”
[그렇긴 해. 하지만 착한 사람… 아니 골렘이야. 그러니 잘 대해주거라 아더.]
“헤이치가 착한 골렘이라고요?”
[헤이치는 천년 전, 바이에른의 시초. 데니안 바이에른을 보좌하던 종자란다.]
아더의 눈이 커졌다.
“데니안 바이에른… 가문의 시초를 보좌하던 종자라고요?”
[그래. 충실했던 종자는 옛 주인을 잊지 못하고 천 년이나 그의 부탁을 지켜오고 있지.]
“…….”
[바이에른의 고성을 지켜라. 이 한마디 말 때문에 천 년이나 같은 곳에 머물고 있단다. 그러니 돌아가면 그에게 잘해주거라.]
레오의 말에 아더가 곰곰이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헤이치란 골렘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까칠한 성격이지만 선함이 느껴지는 골렘.
그래서 에덴의 영지민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일 것이다.
“잘 해줄게요 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더의 대답을 들은 레오가 인자하게 웃었다.
동시에 아더를 살며시 밀어냈다.
그 탓에 아더의 눈이 커진 그 때, 레오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남은 여기까지. 다음에는 공작이 되서 내게 오너라 아더 바이에른.]
“…!”
[바이에른의 주인이 되어, 이곳에 시험을 들어 네 운명이자 천 년 전 약조의 때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 말에 아더가 입을 벌렸다.
“천 년 전… 약조의 때요?”
아더의 질문에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금방 다시 보자꾸나 아들아.]
그 순간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아더의 정신이 급격하게 뒤흔들렸다.
그 기괴한 감각 속에서 아더가 옅은 탄성을 내지른 순간, 엉덩이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
감고 있던 눈을 뜬 아더가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조금 전 새하얀 공간을 들어오기 전, 보았던 거대한 사자 대문이 코앞에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때와 달리 굳에 닫혀있다는 점.‘그 새하얀 공간에서 빠져나온 거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진한 아쉬움을 삼켰다.
기껏 아버지를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지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가주가 되고서 다시 보자고 했으니깐, 금방 만날 수 있겠지?’
아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의 절반이 달아났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도끼눈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는 헤이치가 보였다.
“오. 헤이치?”
아더의 말에 헤이치가 입술을 씰룩였다.
“첫 날부터 거하게 사고를 치셨군요. 바이에른의 미친 혈족이시여.”
머쓱해진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 * *
헤이치의 표정이 울그락 불그락 변했다.
콧김을 킁킁 내뿜던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바이에른 혈족을 믿은 내 잘못이지. 이 놈들이 언제 사람 말을 따른 적이 있던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은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변명이나 해보시죠. 공작이 되면, 모든 걸 설명 드린다 했는데 왜 그새를 못 참고 성의 비밀을 엿보신 겁니까? 아더 바이에른 공자님.”
헤이치의 질문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에요 헤이치.”
“그럼 뭐 저 문 너머에 있는 영격들이 공자님을 불러오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
“아버지가 부르던데요? 저 문너머로 오라고.”
“…”
입을 다문 헤이치가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지? 전전대 공작이신 레오 바이에른님이 공자님을 부르셨단 겁니까?”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치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부전자전… 옛날 격언은 틀리지가 않는군.”
“….”
“그 망할놈의 레오 바이에른은 죽어서도 사고를 치는구나-!”
헤이치의 말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많이 치셨나요?”
“공자님보다 덜 했으면 덜했지. 결코 낮지는 않았습니다.”
“…”
한숨을 푹 하고 내어쉰 헤이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덕분에 일을 다망쳤어. 규율이고 뭐고 다 엉망이 되어버렸구만.”
“….”
“쯧…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나 좀 나누시겠습니까? 원래라면 공작이 된 뒤에 말씀드리려 했지만, 다 밝혀진 마당에 비밀을 숨겨봐야 의미도 없고.”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저야 좋죠. 말씀해주세요.”
“일단 자리부터 옮기시죠.”
이 말과 함께 헤이치가 지하실을 빠져나가, 제 방으로 향했다.
바이에른 고성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의 방치고 무척이나 검소한 방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책장 하나.
그가 가진 물건이라고는 이것이 끝이었다.
그 때 헤이치가 차 한잔을 들고 나타나 아더에게 내밀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아더가 차를 들이켰다.
향기로운 것이 무척이나 품질이 좋은 차인 듯 했다.
그 사이 아더의 앞에 주저앉은 헤이치가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서 영격이 된 레오 바이에른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더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공작이 되서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 정도?”
아더의 말에 헤이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게 끝입니까?”
“네 끝이에요.”
“…….”
헤이치가 입술을 오물거리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영원히 죽어서도 레오 바이에른님은 철이 안 드시는군요. 고작 그런 이유로 대문 밖을 빠져나오다니.”
헤이치의 말에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아버지에 대해 아시나요?”
“그럼 알다마다요. 제 속을 얼마나 썩이신 분인데.”
“오호.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아더의 질문에 헤이치가 머리를 긁적였다.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들으시겠습니까?”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소리건 안 좋은 소리건 아버지에 관해서는 더 알고 싶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십시오 공자님.”
이 말과 함께 헤이치의 설명이 시작됐다.
그는 쉬지 않고 레오 바이에른의 기행에 관해 이야기 했다.
“어렸을 때는 전쟁놀이한다고 성 전체를 뒤집어 놓지 않나, 갑자기 뒷골목 아이들이랑 패싸움을 하지 않나. 커서도 그 버릇을 못 고쳐서….”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레오 바이에른의 기행은 참으로 다양하고 기발했다.
그 탓에 아더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나왔다.‘와… 우리 아버지. 진짜 개망나니였구나.’
아버지한테 개망나니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헤이치가 한 이야기들만 들어보면 딱 그랬다.
망나니.
그것도 평범한 망나니가 아니라 개망나니였다.
그 때 헤이치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다 바이에른 가문을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데 어찌 속을 썩이시는지….”
그 웃음에 정신을 차린 아더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랑 썩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나보네요 헤이치 씨?”
“나쁜 편이었죠. 뭐, 좋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분이랑 같이 있었으면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았으니깐.”
이 말과 함께 헤이치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것도 확신할 수 있겠네요. 만약 레오 바이에른…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아주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겁니다 공자.”
“왜요?”
“그 문은 쉬이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문을 빠져나왔다는 건 그만큼 레오 바이에른님의 영격이 공자님을 보고 싶었단 소리죠.”
“…!”
아더의 입이 작게 빌어졌다.
그 모습에 헤이치가 작게 미소지었다.
“뭐… 어찌되었건, 오늘 공자께서는 바이에른의 비밀은 본 것입니다.”
“바이에른의 비밀이요?”
“예. 지금 공자께서 넘으신 문은 바이에른의 영격을 모셔놓은 곳.”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헤이치의 눈빛이 번뜩였다.
“모든 바이에른의 혈족, 가주. 그들의 영혼의 일부를 남겨놓은 아주 비밀스러운 장소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실에 아더가 당황해 질문했다.
“어… 영혼을 나누어 남겨놓았다고요? 그런게 가능한가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역대 가주들 모두가 저 문을 넘고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바이에른의 전대 가주들을 뵈었다고. 천 년간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니 거짓일 리는 없지 않습니까?”
아더가 곰곰히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치는 천 년을 살아온 골렘.
그런 그가 천 년이나 같은 광경을 봐왔다면, 이 사실은 거짓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왜 바이에른 가주들의 영혼의 일부를 저곳에 남겨 놓는 거죠?’
아더의 질문에 헤이치가 입꼬리를 올렸다.
“바이에른의 혈통.”
“…?”
“그 힘을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바이에른의 혈통의 힘이요? 저는 이미 일깨웠는데요?”
“그건 일깨운 게 아닙니다. 상대방의 피를 마시고 혈통을 뺴앗는 것. 그건 바이에른 혈통의 극히 일부입니다.”
아더의 입이 벌어졌다.‘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바이에른 혈통의 비밀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사이 헤이치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공자께서 가주가 되시면 시련에 드실 겁니다.”
그 순간 헤이치의 목소리가 중후하게 바뀌어 아더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 시련을 이겨내시고 바이에른 혈통의 힘을 완전히 일깨우는 것. 그게 바이에른의 진정한 가주가 되는 자격입니다.”
아더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 힘이 뭐죠 헤이치?”
아더의 질문에 헤이치의 머리 위에서 옅은 후광이 터져나왔다.
“그 힘은 바로….”